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40화 (140/160)

〈 140화 〉 놓지 않아

* * *

온몸이 찢겨나갔다. 고통에 깨문 입술이 터져나갔다. 등을 뚫고 앞으로 빠져나온 촉수가 아린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최대한 아린이가 다치지 않게 몸으로 막아봤지만, 몸을 뚫고 나오는 촉수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아린이가 의식을 잃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이대로면 영영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게 될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내 다리를 멈추지 않게 했다.

도망치는 나를 붙잡으려 한쪽 팔을 휘감은 촉수에 억지로 몸을 달려 나가자. 우드득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팔이 찢겨나갔다.

한 손으로 아린이를 어깨에 매단 채. 부러지고 녹아버린 다리를 쉼 없이 움직였다. 걸음을 뗄 때마다 극렬한 격통이 온 신경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조차 아린이를 미궁에 빠트린 내가 온전히 받아야 할 체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설령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반드시 아린이는 살려내겠다는 집착과 같은 생각이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드디어, 출구가 보였다. 촉수가 뻗어져 내 양다리를 붙잡았다. 허벅지를 휘감은 촉수가 뼈와 근육을 으스러트렸다.

앞으로 넘어지면서도 아린이를 다치지 않게 하려 팔을 높이 드느라. 얼굴부터 바닥에 닿아 코가 부러져 얼얼한 통증과 함께 양쪽 코에서 쉼 없이 코피가 흘러나와 호흡이 힘들어졌다.

“끄에에에에엑!”

기어 오던 그것은 사냥의 성공했음을 자축이라도 하듯. 기쁨의 괴성을 질러댔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억지로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품속에 안겨있는 아린이는 몸 대부분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대로면 아린이를 잃게 될까. 너무나도 두려웠다.

“반드시…! 반드시…!”

무너져가는 의지를 붙잡으려 의미 없는 말을 내뱉으며. 머릿속으로 아린이를 살리겠다는 생각만 했다.

온몸을 휘감는 촉수에 몸이 살덩어리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촉수를 만들어낸 그것을 감당할 순 없었다.

“제발, 제발…!”

간절하게 빌었다. 아린이를 구할 힘을 달라고.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 의지를 받아들인 몸이 마지막으로 몸속에 남은 모든 힘을 쏟아냈다.

우드드드득

온몸을 휘감으며 끌어당기던 촉수들이 터져나가며,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급속도로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달릴 때마다 힘이 절반씩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탈력감에 비틀거리면서도 겨우겨우 출구에 도달했다.

내가 다가서자. 거대한 미궁의 출구 문이 활짝 열렸다. 더는 발걸음을 옮길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서 있을 힘까지 모두 짜내 아린이를 출구를 향해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을 휘감는 촉수들이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살덩어리에 내 몸을 파묻었다.

피부들이 살덩어리에 엉겨 붙고, 온몸이 뼈가 으스러졌다. 목 밑으로 아무런 감각이 들지 않았다.

몽롱해진 정신으로 머릿속에는 온갖 감정들이 [혼돈]에 잠식되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나는 웃었다. 내 추한 사랑의 결말이 아린이를 위한 것이었다는 게. 너무나도 만족스러워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의식이 심연으로 빨려 들어간다. [혼돈]이 본래의 나인 것처럼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끝인­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겼다. 내게 엉겨 붙은 살덩어리들이 나를 놓치지 않으려, 온몸을 조여왔지만. 무언가가 억지로 나를 그것들과 찢어놓기 시작했다.

심연의 바닥에 추락한 내 의식이. 낚시꾼의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억지로 꺼내고 있었다.

살덩어리들을 찢어내며, 빠져나온 내 눈에 아주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실이 보였다.

그 붉은 실의 끝에서. 출구의 안에서 온몸이 검게 물든 아린이가 자기 손가락에 묶인 붉은 실을 붙잡고 끌어 당기는 것이 보였다.

“놓지 않아.”

***

눈이 떠졌다. 깊은 악몽에서 벗어난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고, 심장의 고동이 요란스러웠다.

머릿속을 꽉 채우던 혼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행히도 미궁 속에서 있었던 기억과 감정은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았다.

