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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37화 (137/160)

〈 137화 〉 연극

* * *

회장실로 돌아온 조민성의 눈에 보이는 건 눈물을 흘리며, 신아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김성현의 모습이었다.

‘정신이 돌아왔군.’

일부러 구두를 또각거리며 다가가자. 눈물을 닦아낸 김성현이 뒤를 돌아봤다.

“크흠. 조민성.”

“앉지. 물어볼 게 있으니까.”

충혈되어 분홍색으로 변한 눈으로 슬쩍 나를 보던 김성현은 멋쩍은 얼굴로 코를 훌쩍이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일단 아린이를 구할 방법은 구했다.”

그 말에 울적하던 김성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너무나도 기뻐하는 모습에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따가웠다.

“정말? 그럼 지금 당장….”

“아니,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어떤 거?”

“네 상태창.”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김성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상태창에 대해 어떻게 알았어? 아린이가 나에 대해 얘기한 거야?”

그 물음에 전과 같은 질투나 소유욕은 없었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아니, 신아린의 기억을 봤으니까. 일단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말하지. 네가 의심하던, 호텔에 단둘이 있던 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여자 영웅까지 함께 있었으니 단둘도 아니었고.”

“응…. 이제는 믿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김성현의 시선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그날 백진희는 강제로 신아린에게 마석을 흡수시켰다. 그것때문에 신아린의 마인화는 더욱 강해졌지. 혼돈의 가면을 뒤집어쓴 신아린은 S급의 마인이라고 쳐도 무방해.”

그 말에 침을 꿀꺽 삼킨 김성현이 고개를 돌려 멍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신아린을 바라봤다.

“상태창이 보이지 않는 건. 백진희의 술수거나 신아린이 너무 강해져서일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뭐를?”

“신아린이 강해져서 상태창을 못 본다는 거.”

그 물음에 조민성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르다. 멍청하게 흥분하여 제 힘만 믿고 까불대던 버러지와. 이성적으로 머리를 사용하는 김성현은 조금이지만 신뢰가 갔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친근한 말투로 변했다는 것을 조민성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거 알아? 신아린이 호텔의 전날에도 날 찾아온 거.”

“너를?”

“도와달라고 하더라. 내가 자신에게 위험하다는 거 알면서도. 이대로면 네가 위험해질까 봐. 단지 너와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베팅하러 온 거야. ”

순식간에 죄책감으로 물든 김성현의 얼굴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 조민성은 입술을 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날. 신아린의 허락하에 심상을 확인했어. 기억, 감정들을 확인해 앞으로 있을 일들을 대비하려 했지.”

“알아낸 건 있어?”

“영또플에 관한 것들.”

김성현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잠시 회장실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래서 상태창에대해 알고 있는 거구나…. 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곳이 사실은 소설 속이라는 게.”

김성현의 표정에서 아주 작은 감정의 편린을 보았다.

누구라도 진실을 알았을 때는 고민했을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만들어진 존재이고,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가게 된다면.

신아린에게는 털어놓지 못했겠지. 걱정할까 봐. 미안해할까 봐. 혼자 마음속에서 수십 수천 번은 고민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마저. 소설에 나온 문장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악몽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마법사에게는 관점이라는 게 있어.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질, 운명, 행위 같은 것들이 바뀌는 거지. 네가 이 세계를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관점대로 소설이 될뿐이야. 사실대로 넌 주인공이고 정말 정해진것처럼 각성한 뒤. 여자들을 공략하고 다녔으니까.”

“운명은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침울한 김성현의 목소리에 괜스레 짜증이 나. 조금 서늘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너는 소니아에게 동정을 뗄 운명이었지만, 신아린의 방해로 그 운명에서 벗어났잖아. 3학년이 되도록 친해지지 않을 신아린과 사귀기도 했고. 그것만으로도 운명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운명은 정해진 결과일까? 몰라. [큰 흐름]이라는 것은 틀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신아린과 네가 섹스를 한 이후. 영또플에서 흘러가야 할 2년이 줄어든 건 알고 있어?”

“대충은 들었어.”

“그래서 떠올렸어.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중요한 분기점을 해결한다면. 운명은 과정은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아린의 심상을 확인한 후. 자신은 계획을 세웠다. 일어날 하르마게돈을 막고. 소설의 엔딩을 앞당길 계획.

“난 네가 세상을 구할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계획을 세웠어.”

김성현은 조금은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네가 주인공 하는 게 더 나았겠다.”

“아니, 나는 미친놈이라 그건 불가능할걸.”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조민성은 손을 저은 뒤. 화제를 돌렸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상태창 확인 가능해?”

“신아린 상태창…. 역시 안돼.”

“다른 여자들의 상태창은?”

“토우코 상태창…. 다른 상태창은 이상 없어.”

그 대답에 조민성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신아린이 네 상태창에 한 가지 의문을 갖고 있던 게 있었어.”

“아린이가?”

“그래. 깊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언뜻 의문을 갖고 있더라. 상태창으로 자기 생각을 읽는 게 아닌지.”

김성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단지 상태창에서 나오는 현재 욕구를 통해서 추론­”

“잠깐, 뭐라고 했어? 현재 욕구라고?”

김성현의 말을 잘라내며 조민성은 황급히 물었다. 이것이 정답일 거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어, 응. 상태창에 현재 욕구라고 대상의 욕구를 알려주는 슬롯이 있는데….”

“그거야. 신아린이 의문을 품었으면서도 너에게 묻지 않은 이유. 영또플에는 욕구를 알려주는 슬롯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뭐…?”

김성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조민성의 말이 맞는다면. 지금 자신의 상태창에 떠 있는 이 슬롯은 무엇일까.

