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무대장치
* * *
플라틴의 회장실. 멋들어진 유물들과 회장 조민성이라는 명패가 적힌 책상. 커다란 가죽 의자에 앉아 있는 조민성의 모습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라. 괜스레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린이는 멍하니 손님용 의자에 앉아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뽀얀 허벅지 속살이 무방비하게 보여 침을 꿀꺽 삼키자.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은 일리아가 다리를 이용해 아린이의 벌려진 다리를 접었다.
“네가 아직 덜 맞았구나?”
“크흠.”
헛기침하고 시선을 피하자.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던 조민성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에 태블릿을 놔두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잘 들어. 널 심상의 세계로 보낼 거야.”
“심상의 세계?”
“그래. 거기서 넌 미노타우로스 고환의 영향을 받는 너 자신을 죽여야 해.”
“나를 죽여야 한다고?”
“도플갱어와 싸운다고 생각하면 돼. 하지만 그저 심상일 뿐. 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조민성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왜?”
“신아린을 구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으니까.”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조민성의 모습에 괜스레 짜증이 났다.
“아린이는 이미 내 거야.”
“그래? 지금의 신아린이 온전하다고 생각해?”
“뭐?”
“반쪽짜리 신아린을 소유하는 걸로 만족하는 건가?”
그 도발적인 말에 내 안에 있던 소유욕이 들끓기 시작했다. 당연히 모든 걸 원한다. 아린이는 나만의 여자였고,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여자였으니까.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온전히 내 것이 돼야 했다.
말없이 입술을 깨물자. 조민성은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네가 제정신을 차리는 동안 우리는 [붉은 실]을 찾는다.”
조민성의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태클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시간 낭비였으니까.
“붉은 실? 기아스는 아린이가 이미 파훼했어.”
“아니, 다른 붉은 실이다. 넌 네 할 일이나 신경 써.”
조민성이 말이 끝나자. 노크와 함께 회장실로 들어온 여자 비서가 내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놔두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갔다.
슬쩍 멀어지는 여비서의 엉덩이를 바라보다, 차가 담긴 잔에 시선을 두자. 조민성이 입을 열었다.
“진시황이 즐겨 마신 차다. 녹차도 안 마실 것 같은 놈이라 따로 설명은 안 해도 될 것 같군. 그냥 머리가 맑아진다고 생각하고 마셔라.”
박하 같은 상쾌한 향이 나는 차를 살짝 혀를 갖다 대 맛봤다.
“아악! 씨바 뜨거워!”
존나게 뜨거웠다. 혀끝이 데인 듯한 통증에 펄쩍 뛰며 의자에서 발광하자. 지랄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리아와 한심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조민성의 모습에 쪽팔려 급히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후후 바람을 불어 차를 식혀 홀짝대며 마셨다. 생각보다 차라는 것도 마실만 했다. 입안을 감도는 차의 향이 나쁘지는 않았다.
잔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차를 마시자. 그제야 조민성이 가죽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심상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네가 한 짓을 깨달을 것이다.”
“뭔 짓?”
괜스레 불안해져 조민성을 바라보자. 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말했다.
“깨어나서 울지나 말도록.”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의식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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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너와 함께 있고 싶어.”“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야.”“사랑하는 사이에 용서 못 할 건 없어.”“넌 항상 거짓말뿐이었어.”“평생 사랑한다고 약속했잖아.”“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아린아.”“사랑해 아린아.”
“왜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냐고.”
무언가 격돌한다. 내 마음속 깊은 곳. 잠들어있던 무의식 속의 파편 속에서 나는 내가 했던 말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소중한 것을 잃지는 않을까 하는 좀스러운 두려움에 잡아먹혀 추악하게 보였다. 번들거리는 눈에는 소유욕이 들끓고 있었고, 성욕을 참지 못하고 바지 앞이 발기한 자지로 뭉툭해 보였다.
그 역겨운 모습을 외면하려 하자. 내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친 ‘나’는 우습다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게 본래의 너잖아?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시기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구석으로 몰아세우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아프게 하는 쓰레기.”
그 날카로운 말이 바람을 타고 소음처럼 들려왔다. 귀를 막으려 해도. 손이 없다.
아니 육체 자체가 없었다.
이건
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앞으로 뻗은 손이 보인다. 투박하고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온 멋있는 남자의 손이 아닌 키보드와 마우스만 만졌던 굳은 살 하나 없는 통통한 손.