두 눈을 끔벅거리며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 무언가 내 몸 위로 퍽­ 하고 날아와 몸을 체중으로 꾹 눌렀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감각이라.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향기로운 체취, 따스한 온기. 오직 한 여자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설렘까지.

가슴을 퍽퍽­ 내려치는 손길에 감성에서 빠져나와 몸을 일으켰다.

흑요석의 눈에서 방울져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낮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잤어?”

대답 없이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떨어대는 아린이의 등을 토닥여줬다. 어느새 나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멋쩍은 해후가 끝나고 난 뒤. 아린이와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며 사랑을 속삭이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통에 황급히 아무것도 안 한 척 몸을 떼어냈다.

쿡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와 괜스레 민망해져 뒷머리를 긁어댔다.

“일어나셨네요?”

“아, 최선아 영웅님.”

“그, 그러고 보니 여기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 이곳이 플라틴의 회장실인 것을 깨달은 아린이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조민성을 극도로 혐오하는 내가 자신과 이곳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일단, 식사부터 하시고 마사지 들어갈게요. 3일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아서 배고프실 거예요.”

“3일이요?”

“네. 그동안 틈틈이 두 분의 몸에 에너지를 주입하긴 했지만, 직접 섭취하는 것만큼 효율은 없거든요.”

3일이나 지났다니. 그러면 벌써 토요일인 걸까.

최선아 영웅이 우리가 먹을 것을 가져오는 동안. 나는 간략하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아린이에게 설명하고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미안해 아린아. 그동안 너에게 상처를 줬어. 내가 정말로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게 없다.”

내 말에 아린이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입술을 깨물고 한참을 나를 바라보더니 생각이 끝났는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네가 사랑하는 사이에 용서 못 할 건 없다 했잖아. 의식을 잃은 나를 안고 미궁을 벗어나려 했을 때. 왜인지 모르게 느껴졌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를 구하려 했던 것도….”

코를 훌쩍대며, 아린이는 내 곁으로 다가와 손을 붙잡고 울먹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실수니까. 그것마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니까. 나도 받아들일 수 있어. 널 사랑하니까.”

그 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머릿속에서 [이해력]이 발동되었다. 아린이의 말에서 느껴지는 모순을 느낀 것 같았다.

나는 저런 부끄러운 진심을 아린이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괜히 아린이를 바라보면 진심을 표현하는 게 부끄러웠으니까.

내가 저런 부끄러운 진심을 말한 건 오직 한 명. 아린이를 똑 닮은 아연이라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밖에 없었다.

순수한 어린아이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순수한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게 되는 게 어른이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백진희는 나에게 아연이를 친척이라고 말했는데….

혹시 아연이는…? 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린이에게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물었다.

“나는 너한테 그런 말 한적 없는데?”

그 말에 전기라도 감전된 듯, 몸을 크게 움찔하더니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휙 하고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그 요란한 반응에 나는 아연이가 아린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어렸을 때로 돌아간 건진 모르지만, 숨길 수 없는 외모와 어린아이에게 맞지 않는 고급스러운 분위기.

아주 예쁜 흑요석의 눈동자가. 아연이와 아린이가 같은 사람이 아닌지 의심하기에는 충분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처음 아연이를 봤을 때 아린이의 동생이 아닌가 고민까지 했으니까.

“내가 구한 건 아린이가 아니라…. 아연이었나?”

넌지시 툭­ 하고 던진 말에 또다시 온몸을 찌르르 떨고 있는 아린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아무렇지 않게, 아린이를 당겨서 꽉 끌어안았다.

“그, 그…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고…. 여기엔 사정이….”

품속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허둥지둥 설명하려 드는 아린이가 참지 못할 정도로 귀여워, 부드럽게 이마에 입술을 입맞춤했다.

“믿어, 아린아.”

진심 어린 내 목소리에 아린이는 설명을 멈추고는 입술을 꾹 닫고. 내 가슴에 귀를 갖다 대고는 조금 툭 튀어나온 입술을 삐죽거렸다.

눈물을 흘리면 윗입술의 경계가 붉어지는 아린이의 특징 때문에 조금 툭 튀어나온 입술마저도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대 입술을 꼬집자. 옆구리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얏! 진짜 아퍼!”

“앞으로 미안한 만큼 내게 잘해…!”

