〈 148화 〉 백진희 공략
* * *
기다렸던 칠격의 연락이 왔다. 사냥의 준비가 끝났다고. 성현이는 앞으로 있을 일들을 여자들에게 얘기했고, 모두 한 마음으로 합심해서 백진희를 사냥하기로 마음먹었다.
다 같이 칠격의 아지트에 모인 우리는 생각보다 꽤 많은 인원이었다. 일단 성현이의 하렘은 총 6명이었고, 칠격도 7명이어서 모인 인원만 해도 13명이나 되었으니까.
초코파이와 주스를 대접받고 긴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하려 할 때. 내 맞은편에 있던 은발의 암살자. 일리아가 갑자기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아주 행복해 보이네? 재수 없게.”
갑작스러운 적의에 당황하여, 일리아를 바라보자. 눈을 좁히며 뭘 보냐는 식으로 오히려 역정을 내었다.
“시비 걸지 말지? 생리면 입이라도 닫든가.”
자기 잘못을 고백한 이후 이제는 진짜 내 편이 된 한서아가 나를 대신해 일리아에게 쏘아붙였다.
“하, 이젠 별것도 아닌 쓰레기가 기어오르네.”
일리아의 주변에 마력이 끓어오르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당장에라도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려는 준비를 하는 한서아의 모습에 일리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탕탕!
“그만.”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쳐 시선을 집중시킨 신한림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민성이 우리를 위해 남긴 계획이다. 그 죽음을 헛되게 할 생각은 없지?”
신한림의 말에 일리아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계획은 대충 들었으니 알 거야. 백진희를 사로잡아 김성현이 공략 할 수 있게 돕는 것.”
“아, 확실히 백진희의 공략은 가능한 거야?”
알펜시아의 질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성현이에게 몰렸다.
“가능해. 백진희와 섹스하면 될 거야. 지금 공략도는 왜인지 모르지만 32%거든.”
성현이의 말에 알펜시아는 흥미로운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여자를 강간해도 공략이 오른다라. 내가 남자인 게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며 슬쩍 옆에 앉은 일리아를 툭툭 팔꿈치로 치자, 일리아가 이를 갈았다.
“어쩌라고 씨발아.”
“아니, 그냥 그렇다고~”
살기가 담긴 일리아의 눈빛에 시선을 피하며 알펜시아가 중얼거렸다.
“자, 계획을 설명할게. 오오누마가 결계를 만들면 우리는 그곳에서 백진희를 사냥할 거야. 백진희를 전투 불능으로 만든 뒤, 김성현이 백진희와 섹스해 공략하여 마왕성으로 가는 스노 글로브를 얻는 게 최종 목적이야.”
신한림의 말에 한서아가 궁금한 것이 있는지 손을 번쩍 들었다.
“응. 좋은 태도야. 말해봐 학생.”
“스노 글로브를 얻으면 백진희는 어떻게 할 건가요?”
그 물음에 신한림은 성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건 김성현의 결정에 따라야지.”
“조민성은 백진희가 자신의 캐릭터 설정상 [큰 흐름]을 거슬러 자기 죽음으로는 더는 회귀할 수 없다고 했어. 하지만 혹시라는 것도 있으니 일단 마왕을 무찌르기 전까지는 감금해놓자. 공략이 끝나면 내 말에 저항하지도 못할 거니까.”
“맞아, 백진희라면 또 어떤 계획을 세웠을지 몰라.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성현이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자. 다들 동의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희는 지금 아무 곳도 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어. 백진희를 밖으로 유인한 다음 결계를 펼치면 주변에 피해는 가지 않을 거야.”
신한림의 말에 성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백진희가 다른 계획을 꾸미기 전에 최대한 빨리 사냥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사냥은 오늘 밤으로 하지. 밖으로 유인하는 건 신아린이 제격이라고 생각하는데. 괜찮나?”
그 말에 성현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괜찮겠어?”
“응.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자. 신한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리아에게 손짓했다.
“일리아가 네 주변에서 너를 보호할 거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신한림의 명을 달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신살법을 익힌 일리아라면 확실히 믿을 만 했다.
“그럼 시간에 맞춰 초월 아카데미에서 보지.”
신한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자 칠격이 그 뒤를 따라갔다.
다들 저마다 생각할 것들이 있는지 침묵에 빠진 분위기를 성현이가 부드럽게 풀어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으니 누군가가 다칠 위험은 더 적을 거야.”
성현이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볼게. 지금이라도 빠지고 싶은 사람있어? 있으면 말해줘.”
“없어요! 우린 모두 성현이와 아린씨를 좋아하니까!”
토우코의 말에 다들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다들.”
성현이는 갑자기 일어나서 허리를 푹 숙였다.
“나 같은 놈을 사랑해줘서. 날 위해 위험을 감수해줘서 정말로 고마워. 평생을 바쳐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성현이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볼을 붙잡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다 같이 사냥 전에 비싼 고기나 먹으러 가자.”
지갑에서 한도가 없는 블랙 카드를 꺼내 들어 보이자. 모두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
초월 아카데미에 푸른 달빛이 내려앉았다. 방학임에도 아카데미에 남아 공부와 훈련을 하는 열정적인 학생들에 건물에는 전등의 불빛이 달빛과 섞여 어둠을 밝혔다.
백진희는 비밀의 방에 있었다. 8층의 거울 앞에서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예전의 기억이었다.
나를 바라보며 버릇처럼 말하던 말.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문득 그 의미가 궁금해졌다. 단순히 성현이 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기아스라는 설정을 꺼낸 이유가 정말로 나를 성현이에게 사랑으로 묶으려는 거였을까.
백진희의 진짜 속마음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로 2걸음.”
