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을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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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의 습격이 있고 난 뒤 일주일이 지났다. 사람들은 마인과 싸우다 죽은 신재호와 마족들을 다시 본래의 세계로 보낸 조민성을 ‘영웅’으로서 대대적인 장례를 치렀다.
신재호가 영웅으로 죽는 것은 원치 않은 일이었으나, 칠격에서 이미 조민성과 거래를 통해 부하로 다루던 마인을 막다 죽은 것으로 바꿔놔 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
차성에서 돌아가던 공장은 곧장 멈춰졌고 관련된 자료와 마석들은 칠격에게 넘겼다.
차성의 회장이 되었지만,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영에 대해 모르는 상태였기에 조언을 받아 전문 경영인이 회장직을 대리하기로 결정됐다.
어차피 신재호가 남긴 막대한 유산과 차성의 지분에 몇 대가 평생을 놀아도 될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어서 머리 아픈 회장직을 맡을 이유도 없었다.
차성과 마찬가지로 조민성은 죽기 전에 미리 일 처리를 해놓았는지. 전문 경영인이 곧장 혼란스러운 플라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재호의 장례식장에 예의상으로도 가지 않았다. 내가 성현이와 함께 간 장례식장은 마족들을 막다 죽은 영웅들의 합동 장례식장과 조민성의 장례식장이었다.
조민성이 자신을 희생해서 세상을 구했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믿기지 않은 일이라, 사실 장례식장에서 조민성의 사진을 봤을 때도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주 짓궂은 장난을 보는 듯한 묘한 기분에 입술만 짓씹다가 성현이와 집으로 돌아왔다.
눈물을 흘릴 사이는 아니었고,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지만. 그 묘한 기분에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고 성현이는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는 방학이 찾아왔다. 나는 기숙사에서 빠져나와 임유모와 차기사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성현이는 약속대로 자신의 하렘에 책임을 지기로 했다. 한서아에게는 그동안의 잘못에 대한 사과와 함께 진심을 섞은 대화를 통해 한서아의 가족에게 정식으로 남자친구로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서아는 내게 성현이가 시켰지만, 자신이 내게 했던 행동과 질투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과를 했다. 나는 그것을 미소와 함께 받아들였다.
레이나는 리치라서 그런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평소 말하던 것처럼 ‘오나홀’로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며 성현이와 주종관계를 유지했다.
대신 나와 함께 셋이서 한 번 잠자리를 갖자고 요구하는 걸 말리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토우코와 유지아는 처음 [공략 플래그의 달인] 능력을 들었을 때는 혼란스러워했지만 결국은 성현이의 곁에 머물기로 마음을 정했다.
애초에 공략도가 100%가 되면 성현이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전과 달리 진심으로 대하는 성현이에게 만족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골치 아픈 문제들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아직도 마음속 한구석에 남아있는 묘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이 감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됐고, 어떤 이름을 가진 건지.
내가 이 감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지.
임유모가 차려준 식사를 하며, 그런 고민에 빠져있을 때. 내게 정답을 알려준 건 다름 아닌 임유모였다.
“그러고 보니, 김비서가 본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던데 생각해 봤어요?”
“본가?”
“원래 살던 집이요. 이제 아무도 살지 않으니까. 아카데미에서 졸업하고 다시 그곳에 사는 것도 괜찮겠네요.”
지금 사는 곳은 아카데미에 통학하기 위해 살게 된 집이었으니, 확실히 내가 예전에 사용하던 방이 있을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묘한 직감이 내게 그곳에 정답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식사를 끝마치고 곧장 차기사와 함께 본가로 향했다. 신아린의 기억 속에 본가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었기에, 나는 능숙하게 내 방을 찾을 수 있었다.
주인이 떠난 방이라도 관리하시는 분이 계속 청소해놓으셨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방이었다.
직접 온 적은 없지만, 기억 속에는 남아있어 묘한 괴리감을 느끼며 침대에 걸터앉아. 감정을 정리하고 있을 때. 책상 서랍에 눈길이 갔다.
