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불행의 끝에는 행복이라는 보상이 필요하다
* * *
아린이를 구하기 전. 내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겠다는 조민성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최선아라는 이름의 치유 영웅이 나를 소파에 눕히고 대뜸 마사지를 한다 했을 때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손에서 나오는 노란빛에 거짓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믿고 몸을 맡겼다.
온몸을 손으로 꾹꾹 눌러줄 때마다 피로가 가시는 듯한 느낌은. 어째서 영웅이 운영하는 마사지숍이 요즘 들어 유행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푹 자고 일어난 듯한 개운함을 느끼며 소파에서 일어나자. 태블릿을 만지던 조민성이 내게 다가왔다.
“준비는 됐어?”
“최고야. 고마워요. 최선아 영웅님.”
뒷정리하는 최선아 영웅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고개를 숙이고 미소로 대답해주셨다.
만약 최선아 영웅을 공략한다면 어떤 능력을 얻게 될까. 치료 능력일까 마사지 능력일까. 성적인 욕구보다는 순수하게 재능이 많은 사람한테는 어떤 재능을 복사할지가 궁금했다.
옻칠 된 상자에서 붉은 실을 꺼낸 조민성은 내 왼손의 새끼손가락과 아린이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을 단단히 묶어주었다.
“이러니까 꼭 기아스 같네.”
아린이와 붉은 실로 묶였을 때가 생각이나 미소를 짓자. 조민성이 내 눈앞에 손가락을 튕겼다.
“잘 들어. 신아린의 심상 속의 미궁이 어떤지는 나도 몰라. 온전히 네 힘만으로 아린이를 찾아서 돌아와야 해.”
“고맙다. 아린이에게 사과할 기회를 만들어줘서.”
내 말에 조민성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눈을 감아라.”
조민성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내 머리 위에 턱 하고 조민성의 손이 올라왔다.
무언가 정수리에서 시원한 기분이 느껴졌다. 얼음을 갖다 댄 듯한 느낌. 그것이 나쁘지는 않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참 뒤, 내 귓가에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민성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목소리.
“아린이를 부탁한다. 김성현.”
그 목소리에 담긴 진심에 나는 부정했던 가능성을 떠올리며 눈을 뜨려 했지만, 내 의식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눈을 뜨자. 내 시야에 보인 건 벽이었다. 고개를 들어도 끝이 안 보이는 커다란 벽들이 있는 미궁. 고개를 돌려봐도 특색 없는 벽들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몸을 돌리자. 유일하게 빛이 조금 새어 나오는 보석이 박힌 문이 있었다. 이곳이 아마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곳이겠지.
고개를 내려 내 몸을 확인하니. 어느새 내 복장은 모험가의 복장으로 변해 있었다. 가슴 주머니에 꽂혀 있는 랜턴을 킨 뒤. 조민성의 조언에 따라 오른팔을 벽에 닿게 했다.
아무리 복잡한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미궁은 결국 하나의 면이기 때문에 중복 없이 미로의 전 구간을 훑을 수 있는 우수법(?手?)이라는 방법을 이용하면 언젠가는 미로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했다.
오른손으로 벽을 짚고 나는 무작정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체감상 2일은 지난 것 같다. 짬짬이 벽에 기대 휴식을 취하며 계속해서 걷자. 내 새끼손가락에 달린 붉은 실이 내가 걸어온 길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미궁의 크기 때문에 중간에 붉은 실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다란 선에서 계속해서 실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아. 중간에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우수법을 유지한 채 길을 걷자. 누군가가 길을 막고 있었다.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주변의 공간이 변했다. 언젠가 아린이와 함께 했던 곳. 그 변화에 놀랄 틈도 없이 몸을 돌린 그것과 시선을 마주했다.
“신아린…?”
내 목소리를 들은 아린이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 금방이라도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 모습에 마음이 아파져 왔다.
사과하고 싶었다. 너를 이렇게 만든 나를 용서하지 말라고. 나 때문에 이제는 힘들어하지 말라고.
“사귀면 진짜로 잘해줄게.”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아린이를 설득하려 내뱉었던 말.
그제야 나는 바뀐 곳이 아린이와 키스했던 놀이터의 벤치임을 깨달았다.
아린이를 설득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뱉어졌다.
"진짜야. 소니아랑 말도 안 할게.""난 진짜 네가 첫사랑이야 아린아."
내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아린이는 점점 숨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나는 아린이가 그때 느꼈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내 말에 기뻐서라기보다. 자괴감과 후회에 억눌려 혼란스러워 하는 게 느껴졌다.
고민 끝에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는 내 기억과는 다르게. 자괴감과 후회에 짓눌려 마음이 무너져.
계속되는 집요한 설득에 정신을 못 차리고 혼란스러워하다. 결국 거절을 포기하고 내게 말했다.
“그래, 사귀자….”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이 움직여 아린이와 입을 맞췄다.
내가 기억하던 첫 키스와는 너무나도 다른 기분. 영화처럼 머리에서 폭죽이 터지던 자신과 다르게 아린이는 우울했고 무너지고 있었다.
아린이는 마음속으로 내게 묻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자신은 무너지고 있는데.