나를 용서해주는 아린이의 말에 뭉글뭉글 차오르는 이름을 붙이기 힘든. 사랑이 깃든 감정을 느끼며 대답했다.

“응, 정말 정말 잘해줄게.”

“…그래도 내가 더 잘해줄 거야.”

애정에서 지지 않겠다는 듯이. 물기에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짐하는 듯한 말을 하는 아린이의 모습에 또다시 입맞춤할 수밖에 없었다.

***

식사하고, 몸에 남아 있던 피로함까지 모조리 없애버린 황홀한 마사지까지 받은 뒤.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밤이었다.

조민성에게 신세를 너무 진 것 같아. 성현이에게 ‘이제 그만 기숙사로 돌아갈까?’라고 물어보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대신해 최선아에게 말을 해줬다.

“저희 이제 돌아가 볼게요. 너무 오랫동안 폐를 끼쳤죠?”

“아, 그…. 오늘까지는 이곳에 있으세요.”

성현이의 말에 조금 당황한 듯이 말하는 최선아의 반응에 무언가 기분이 찜찜해졌다.

“그, 몸이 완전히 좋아졌는지 확인도 해봐야 하고. 밤도 이제 늦었으니까. 하루 정도만 더 있다가 가는 게….”

“음, 어떻게 할까?”

호의를 거절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가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으니, 성현이는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저희가 이곳에 있는 게 좋을까요?”

나는 결정을 최선아에게 미뤘다. 왜인지 최선아는 우리를 이곳에 붙잡아두려는 것 같아서 그 의문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럼요! 치료 영웅인 제가 바로 옆방에 있을 거고, 현역 길드에서 나온 영웅분들도 여러분들의 안전을 지키고 있으니까….”

“왜요?”

내 물음에 최선아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왜 우리의 안전을 지켜요? 여긴 플라틴 본사라 위험할 것도 없잖아요.”

“그, 그건 말이죠…. 으음….”

그제야 최선아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성현이도 눈치챘는지. 나와 함께 추궁하는 눈빛을 보냈다.

결국 우리의 눈빛에 최선아는 한숨을 내쉬며 숨겨놨던 것을 털어놨다.

“사실은…. 회장님이 여러분들이 만약 오늘 깨어난다면 내일까지 붙잡고 있으라고 했거든요.”

조민성이 왜 우리를 붙잡아두려는 걸까. 감사의 인사라도 받겠다는 걸까? 원한다면 메일이라도 큰절을 올리며 고맙다고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는 데….

문득 드는 생각에 나는 성현이를 보며 물었다.

“성현아, 오늘 무슨 요일이야?”

“응? 오늘 토요일이야.”

“토요일….”

그제야 머릿속에서 조민성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음 주 토요일에 차성에서 파티가 열려. 네 아빠가 주관하는 파티. 참석하지 말고 김성현 옆에 붙어 있어. 그게 이번 거래다."

조민성과 거래를 하러 이곳에 왔을 때. 내게 건네주었던 말.

파티가 열리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그렇다면 조민성이 이곳에 우리를 붙잡아두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무언가 계획을 꾸며놨고, 거기에 우리가 휩쓸리지 않길 바라는 것이겠지.

“…알았어요. 그럼 오늘까지는 여기 있을게요.”

“네, 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옆 방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여기에 남겠다는 말에 무척이나 고마운 듯한 표정으로 밝게 대답하며 최선아는 밖으로 나갔다.

최선아가 나가자. 나는 성현이에게 조민성과 있었던 일과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이유를 얘기해줬다.

내가 이곳에 남아 있겠다고 말하자 의아스러워하던 성현이도 설명을 듣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을 쓰다듬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민성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조민성에 대한 신뢰가 묻어나는 혼잣말에 놀란 눈으로 성현이를 바라보자. 내 시선을 느낀 성현이가 어깨를 움찔하더니, 변명처럼 대답했다.

“아니, 뭐. 꼭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더라고. 특히, 너한테는….”

“흐으으응, 질투하는 거 아니지?”

장난스레 흘겨보며 말하자. 성현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질투 나니까. 뽀뽀 100번이야.”

그 말과 함께 뽀뽀하러 다가오는 성현이에게 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