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백진희의 정체
* * *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결국 울음소리를 듣고 나를 걱정해 찾아온 임유모의 따스한 위로가 없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수하고, 감정을 정리한 뒤. 기다리고 있던 김비서와 얘기를 했다. 본가는 일단 관리만 하기로 했다. 나중에 아카데미에서 졸업하면 성현이와 함께 이곳에서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집도 넓었고, 방도 많아서 성현이의 다른 여자들도 이곳에서 살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현이를 독점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성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같이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자 성현이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성현이에게 달려가 안기자. 가슴이 눌려 아플 정도로 꽉 안아준 성현이는 짧은 입맞춤을 한 뒤. 내 손을 잡았다.
“아린아. 네게 할 말이 있어.”
진지한 성현이의 목소리에 왜인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카페라도 가서 얘기할까.”
“응, 좋아.”
성현이의 말대로 우린 가까운 카페로 이동해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자연스레 맞은편이 아닌 몸을 딱 달라붙으며 옆자리에 앉는 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커피를 안 마시는 성현이는 딸기 스무디를 한 입 먹고는 얘기를 꺼냈다.
“사실 오늘 칠격과 만났어.”
“…뭐? 혼자서?”
갑작스러운 성현이의 말에 놀라. 커진 눈으로 바라보자 성현이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말했어야지! 위험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며 벌로 옆구리를 꼬집으려 하자, 이제는 능숙하게 내 손을 막으며 성현이가 황급히 변명했다.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하지만 조민성과 관련된 일이라서 칠격과 만나도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
“민성이랑…?”
내 물음에 성현이는 몸을 움찔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에서 알사탕 모양의 푸른 보석을 꺼내든 성현이는 내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조민성이 죽기 전에 남긴 거야. 이왕이면 너랑 같이 확인하려고. 아직 확인은 안 했지만 칠격의 말로는 조민성의 유언 같은 거래. 마력을 넣으면 작동할 거라고 했어. 죽기 전에 나한테 꼭 전해달라는 말을 부탁을 해서 내게 준 거야.”
성현이의 말에 나는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자. 눈치를 챈 건지 성현이는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조민성이 너를 좋아하고 있었어.”
“…그래?”
“마지막으로 봤을 때. 너를 부탁한다고 하더라.”
그 말에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성현이가 손으로 닦아냈다.
“조민성의 부탁이 아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항상 사랑하고, 아껴줄게.”
“응…. 나도 항상 사랑하고 아껴줄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나는 성현이에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는 성현이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
“빙의 전에 내가 민성이를 좋아했었대. 소꿉친구였고…. 나 때문에 신재호에게 엄마를 잃고 그 일로 사이가 멀어졌어. 아니, 일부러 내가 상처받을까 봐 조민성이 내게서 멀어졌어.”
내가 민성이의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빈말이라도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많은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대단한 것이니까.
“날 위해 많은 걸 희생해서…. 그래서 많이 미안함을 느끼고 있어. 그리고 묻고 싶은 것도 있어. 그럼 왜 내 갈증을 유발한 건지. 왜 독을 주입한 건지….”
그 말에 성현이는 내게 푸른 보석을 내밀었다. 이곳에 내 의문을 풀어줄 정답이 적혀 있을까.
“여기에 그 답이 있을까?”
“확인해보면 알겠지.”
성현이의 대답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푸른 보석을 바라봤다. 과연 어떤 것이 들어있을까….
성현이의 손 위에 들려 있는 보석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어 의아한 얼굴로 성현이를 바라보자.
“풋.”
헛웃음을 흘리며 보석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여기서 확인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될 수도 있고.”
“아, 맞아.”
생각해보니 이런 카페에서 정체 모를 아티펙트 같은 것을 조작했다가는 사고라도 날 수 있으니 성현이의 행동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괜히 질투 나네. 아린이가 이리 성급하게 행동하게 만들다니.”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지….”
