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끝
* * *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정말로 성현이를 사랑했음에도 성현이의 말대로 그것이 97%밖에 안 됐다면 내 사랑은 온전하지 않았다.
그게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이 있으면 행복했고, 섹스는 황홀했으며, 이 순간이 영원하길 염원했으니까.
"너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거야."
내게 선언하듯 그렇게 말하며, 딜도를 움켜쥐는 성현이에게 황급히 손을 내밀어 행동을 제지했다.
"난, 난 이미 네 거야!"
내 다급한 외침을 들은 성현이는 질벽으로 꾹 조이고 있는 딜도를 붙잡은 채.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래? 그럼 조민성이랑 무슨 짓 했는지 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뭐 때문에 조민성이랑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렇게 의심하는 것일까.
내가 모르는 증거라도 가진 것일까? 조민성과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확신하는 듯한 성현이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애원했다.
"정말,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어. 진짜야. 도대체 왜 날 못 믿는 건데…?"
"그럼 왜…. 상태 창이 사라진 건데."
"뭐…?"
성현이가 왜 나를 의심하는지 [이해]되었다. 성현이의 상태창은 공략하는 대상을 나타나는 특수한 상태창이었는데. 성현이의 말대로 내 상태창이 사라졌다면. 내가 더는 공략 대상이 아니게 됐거나. 공략도가 0%가 됐다는 뜻이 된다.
내 공략도가 97%라는 것을 신경 쓰던 상황에서. 이제는 내 공략도를 확인할 수 없으니 이성을 잃은 것이다.
정말로 의심대로 조민성이 내게 그런 짓을 했을까? 그건 불가능했다. 내게 보여준 신뢰 가는 행동을 제외하더라도. 조민성이 내게 무슨 짓을 했더라 해도 상태창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상태창은 내 능력이 아닌 성현이 [공략 플래그의 달인]의 능력이었으니, 요정왕의 팔찌를 낀 상태에서도 상태창을 보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럴리가…흐읍, 흐브읍…."
갑작스럽게 성현이가 키스를 해왔다.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고 내 사랑을 증명하려 격렬하게 설육을 얽혔지만. 나를 바라보는 성현이의 눈은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키스로도 상태창이 안 떠. 공략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 분명 조민성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지? 대답해봐. 조민성이 네 머리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었어?"
"그런 게 아니라니까! 조민성은 날 구하다가 다치기까지 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쿠흑…쿠흐흑…"
목을 조이는 강한 힘에 숨통이 막혀 발버둥 치자, 한서아가 또다시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널 구하려고 아레아를 잃었어. 조민성이 너를 공장으로 유인하지만 않았다면...! 아레아는 지금도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쿨럭, 쿨럭…흐윽, 흑…아레아를 잃다니…? 무, 무슨 말이야 그게…."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움켜쥔 목을 풀어줘 헛기침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그제야 산소가 투입된 뇌가 정상적인 활동을 시작해. 성현이의 말을 이해하고 의문을 던졌다.
"널 구하기 위해. 아레아가 목숨을 잃었다고."
"아레아가…?"
문득 휴대폰을 사준다는 말에 기뻐하던 아레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사도 없이 사라져 서운해하던 것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져 왔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나때문에 죽은 거였어…?
"네 탓이 아니야. 조민성 때문이지. 그래서 그 사실을 숨겼어. 네가 상처 입을까 봐. 괜한 죄책감 가질까 봐. 그런데 넌…. 그런 날 속이고 조민성이랑 같이 있었어?"
"제발, 제발 성현아. 끝까지 내 말을 들어줘. 처음부터 조민성이랑 있던 거 아니야. 백진희의 함정에 빠진 걸 조민성이 구해준거라고!"
"그러니까 조민성이 왜 널 구하는 건데. 그럴 이유가 없잖아."
내게 그리 소리치는 성현이에게 나는 멍하니 시선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의심할만한 상황인 것은 이해하고 있으나, 조민성이 나를 구했다는 것에 격하게 화를 내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무슨 뜻으로 말한 거야?"
"조민성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면. 왜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냐고."
발작하던 내 몸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온몸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먹먹한 느낌으로 사라져갔다. 심장이 얼어붙은 듯 몸과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내가 조민성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있는 걸 화내고 있다. 피해의식이거나 확대해석도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성현이의 눈빛은 정말로 내가 왜 살아 있는지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구차하게라도 살아남으려는 것이.
내 욕심이었구나.
목표가 사라진 마음이 갈 곳을 잃고 무너진다.