입맞춤이 끝나자. 아린이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자신의 할 일이 끝난 인형처럼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는 아린이의 모습에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다시 통제를 찾은 내 몸은 조금 전 느꼈던 아린이의 감정을 떠올리고 온몸을 잘게 떨어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아린이를 바라봤다. 생기를 잃은 흑요석의 눈동자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내가 비춰 보였다.
“미안해 아린아. 내 욕심으로 너를 상처 줘서. 너를 갖고 싶어서 혼란스럽고, 힘들어하는 거 알면서도 억지로 너에게 사귀자고 강요한 거. 정말로 미안해 아린아.”
죄책감이 심장을 옥죄어왔다. 하염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속마음 깊숙한 곳에 외면해왔던 해묵은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입술을 깨물었다. 내겐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감은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아린아. 너에게 이런 기억을 남게 해서.”
아린이의 손을 붙잡았다. 체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음장 같은 손이었다. 그 손위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나 용서 안 해도 되니까. 제발. 돌아와 줘 아린아.”
붙잡았던 손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는 미궁의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일어섰다.
죄책감에 힘이 빠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아린이를 찾아야 했으니까.
***
미궁 속에서 나는 수많은 아린이를 만났다. 아린이를 만날수록 나는 죄책감에 짓눌려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바닥에 박고 사죄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의심에 상처받고, 내 억지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허락하던 아린이가 느꼈던 감정을 내가 느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쓰레기였고 상처를 주었는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구토하고, 이마가 찢어질 정도로 바닥에 이마를 박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었다. 아니,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었다. 이토록 나는 아린이를 상처 주고 괴롭혔는데. 온전한 사랑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의지가 꺾였다. 내가 또 아린이에게 어떤 상처를 줬을까. 어떤 절망감을 느끼게 했을까 하는 두려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외면했던 것들을 직시할 때마다. 심장이 찢겨 나가는 것 같다.
차라리 심장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오열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죄책감에 질식하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던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두려움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손으로 바지를 붙잡아. 다리를 끌어당겨 앞으로 옮겼다.
자신이 한 짓이 두렵다고 아린이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내가 아닌 아린이를 위해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렇게 뇌까리며. 한참을 걷자. 짙은 미궁의 어둠과 어울리지 않는 은은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빠르게 해. 꽃향기가 나는 곳으로 걸어가자.
시들어가는 히아신스의 옆에 앉아.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을 달고 있는 아린이가 있었다.
“아, 아린아….”
쉬어버린 목을 쥐어짜내며 그렇게 부르자. 히아신스를 바라보고 있던 아린이가 고개를 들어 흑요석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놀람과 낯선이에 대한 약간의 경계가 깔려 있었다.
내가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딛자. 몸을 움찔하면서 아린이가 경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야?”
“나, 나야 성현이….”
낯선 이를 보는 듯이 말하는 아린이의 모습에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아린이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지 모르겠어.”
정말로 나에 대해 기억나는 게 없는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모습에 나는 왜인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린이에게 더 좋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기억 못 해도 돼. 가자, 여기서 빠져나가게.”
아린이에게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바라보던 아린이가 내 손을 툭하고 쳐냈다.
“싫어.”
“왜, 왜…?”
“몰라. 그냥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보라색의 히아신스를 내려다보는 아린이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졌다.
“여기에 있으면 위험해. 제발 나랑 같이 가자.”
조급함에 억지로 아린이의 팔을 잡아끌자. 팔을 이리저리 뒤흔들어 빼고서는 화를 냈다.
“싫어! 여기에 있을 거야.”
고집을 부리는 아린이의 모습에 나는 아린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듯 손을 내밀었다.
“제발, 아린아.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
그런데도 아린이는 입술을 다문 채 히아신스만 바라볼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나는 그 옆에 앉아 히아신스를 보고 있던 아린이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꽃이 어떤 건지는 기억나?”
“아니.”
“히아신스라는 꽃이야. 보라색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
내 말에 아린이는 작게 다시 중얼거렸다.
“영원한 사랑….”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린이는 갑자기 시들어가던 히아신스를 꺾어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스러워하고 있을 때. 흑요석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음을 깨닫고 시선을 마주했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는 내가 두려워하던 원망이나. 미움이라는 감정은 없었다.
“기억은 안 나는데 말이야.”
보라색 히아신스를 손에 쥔 채 이리저리 흔들어대던 아린이는 아주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내게 히아신스를 내밀었다.
“왜인지 너에게 주고 싶었던 것 같아.”
무언가가 내 심장을 가격한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솟구친 감정에 뿌옇게 변해버린 시야로. 내게 내민 히아신스를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받아들었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하는 데. 나는 멍청하게도 히아신스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깨문 입술 사이로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격류 하는 감정 탓에 울음은 신음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왜 울어?”
당황한 아린이의 말에 나는 빈손으로 눈을 가리고 울었다.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부담스러웠어?”
“아, 아니, 절대 아니야.”
물기 어린 목소리로 울음을 참아내며 가까스로 대답하자. 눈을 굴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린이가 얼굴을 가까이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꽃이 한 송이라…?”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아린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멍청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