내 반응에 성현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장난이야. 나도 너처럼 널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을 싫어할 수 없으니까.”
성현이의 말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를 향한 진심을 알고 있으니까. 결국 또다시 입맞춤하다 알바생의 헛기침에 황급히 입술을 뗐다.
***
카페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조민성이 남긴 보석을 확인하기로 했다.
“시작할게.”
성현이가 곧장 손 위에 있는 푸른 보석에 마력을 집중하자. 푸른 빛을 뿜어내던 보석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보석이 터지자 성현이는 멍하게 그것을 내려다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성현이의 손 위에 남은 보석의 파편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 마력을 너무 집어 넣은 거 아니야?”
“그, 그런가…?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려는 찰나. 푸른 연기가 성현이의 손 위에 샘솟더니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조민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 조민성?”
“민성이…?”
앙증맞은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조민성의 모습에 울컥 눈물이 샘솟았다.
“나는 조민성의 마나로 만들어진 사념체야. 조민성이 남긴 유언을 전달할게. 김성현이 맞지?”
“맞아.”
성현이의 대답에 조민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어갔다.
“일단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르마게돈을 막았으니, 악신이 신아린의 몸에 강림하는 시간을 벌었어. 그 안에 이 소설의 주인공인 네가 소설의 끝을 내야 해.”
뜬금없는 말에 성현이와 나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조민성을 바라봤다. 악신과 소설의 끝이라니.
“이제 풀어서 설명할게. 잘 들어. 백진희와 나는 계약을 했어. 왜인지 모르지만, 백진희는 자신의 기억을 보여주었고 이 세계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내게 보여줬어. 그 대가로 나는 그것에 대한 언급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마나의 맹세를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뒤로 내게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어.”
아마도 내게 했던 것처럼 트페레밧의 봉으로 조민성에게 자신의 기억을 보여줬을 것이다. 설마 내게도 보여주지 않은 소설의 끝까지 보여준 걸까?
“나는 그 이후, 백진희가 보여준 기억을 토대로 하르마게돈을 막으면서도 내게 기억을 보여준 이유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어. 그래서 신아린의 심상을 확인하고 그동안 내가 조사해왔던 것들과 비교하였고 어느 정도 백진희 정체와 비밀에 대해 알게 되었어.”
그 말에 나와 성현이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조민성이 혼자서 백진희의 비밀을 파헤칠 줄 몰랐으니까.
“일단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어. 테니글로라는 벌레의 독을 내가 주입했다는 백진희의 말은 거짓이야. 나는 그날 신아린에게 그런 짓을 한적 없어.”
“하지만 그때 나는….”
나는 당시에 백진희와 서로의 손목에 진실의 끈을 묶고 있었다. 만약 조민성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실의 끈이 가짜라는 걸까?
“하지만 백진희와 신아린은 진실의 끈을 묶고 있는 상태였지. 그래서 신아린은 백진희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의심하지 않았어. 일단 당시에 나는 신아린을 보호하기 위해 요정왕의 팔찌를 주었어. 목숨이 위험해진다면 언제든지 내가 구할 수 있게 보험을 들어놓은 거야. 그것 덕에 백진희가 신아린을 강제로 각성시켰을 때 한 번은 막아낼 수 있었지.”
기어오르는 혼돈에 잠식당하기 직전에 푸른 섬광과 함께 나타난 갑자기 나타나 나를 도운 게…. 조민성의 보험 때문이었구나.
처음부터 조민성은 나를 도와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기억이…?
“진실의 끈과 트페레밧의 봉은 진품이야. 백진희가 플라틴의 창고에서 도둑질한 거 중에 하나고, 그 성능은 이미 신아린이 몇 번 확인했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진실의 끈을 묶고 백진희가 거짓말을 했냐는 건데. 여기서 나는 한가지 가설을 세웠어. 거짓말의 신이자 장난꾸러기인 헤르메스가 진실의 끈을 만들 때 무언가 진실을 말하며 상대를 속일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고.”