근육으로 뒤덮인 조각 같은 몸이 아니라.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군살이 붙은 몸까지.
이게 나였다.
아무런 재능도 없이 운 좋게 초월 아카데미에 입학한 재수도 좋은 놈. 차성의 후계자라는 과분할 정도의 여자친구에게 성욕을 참지 못하고 상처 주었던 ‘나’.
그런 내 앞에는 나체 여자들의 품에 안겨 잘생긴 얼굴, 조각 같은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며 나를 벌레 보듯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그 모습으로 아린이를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항상 불안했지. 아린이를 잃을까. 황금 동아줄을 놓칠까 불안에 떨며 비골을 시켜 아린이를 발정 나게 해 억지로 처녀를 취했잖아.”
레이나의 큰 가슴을 움켜쥔 저쪽의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원한 건 사랑이 아니야. 소유욕이지. 지금 내 옆에 있는 다른 여자들처럼 너는 아린이를 소유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걸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한 것 뿐이지.”
그 말에 무언가 내 몸을 짓눌렀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무게를 갖고 내 무릎을 꿇게 했다.
그런 내게 다가온 김성현이 내 볼을 장난스레 툭툭 쳤다.
“이제 아린이는 무슨 짓을 해도 순종적이야. 이제 원할 때마다 마음껏 안을 수 있고, 배를 내리쳐도 반항하지 않는 네가 원하는 육변기가 됐다고.”
짓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투명한 유리 같은 바닥에 쓰러져 그저, 짓눌렸다.
“네가 원했던 아린이잖아?”
그 말에 나는 나를 짓누르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죄책감.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하는 말이다. 저 말에 거짓은 없었다. 나는 아린이를 과분하게 여겼다.
못생긴 나와는 다르게 감히 넘볼 수도 없을 정도로 예쁜 외모를 가진 아린이. 그런 아린이 옆에서 나는 열등감 덩어리였다.
아린이가 떠날까 매일 걱정했으며, 한편으로 약점을 잡아 아린이가 내 곁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소유욕에 가까웠다.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 자신의 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욕심.
기한신에게 몹쓸 일을 당한 거 아닌가 하는 걱정보다. 처녀막을 잃은 게 걱정되어 옥상으로 끌고 가 처녀막을 확인하던 것이 그 증거였으니까.
그래, 내가 원했던 것이다.
상처를 준 것도 나였고, 소유욕을 사랑으로 속인 것도 나였다.
“돌아가. 아린이를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려면 임신시켜야지. 아린이만이 아니라 많은 여자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게 네가 원했던 것이잖아.”
맞다. 내가 꿈꿔왔던 건 문란한 아카데미 생활이었다.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남자가 되어 매일 같이 학교 미녀들과 섹스하는 것.
그게 원래 내 망상과 같은 목표였으니까.
“맞아. 이제 그 망상이 현실이 됐어. 신아린마저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병신이 됐다고! 다 네 거야! 네가 원하던 대로 된 거라고!”
그래. 나는 그저 아린이를 소유하고 싶었을 뿐이
툭
언젠가의 기억의 파편이 구겨진 채. 종이로 만든 공처럼 내게 날아와 부딪쳤다.
그것을 바라보자. 구겨져 있던 것이 펴지면서 그 안에 있던 기억을 불러온다.
“이게 히아신스 맞지?”
휴대폰을 꺼내 다시 한번 꽃의 생김새를 확인하고 그대로 꺾었다.
교장의 화단이지만 설마 한 송이 사라졌다고 눈치챌까. 히죽거리며 조심스럽게 보라색의 꽃을 들고 교실로 향했다.
‘이거 받으면 분명 좋아하겠지?’
기뻐할 아린이의 모습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이 끝나자. 무언가 마음속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히아신스를 꺾은 이유가 뭐겠어. 영원히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난 거지.”
“…아니, 아니야.”
나는 처음으로 내 말을 부정했다. 기억 속에서 느꼈던 감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툭
또 다른 파편이 날아와 기억을 불러온다.
“성현아. 나 좋아해?”
처음이었다. 네가 나에게 그런 물음을 건넨 것은.
서로를 상처 주고 의심하며 속이던 관계였으니까.
나는 그 맥락 없는 질문에 너무나도 당황하여,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래서 감정을 꾸며내지도, 이럴 때 써먹으려 인터넷에서 공부한 것들도. 사용하지 못하고 그저, 멍청하게 미소 지으며 진심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좋아해 아린아.”