조각조차 남지 않고, 절망이라는 감정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곁에 있고 싶었고,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이 내가 살아있음을 탓한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 마지막을 원하고 있다.
내 목을 조르던 성현이의 손이 목에서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니,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욕심스러운 삶을 더는 추잡하게 이어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가고 있다.
가까스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지탱하던 죄책감과 자괴감을 담아두었던 둑이 툭 하고 터졌다.
너무나도 큰 충격을 버티기 위해. 뇌는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무너진 감정들이 망각이라는 것에 빨려 들어갔다.
육체와 정신에서 느껴지던 격통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망각은 진통제였으며, 모든 것에 대한 자유였다.
내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던 망각 속에서 나는 급히 몸을 내던졌다.
하나는 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더는 밟을 곳조차 남지 않은 마음 한구석. 시들어가는 히아신스의 곁에 앉았다.
감정과 기억이 사라져 이유는 모르겠으나.
왜인지 이것만은 잃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
"포션으로는 재생 안 되는 거야?"
"그래. 계약으로 지불한 것이니까."
신한림의 질문에 조민성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대답했다.
"어렵네. 마법사들은."
"괜찮아. 대체하면 되니까."
"맞아~ 우리 대장도 얼굴 대체한 거잖아! 지금은 가면을 쓰고 있긴 하지만."
갑자기 옆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던 알펜시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쓰읍. 왕과 책사의 대화다. 신하가 낄 자리가 아니야."
"엥. 나 그냥 신하였어? 진급 시켜줘! 대장군 정도로!"
둘의 만담이 시작될 것 같다는 생각에 조민성은 붕대를 감싸고 있는 팔을 들었다.
"용건부터 말하면 안 될까."
"아. 미안, 환자 앞에서 크흠. 나가 있어라 신하."
"에잉, 예이~ 나가 있겠습니다~"
끝까지 상황극을 포기하지 않는 둘의 모습에 조민성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유치한 놈들을 믿어도 되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알펜시아가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신한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옥색의 가면의 눈구멍으로 진중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용건은?"
"토요일 저녁, 신재호를 친다."
조민성의 말에 고민이라도 하듯. 신한림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규칙적으로 툭툭 거리며 한참을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는 신한림은 갑작스레 맥락 없는 질문을 던졌다.
"후회는 없어?"
장난기 섞인 목소리지만. 진지한 분위기였다. 그 맥락도 없는 질문에 조민성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항상 후회한다."
"어떤 걸?"
"전부."
조민성의 대답에 신한림은 자기 가면을 쓸어내렸다.
“나는 네가 이해되지 않아.”
“이해를 바란 적은 없다.”
즉답에 가까운 조민성의 대답에 신한림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남을 설득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고?”
“…그럴지도.”
굳이 남에게 자신의 이상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누군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발걸음을 멈출 생각도 없었다.
손가락질하고 오해를 한다 해도. 억울하거나 서운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할 뿐.
그것이 오래된 약속이자. 삶의 원동력이었으니까.
“…만약 네 계획이 틀렸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 그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겠지.”
태연한 목소리로 답하는 조민성이 신한림은 너무나도 흥미로웠다.
자신이 여태까지 봐왔던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사람. 그렇기에 마(?)의 어둠을 밝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다만, 그 끝이 얼마나 외로울지 생각할수록 정이 가는 게 문제였다.
“내가 너를 책사라고 부른 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야. 정말로, 우리 칠격은 네 계획을 믿고 목숨을 던질 거니까.”
조민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칠격에서의 용무가 끝났으니. 남은 뒷정리를 해결해야 하니까.
“그럼, 토요일에 보지.”
“…그래.”
푸른 선이 조민성을 뒤덮고, 이내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신한림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신재호라…”
‘용사’의 칭호를 가진 괴물을 잡으려면. 역시 한 명밖에 없겠지.
“알펜시아.”
“응. 대장.”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알펜시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신재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그리고…. 토요일에 칠격 전부를 소집해.”
신한림의 말에 알펜시아는 흥미로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신재호를 치는 거야?”
“맞아.”
“그 미친놈을 이길 수는 있겠어?”
“카라에프를 믿어야지.”
이런 상황을 대비해 날카롭게 날을 세워놓은 것이 바로 카라에프였으니까. 신살의 능력을 가진 카라에프라면. 신재호조차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신한림은 조민성이 앉아 있던 빈자리를 바라보며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웅의 끝이 다가오고 있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