“상태창을 읊어봐. 신아린의 기억 속에 있는 영또플의 본래 상태창과 비교해야 해.”

조민성의 말에 김성현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는 천천히 상태창을 읊었다.

*

“기존과 달라진 건 욕구 하나밖에 없는 건가.”

“그냥 추가된 게 아닐까?”

김성현의 말에 조민성은 픽,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마법에는 그냥이란 없어. 분명 백진희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지만 상태창이잖아.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그건…. 아마도 백진희가 ■■■기 때문이지.”

조민성이 무어라 단어를 뱉었을 때. 강한 스파크가 튀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명 입을 열어 단어를 뱉었음에도 김성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방금 말 안 들렸어. 뭐라 말한 거야? 다시 말해봐.”

“계약 때문인가…. 나중에 알게 될 거다.”

김성현은 직감적으로 조민성이 백진희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조민성이 언급한 계약과 관련된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지금 조민성과 대화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각자 생각을 정리하느라. 회장실이 침묵에 빠져있을 때.

조민성이 테이블 위에 옻칠 된 상자를 올려놨다.

“이건…?”

“신아린을 구할 방법.”

그 말에 김성현이 황급히 손을 뻗으려 하자. 조민성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일단 설명부터.”

“…그래, 미안.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서.”

자책하는 김성현의 모습에 조민성은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미궁의 어둠 속에 빠트린 김성현만이 다시 신아린을 그 어둠 속에서 빼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못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붉은 실]을 보여주자. 김성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건…. 진짜 기아스잖아?”

“아니, 기아스가 아니야. 같은 붉은 실의 모습이지만, 이건 아리아드네의 실이라는 유물이야. 미노타우로스에 관한 전설은 알고 있어?”

“응, 대충은. 미궁 속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두고 사람들을 제물로 집어넣은 거잖아. 그걸 나중에 미궁에 들어간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거고.”

“맞아.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궁에서 빠져나올 때 필요했던 게. 아리아드네가 다이달로스에게 얻어 건네준 실타래였지. 이것만 있으면 아린이와 함께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꿀꺽 침을 삼키는 김성현에게 조민성은 상자를 닫고 물었다.

“백진희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 기억나?”

“‘잘 해결해봐. 다이달로스’ 잠, 잠깐. 그러면 이건….”

당황스러워하는 김성현에게 조민성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게 미궁을 탈출할 실을 전해주는 다이달로스. 너는 실을 갖고 미궁에 들어가는 테세우스. 마치 역할이 정해진 이야기 같지?”

“백진희가 꾸며낸 함정일까?”

“아마도.”

조민성의 말에 김성현은 입술을 짓씹었다. 어디까지가 백진희의 계획일까. 이대로면 백진희가 만들어낸 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 않을까.

“미노타우로스의 고환, 아리아드네의 실. 이것들을 생각해 봤을 때. 추론할 수 있는 건. 네가 미노타우로스 역할이거나, 신아린이 미노타우로스 역일 수 있지.”

“그 뜻은….”

“잘못했다가는 백진희의 계획대로 둘 중 하나는 상대의 손에 죽을 수 있다는 거야.”

머리가 복잡해졌는지 김성현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고 양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다른 방법을 마련할 것이냐. 그게 문제다.”

“너. 그때 백진희에게 그런 말 했었잖아.”

맥락 없는 말에 조민성이 턱을 괴며 바라보자. 김성현이 말했다.

“나를 죽일 수 없을 거라고.”

“그랬지. 소설을 이끌 주인공이 죽으면 안 되니까.”

“그럼, 내가 아니라 아린이가 위험해질 확률이 더 높다는 거네.”

조민성은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생각하다 대답했다.

“맞아. 그럴 확률이 더 높아.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

조민성이 어이없는 미소를 짓자. 김성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백진희의 말대로 함정이 아니라. 정말로 이게 연극이라면?”

“함정이 아니라고?”

“백진희의 평소 방식과는 다르니까. 눈앞에 닥치기 전까지 자신이 거미줄에 감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잖아. 그런데 이건…. 너무 대놓고 아닌가?”

조민성이 던진 의문에. 김성현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말대로 백진희의 평소 방식과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아린이가 미궁에 갇혔으니까. 붉은 실을 이용해서 구하라고 등을 떠미는 느낌이랄까.

“그렇군. 이제 알겠어.”

“알아냈어? 뭔데. 나한테도 공유해봐.”

“신아린이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확실해?”

아린이의 생명이 걸린 일이었기에, 김성현은 돌다리라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성현이 왜 의심하는지 알고 있는 조민성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실해. 그러니까, 일단 치료 영웅을 불러 너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어야겠어.”

“그럴 시간이 있을까? 아린이를 구하려면….”

“심상의 세계와 다를지 모르니까. 미궁에서 네가 얼마나 갇혀 있을지 몰라. 미리 대비하는 게 둘에게 좋지 않겠어?”

조민성의 논리 있는 말에 김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하게 아린이를 구하는 게 최우선이었으니까.

김성현은 고개를 들어 무언가 골똘히 생각 중인 조민성을 바라봤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조민성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있었다. 성은이를 납치했고, 아린이를 위험에 빠트렸고. 그 탓에 아레아를 잃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자신을 도와주는 조민성이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고, 아린이를 몇 번이나 도와준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조민성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으니까. 그러다, [이해력]이 멋대로 발동해 한가지 가능성을 끄집어냈다.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것이라. 또 믿기 싫은 것이라. 김성현은 고개를 저어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자신도 아니라고 말했으니까.

“너 아린이를 좋아하냐?”“아니,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대답하던 조민성의 얼굴에 아주 잠깐 슬픈 표정을 본 것 같지만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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