모른다. 더 좋은 대답이 있을지. 아린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지.
하지만 정말로 그 순간에는.
나는 아린이를 순수하게 좋아했다.
기억에도 감정이 묻어나는 것일까. 나는 기억 속에서 잊고 있었던 감정을 떠올렸다.
“그렇게 대답하면 섹스할 수 있을지 몰라서 그런 거잖아.”
“아니, 아니야. 너도 나라면 알 거야. 저 때의 내 마음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또 다른 기억의 파편이 언젠가의 다짐을 떠오르게 한다.
노력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아린이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걱정거리가 아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
아린이는 우는 것보다 웃는 게 더욱더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웠으니까.
더 이상 그 예쁜 흑요석 같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그 길이 수라의 길이라 할지라도.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네 말이 맞아. 나는 열등감 덩어리였어. 아린이를 잃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상처를 주고, 소유하려고 들었어.”
온몸을 짓누르는 죄책감의 무게에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데 그런 생각조차 안 들 때가 있었잖아.”
“뭐?”
“아린이가 곁에 있으면. 야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고. 손 잡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잖아.”
아린이와 같이 있을 때는 열등감을 느낄 시간도 없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갔으니까.
“아린이와 보낸 첫날 밤. 약속했었잖아. 변하기로.”
우리의 처음 시작은 온전한 사랑으로 시작된 게 아니었다.아린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 고백을 받아줬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린이를 손에 넣었다는 소유욕에 행복했다.그 소유욕은 시간이 지날수록 집착으로 변해 아린이에게 억지로 사랑을 강요했고. 의심했으며 확인하려 들었다.처음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언제부턴가. 이 여자를 온전히 내 것으로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변했고.조민성에게 아린이를 빼앗길까 두려운 마음은 비골을 시켜 매일 밤 아린이를 발정 나게 했다.아린이가 힘들어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내 앞에 무릎 꿇고 애원하는 모습을 기대했다.내 계획대로 아린이와 첫날 밤을 갖게 된 날. 나는 그때가 돼서야 온전한 사랑을 느꼈다.섹스를 하고 싶다. 가슴을 빨고 싶다 같은. 이런 성욕 어린 감정이 아닌.평생 함께하고 싶다.무엇이든지 같이하고 싶다.떨어지고 싶지 않다.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그런 온전한 감정들을 느꼈으니까.그것이 기아스때문인지. 서로의 몸을 섞어서인지 모르나.그동안 사랑이라고 속여왔던 감정들이 소유욕과 정복욕이 뒤섞인 추악한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나는 그동안의 나를 후회했고 변하기로 결심했다.내가 느낀 온전한 사랑의 감정을 혼동하지 않으려 노력했다.사랑으로 시작한 관계는 아니지만.이 관계의 끝은 분명.사랑일 테니까.
언제부터일까.
나는 왜 이 다짐을 잊고 있던 걸까.
누구보다 소중했으며,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었는데.
속박하고, 구속하며, 소유하려 들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과 행복하면 그걸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아린이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는데.
어째서 내 손으로 그것을 부서트린 걸까.
아프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푹하고 찔러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아린이에게 상처 주고 용서받지 못 할 짓을 했다는 거. 알고 있어."
"그래, 너 때문에 아린이가 병신이 된 거지."
"그래서 용서를 구해야겠어."
"뭐?"
"날 욕하고 싫어하고, 다시는 보지 않을지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겠어. 죄책감마저도 지금의 나에게는 사치니까."
죄책감을 느끼고 허우적댈 시간조차 없다. 아린이를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벌을 받으면 된다.
묘한 시선을 보내는 김성현에게 나는 뇌까렸다.
내 머리에서 나가 씨발
그러고는 소유욕이 가득 찬 역겨운 모습의 나에게 통통한 주먹을 휘둘렀다.
***
칠격의 아지트.
칠격의 모든 멤버는 기다란 식탁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제일 상석에 앉아 있던 옥색의 가면을 쓰고 있던 신한림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배달 시간이 지난 거 아닌가? 예정 시간은 55분이었다만."
"곧 오겠지. 5분밖에 안 지났구먼."
알펜시아의 대답에 신한림은 가면을 쓰다듬으며 옆에 앉아 있던 조민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지?"
"3일 안에 마인을 하나 찾아야 한다."
"호오, 의뢰인가?"
조민성의 말에 재력을 담당하는 오오누마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어이, 영감. 민성이는 이제 우리 칠격의 멤버라고. 대가리잖아 대가리."