등을 지나치는 부드러운 천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뒤를 돌자, 테이블에 앉아 고블린의 연주를 듣고 있던 백진희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을 받아 더욱 비현실적인 미모를 보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안녕, 아린아.”
평소처럼 내 이름을 부르는 백진희의 목소리에 무언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백진희,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그 말에 백진희는 비어 있는 맞은편의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고는 담배를 껐다.
맞은편 의자에 앉자, 아직 가시지 않은 담배 연기에 헛기침이 나왔다.
“할 말이 뭐야?”
손으로 턱을 괸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를 바라봤다.
“넌 영또플의 작가가 맞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영또플을 만든 작가가 맞는지.
“…알아냈구나?”
씁쓸한 미소를 짓는 백진희의 모습에 화가 났다.
“왜 그동안 날 속여왔어?”
“굳이 속이려고 한 적은 없어. 그냥 괜한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이지.”
“괜한 말이 아니잖아! 그게 얼마나 중요한 말인데! 나는 네 소설에 빙의한 거라고!”
“알아. 그래서 책임지고 너를 보호 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려 했잖아.”
죄책감 하나 없는 뻔뻔한 표정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동안 내가 이 세계에 빙의하여 당했던 고통이 모두 백진희 탓인 것 같았다.
“왜 날 빙의한 거야! 나는 그냥 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였는 데….”
내 말에 백진희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 소설에 널 빙의시켰다고 생각해?”
“그럼 아니야?”
“난 그런 힘은 없어. 나도 억지로 이 소설에 끌려왔는데. 내가 어떻게 밖에 있는 너까지 소설에 빙의시켰겠어?”
백진희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처럼 백진희도 이 세계에 강제로 빙의 된 거라면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걸까.
“내가 소설을 연중하고 어느 날 쪽지를 하나 받았어.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을 버리는 거냐고.”
과거를 떠올리듯 백진희는 팔짱을 끼고 먼 곳을 바라봤다.
“독자중에 한 명인가 보다 하고 그냥 차단해버렸지. 내가 만든 세상인데 끝내는 것도 내 마음이잖아?”
“네 소설을 좋아하던 사람들을 배신하는 거잖아.”
나도 그중에 하나였고, 연재가 재개되길 기도하던 독자였다.
“더는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아무튼 그날 이후 나는 이 소설에 빙의했어. 자신의 세상을 버린 대가인 걸까?”
쓴웃음을 짓는 백진희의 모습에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너의 소설을 좋아했다. 응원했고 질투하기도 했다.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막상 눈앞의 백진희가 작가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더 대화하기보다는 계획대로 밖으로 백진희를 유인하기로 했다.
“나랑 밖에서 좀 걸을래?”
“좋아.”
별 의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백진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잡고 걸을까?”
마치 어린 동생을 다루듯. 자연스레 내게 손을 내미는 백진희의 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반발심이 들었다.
“아니, 그냥 걷자.”
내 차가운 대답에 백진희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달빛이 내려앉은 교정을 걸으며, 나는 미리 약속했던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뒤따라오던 백진희는 콧노래를 부르며 따라오다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린아. 나를 원망해?”
그 맥락 없는 말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백진희를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 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백진희에게 나는 짧게 대답했다.
“응.”
“…날 원망해도 좋아. 넌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게 무슨…."
"날 원망하고, 싫어한다 해도 나는 네 행복을 위해 노력할 거야."
처음으로 듣는 슬픈 목소리였다. 어째서 내게 이런 감정을 내보이는 건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고 몸을 돌려 함정 속으로 백진희를 유도했다.
약속했던 장소로 백진희를 유인하자. 초록색 빛이 퍼지더니 백진희를 가둘 결계가 넓게 펴졌다.
나는 빠르게 백진희에게 멀어져 검을 꺼내 겨누었지만, 백진희는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도 태연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봤다.
“걷자는 건 함정이었구나?”
“그래.”
"아쉽네. 아직 나눌만한 대화가 많을 것 같았는데."
은신술로 숨어 있던 성현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칠격과 하렘의 멤버들이 백진희를 포위했다.
백진희는 주변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직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나를 죽일 거야?”
나를 바라보는 백진희의 시선에 왜인지 모르게 망설임이 들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그러진 않을 거야. 네가 순순히 마왕성으로 가는 스노 글로브를 넘긴다면 싸울 필요도 없어.”
나를 대신해 성현이가 그리 말하자. 백진희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김성현을 바라봤다.
“아하, 그게 목적이구나? 조민성이 꽤 머리를 굴렸나 봐.”
미소를 짓던 백진희가 오른손을 들자, 하얀 마력이 모이더니 어느 순간 스노 글로브가 백진희의 손에 들려있었다.
“이걸 쉽게 내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그리 말하며 백진희가 스노 글로브를 손에서 내려놨다. 땅에 떨어지던 스노 글로브에 김성현과 신한림이 다급히 다가가려 할 때. 땅바닥에서 얼음이 치솟아 스노 글로브를 얼음 속에 가두었다.
“스노 글로브를 가져갈 방법은 아주 간단해. 나를 쓰러트리고 가져가는 것.”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백진희의 몸에서 새하얀 섬광이 터져 나왔다. 선연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주변을 하얀빛으로 물들여가며 하얀 마력이 주변의 공간을 우그러트리기 시작했다.
섬광이 사라지고 냉기를 뿜어내며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백진희는 서늘한 미소를 한차례 지으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창이 공간을 우그러트리며 나타나 백진희의 손에 쥐어졌다.
“창조주에게 검을 내밀은 대가를 치르게 해줄게.”
백진희가 뿜어내는 선연한 존재감에 그곳에 있던 모두의 기세가 압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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