무언가 들어있으려나. 호기심에 서랍을 열려 했지만, 열쇠로 잠겨 있는지 열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 방의 서랍에 이런 서랍 열쇠 같은 게 들어있던 게 떠올라. 임유모에게 연락해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
차기사님이 고생한 덕에 얼마 못 가 임유모가 서랍 열쇠를 갖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나와 있었던 일을 추억하는지 둘러보는 임유모를 뒤로하고 나는 서랍을 열었다.
노트 몇 권과 신재호와 내가 찍힌 사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의 물건들을 보다, 오래된 종이봉투에 담긴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발견하고 의아해하고 있을 때.
임유모가 내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보고는 손뼉을 쳤다.
“어머! 그거 아직도 갖고 계시는구나.”
“이게 뭐야?”
“어렸을 적에 아가씨가 얼마나 편지 쓰는 걸 좋아했는데요. 매일 같이 아버님이랑 저랑 차기사, 그리고 친구한테 편지 썼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내가 편지를 썼나.”
너무 어렸을 적이라 기억이 없는 걸까. 임유모의 말을 듣고 떠올린 편지를 쓰는 작은 아린이의 모습이 상상인지 기억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종이 봉투 안에 담긴 편지지를 보다, 문득 드는 생각에 별 뜻 없이 임유모에게 물었다.
“근데 내가 친구가 있었어?”
“있었죠! 얼마나 친했는데요. 초등학교 내내 같이 붙어 다니다가 절교한 뒤로는 말도 꺼내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종종 파티에서 민성이 얼굴 봤잖아요? 같은 아카데미기도 했고.”
그 말에 편지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나는 혀끝이 뭉텅해지는 이상한 기분과 알 수 없이 크게 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임유모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민성이라면…. 조민성 말하는 거야?”
내 물음에 다른 조민성도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임유모의 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꽉 막혀 답답하게 느껴졌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종이봉투를 다시 서랍에 넣고, 노트를 확인하자. 어렸을 적에 쓴 일기장이었다.
어렸을 적 신아린이 쓴 듯한 일기장을 보며, 기억에 남지 않은 일들을 떠올리다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일기장의 내용이 마치 누군가 억지로 수정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애들에게 놀림 받고 있을 때.아빠이가동화 속 왕자님처럼 다른 애들을 혼내주고 울고 있는 나를 달래줬다. 역시 내가족는 아빠이밖에 없어. 꼭 나중에 결혼할 거야. 그렇지만 결혼하자고 하면 자꾸 도망친다고 한다. 나쁜 놈. 그래서 도망치면 어디에 숨든 찾아낼 거라니까. 한숨만 쉬었다.아빠이는정말 내가 싫은 걸까? 그러면 안 되는 데][너무 슬퍼서 과자도 안 먹었다.아빠이는잘 지내고 있는 걸까? 얼른 보고 싶다. 정말로 내가 싫어져서 숨은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약속대로아빠이를찾아내야겠어!][우연히 통화를 들었다. 숨은 게 아니라아빠에게 놀이공원거다.아빠이가내게 준 놀이공원 초대장이 방에 있었다.칭찬해야다. 재밌다. 재밌다. 재밌다.]
갈수록 이상해지는 일기장에 나는 임유모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고 말해. 방에서 내보내고 마인화를 하여 일기장을 바라봤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일기장의 표지에는 무언가 파훼할 수 있는 술식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술식을 파훼하고 마인화를 해제한 뒤, 일기장을 확인하다 손에서 일기장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애들에게 놀림 받고 있을 때. 민성이가 동화 속 왕자님처럼 다른 애들을 혼내주고 울고 있는 나를 달래줬다. 역시 내 파트너는 민성이밖에 없어. 꼭 나중에 결혼할 거야. 그렇지만 결혼하자고 하면 자꾸 도망친다고 한다. 나쁜 놈. 그래서 도망치면 어디에 숨든 찾아낼 거라니까. 한숨만 쉬었다. 민성이는 정말 내가 싫은 걸까? 그러면 안 되는 데]
[너무 슬퍼서 과자도 안 먹었다. 민성이는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얼른 보고 싶다. 정말로 내가 싫어져서 숨은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약속대로 민성이를 찾아내야겠어!][우연히 통화를 들었다. 숨은 게 아니라 아빠에게 납치당한 거다. 민성이가 내게 준 생일 초대장이 아빠 방에 있었다. 너무 무서웠다. 아빠가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술식이 파훼 되고 이상했던 문장들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내 일기장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 잊고 지냈던 어느 기억이 떠올랐다.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내게 따스한 목소리로“괜찮아.”라고 말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던 기억.