"책, 책사 아니구요?"
"아, 맞다 시발. 단어가 생각 안 났어."
일리아의 말에 분홍 머리의 알리아스가 목소리를 더듬거리면서도 태클을 걸었다.
"에잉, 그래도 플라틴인데…."
"걱정하지 마라. 보수는 확실히 줄 거니까."
"그래? 그럼 열심히 해야지 암!"
보수라는 말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오오누마를 보고 신한림은 고개를 저으며, 조민성에게 물었다.
"마인은 왜 찾는 거지?"
"몇 달 전 프랑스 정부의 비밀 금고를 턴 [공간] 관련 마인이 가져간 붉은 실. 그것이 필요해."
그 말에 테이블에 턱을 괴던 신한림의 몸이 크게 기울었다.
"어? 뭐, 뭐라고?"
"프랑스 정부의 비밀 금고를 턴…. 설마, 내 의심이 사실이 아니길 빈다."
가면 너머로 엄청나게 당황한 게 느껴질 정도였기에, 조민성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말했다.
"나는 치킨 받으러 미리 나가 있어야겠다."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신한림을 푸른 선으로 막아 세웠다.
"그렇군, [공간]이동의 능력. 너희들 짓이었나."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알펜시아가 황급히 양손을 허공에 들고 허둥지둥 변명했다.
"우리가 맞아! 근데 그건 프랑스 정부 놈들이 마인 사냥 끝나니까 입 싹 닦아서 대가로 쓱싹 한 거야!"
"맞, 맞아요! 우린 의적이에요!"
"거참, 훔칠 수도 있지."
쾅!
식탁을 내리쳐 소란을 잠재운 조민성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붉은 실은 왜 가져간 거지? 필요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우리는 그게 기아스인 줄 알고. 팔려고 훔친 거거든."
"다른 건 왜 안 가져가고?"
"거래 조건이 그거였으니까. 근데 프랑스 새끼들이 사기 친 거였어."
신한림의 말에 조민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무슨 사기?"
"그거 붉은 실은 맞는데 기아스가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실이더라고. 같은 붉은 실이라고 사기 쳤나 봐."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금고에 들어 있는 것은 다른 붉은 실이었다.
"진짜야. 그래서 그냥 쓸 수가 없어서 창고에 넣어놨어. 혹시 미궁이 나타날까봐 보관했지."
"지금 볼 수 있나?"
신한림의 손짓에 오오누마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옻칠 된 상자를 가져와 식탁 위에 올려놨다.
상자 안을 열어본 조민성은 그 안에서 밝게 빛나는 붉은 실을 확인하고는 신아린의 기억 속에 있던 붉은 실과 비교해 봤다.
아린이가 사용한 기아스와 프랑스 정부의 금고에 있던 붉은 실은 얼핏 보면 비슷해 보였지만, 실제로 다른 디자인이었다.
그 순간 조민성은 심각한 위화감을 느꼈다. 정말로 이게 우연일까.
마치 짜놓은 이야기처럼 미노타우로스와 아리아드네의 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붉은 실이 필요할 때. 이렇게 쉽게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은 행운일까. 아니면 치밀한 설계일까.
검은 장막 뒤로 백발의 머리카락이 보인 듯 했다. 따라잡은 것일까. 아니면 그것조차 계획의 일부분일까.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자신이 상대하는 괴물의 저력을 잠시나마 엿본 듯했다.
이미 무대는 시작되고 있을지도 몰랐다.
옻칠 된 상자를 집은 조민성이 몸을 일으키자, 오오누마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거! 값은 쳐주는 거지?"
"비싸게 쳐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오오누마를 뒤로 신한림이 낮게 말했다.
"그냥 가게? 그럼 남은 치킨 하나는 내가 먹어도 되나?"
"그런 게 어딨어! 반 나눠!"
"왜 둘이 반이지? 그럼 난 몸통 빼고 다리."
쓸모없는 소리를 뒤로 하고, 조민성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설을 점검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금제 속 신아린이 함정이라고 말하던 기아스. 그리고 기아스가 파훼 되자 점점 변하게 된 김성현.
김성현의 머릿속에 있던 백진희의 마력. 그건 단순히 김성현의 감정을 조작하거나, 세뇌를 통해 미친놈으로 만든 게 아니었다.
이제야 백진희가 왜 기아스를 보험이라고 불렀는지. 이해되었다.
"설마 백진희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 하려면. 김성현의 상태창을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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