백진희가 처음 내게 진실의 끈을 보여주었을 때. 거짓말의 신인 헤르메스의 유물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거짓말의 신이 왜 진실의 끈 같은 것을 만들었을까.
“사실 진실의 끈은 정의된 ‘진실’을 감별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믿고 있는 진실을 감별하는 거야. 그게 진실의 끈에 담긴 장난이지.”
“아!”
그 말에 성현이는 무언가 이해한 듯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신앙을 믿는 사람이 ‘신은 존재합니다.’라고 말하면 진실인 것처럼. 신앙이 없는 사람이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도 그 사람은 그렇게 믿고 있으니 진실이 되는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백진희가 신아린을 속인 걸까? 나는 백진희의 기억을 보았을 때부터 계속 위화감이 들었어. 무언가 기억을 교묘하게 잘라내어 이어붙인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
기억을 잘라내어 이어붙였다고…? 빠르게 [이해]가 되었다. 그 방법이라면 진실의 끈을 속일 수 있었다.
“백진희는 스스로 기억을 편집하고 있는 거야. 기억을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원본을 저장하고 편집된 기억으로 상황에 맞춰 사용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 그래서 조작된 기억을 믿고 진실하게 행동했으니. 진실의 끈을 속일 수 있었던 거야.”
“신아린이 회귀한다고 착각하게끔 만든 것처럼, 스스로 편집된 기억을 심어놓으면 그걸 진실로 받아들여 행동하는 거지. 내가 이리 확신하는 이유는 신아린의 기억 속에서 배신당했다던 백진희가 보여주었던 김성현의 모습 때문이야.”
조민성의 말에 머릿속에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성현이에게 배신당해 사지가 절단당한 채 몽마의 환락가에 떨어졌었다.
그게 그럼…. 거짓이었던 걸까?
“백진희가 신아린에게 보여준 기억의 마지막. 스노 글로브를 작동할 때의 모습은 처음 기억 때의 김성현과 안에 있은 셔츠의 브랜드가 달랐어. 즉 그 기억은 온전한 게 아니라 편집된 기억이라는 거야.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지만 그게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야.”
나는 성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성현이가 만약 백진희를 여러 번 사지 절단 했다면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지켜본 너는 버러지긴 하지만 이유 없이 자기 여자한테 그런 짓을 할 놈은 아니야.”
“뭐 인마?”
가만히 듣고 있다 욕을 먹은 성현이가 장난스레 투덜댔다.
“그 말은 그 회차의 김성현은 공략한 백진희에게서 무언가 비밀을 알아낸 걸 꺼야. 백진희를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낸 거지.”
백진희를 죽이지 않고 사지 절단만 시킨 채 살려둔 이유. 도대체 그게 뭐일까.
“나는 그 회차의 김성현은 공략당한 백진희의 본심을 알아낸 게 아닌가 싶어. 그래서 백진희를 그렇게 만든 거야.”
“본심? 백진희의 본심이 뭐였을까.”
성현이의 말에 나도 이마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이해력]을 사용했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백진희가 정말로 내 행복을 위해서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나는 백진희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어.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그저 가능성으로만 생각했는데. 너와 대화를 통해 백진희가 네 상태창을 조작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어.”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나는 놀라 성현이를 바라봤다. 백진희가 성현이까지 세뇌하려 했던 걸까? 그보다 성현이의 상태창을 조작하는 게 가능한 건가?
“본래 영또플에 등장하지 않던 기아스라는 설정을 꺼내고 주인공의 상태창의 설정까지 바꿔버릴 수 있는 사람. 맞아, 백진희는 이 소설의….”
[이해력]이 발동된다. 금제 속의 신아린이 내게 필사적으로 알리려 했던 말. 숨겨진 설정을 꺼내고 세계의 설정을 바꾸는 회귀자이자 소설에 빙의한 빙의자.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오직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영또플의 작가.’
“작가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