위로 받아야 할 건 내가 아닌 너인데. 상처받은 건 너인데. 언제나처럼 너는 착하게 나를 생각했고, 배려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무언가에 짓눌린 듯 가슴이 무겁게 느껴졌다. 바닥에 떨어진 일기장을 집어 들자. 비어있던 페이지가 내 일기로 꽉 차 있었다.
[민성이가 돌아왔다. 나는 예전처럼 민성이를 볼 수 없었다. 내게 쿠키를 주던 민성이 어머니가 나 때문에 죽었다. 너무 슬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민성이를 피했다.][사실을 고백했다. 내가 울자 민성이는 평소처럼 나를 위로해줬다. 나는 그게 너무나 미안해서 더 울었다. 못생겨 보일까 봐 겁이 났다. 그렇지만 많이 미안해서 어쩔 수 없었다.]
일기장 위로 방울진 눈물이 뚝 뚝 떨어져, 종이가 젖었다. 그제야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아주 오래된 흉터가 다시 터져 피를 흘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기장에 적힌 글을 보자. 내 무의식 속에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파트너야! 내 우유 먹어줘!”
잘생기고 착한 내 짝궁은 내가 싫어하는 버섯이랑 피망 같은 것도 대신 먹어줬다.
그래서 맛없는 흰 우유도 은근슬쩍 옆자리에 앉은 민성이의 책상으로 넘겼다.
“그런 게 어딨어. 니껀 니가 먹어!”“결혼할 사이잖아!”“뭐, 뭐래. 너랑 왜 내가 결혼해!”
민성이의 말에 충격을 받아 눈물이 글썽거렸다.
“나, 나랑 결혼…. 안 할 거야?”“안 해!”“흐아아앙!”
그렇게 울고 있다 보면, 내 팔을 흔들며 울지 말라고 민성이가 속삭였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 된 얼굴을 들면 민성이가 얼굴을 닦아줬다.
“넌 울면 못생겼어.”“흐아아아앙!”“그, 그러니까 웃으라고! 웃는 게 예쁘니까.”
그 말에 나는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뻐 보이려고 애써 웃었다.
“난 꼭 너랑 결혼 할 거야!!!”
괜히 성내서 소리치면 주변 애들의 시선에 민성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너랑 있으면 항상 나만 손해 봐!”“그래서 싫어?!”“그냥 그렇다고….”
그러면 투덜거리면서 내 우유를 먹어주는 착한 민성이였다.
“이 선 넘으면 다 내꺼야! 넘어오지 마!”“넘어왔으니까 난 네 거야! 결혼해야 해!”“싫다고! 그냥 넘어오지 말라고!”
왜 기억을 잊은 걸까. 내게는 이토록 소중한 감정이었는 데.
“괜찮아.”“흐윽, 흑…. 미안해 민성아 나 때문에…. 흐아아아앙!”“네가 잘못한 일 아니야. 울지마.”“아빠가…아빠가…흐윽, 흑….”
그렇게 울고 있는 나를 민성이는 여느 때처럼 눈물과 콧물을 닦아주며,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내 볼을 꼬집듯 쭉 당겼다.
“울면 못생겼어. 웃는 게 예뻐.”
그 말에 나는 울었을까. 웃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뒤로 조민성에 관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민성아.”
기억 속에서 내가 조민성을 부르던 것처럼. 그렇게 입 밖으로 그 이름을 내뱉자. 어떠한 감정이 내 가슴 속에서 치솟았다.
그리움, 애정, 미안함. 그런 다양한 감정이 한데 섞여 혼란스러웠다.
“민성아….”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고, 콧물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볼 수 없기에, 더욱 슬펐고 가슴 아팠다.
문득 언젠가 내게 민성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플라틴과 차성. 이 둘이 거래할 때는 항상 한쪽이 손해를 봐야 하는 거 알지?”
거짓말쟁이.
언제나 우리 사이에 손해 보는 건.
항상 너였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