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31화 (131/160)

〈 131화 〉 각성

* * *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작은 옷이 찢어질 수도 있어서. 가운을 이불처럼 걸쳐 입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 오지 않는 낮잠을 취하려 했다.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만 아니었다면….

팔이 짧아져 어쩔 수 없이 무거운 가운을 낑낑대며 일어나. 침대 옆 테이블에 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신아린? 아린이맞지.]

주말인데 훈련이라도 하고 있던 걸까. 성현이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응. 맞아. 아, 나 휴대폰이 고장이 나서 지금 복구했어. 혹시 연락했었어?"

[하아…. 어디야 지금? 내가 그리로 갈게.]

"어…?"

갑자기 나에게 온다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마인화의 반동 때문에 작아진 모습을 성현이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작아진 모습으로 다른 사람인 척 여친에게 잘하라고 약속까지 받아냈는데.

이 모습을 들킨다면 성현이가 어떻게 생각할지 안 봐도 뻔했다.

"아니야. 나 지금 밖이라 조금 바빠서 나중에 보자."

그렇게 둘러대자. 휴대폰 너머로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말해.]

무언가 그 목소리에서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내게 엄청나게 분노한 듯한 느낌이랄까?

"무슨 일 있어…?"

[어딘지 말하라고!!!]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지르는 성현이에 나는 너무 놀라 그만 휴대폰을 놓치고 말았다.

침대 위로 떨어트린 휴대폰에서는 계속해서 성현이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어디야!!! 어딘지 말해!!!]

그 말과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휴대폰에서 들려왔다. 이토록 이성을 잃은 성현이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기에, 온몸이 두려움에 떨려왔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 화가 난거지…? 이유를 생각해봐도 전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일, 일단 진정해 성현아…."

[닥쳐!!! 어디야, 어디냐고!!! 말하란 말이야!!!!!!]

그 비정상적인 반응에 생존본능이 경고를 보냈다. 경고가 아니라도 지금 성현이를 만나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 정도로 성현이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제발, 성현아…. 왜 그래 조금만 진정해."

내 애원에도 휴대폰 너머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누군가의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귓가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필사적으로 이해력을 돌려봐도 지금 이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백진희가 성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게 아니면 도대체 성현이가 이리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에 빠질 일이 뭐가 있을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리더니 통화가 끊겼다. 나는 너무나도 놀라 멍하니 휴대폰의 화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화를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부숴버려 어쩔 수 없이 유지아의 집으로 찾아갔다. 내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유지아는 눈치를 보면서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휴대폰이 바뀌어서 그런지 위치 추적 앱은 사용할 수가 없어서…. 대, 대신 영웅협회의 위치추적을 이용하면 될 거야!"

내 표정을 읽은 유지아가 황급히 말을 바꾸고는 열심히 능력을 사용해 아린이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이게 원래는 나한테는 권한이 없는 거라.."

"알았으니까. 찾기나 해."

유지아에게 짜증이 치솟았다. 나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뭐 그리 생색을 내는지. 괜스레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조작하는 유지아를 지켜보며, 치솟는 분노를 다스렸다.

아린이가 멀쩡하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허락도 없이 위험하게 돌아다녔다는 것이 너무나도 화가 났다.

그러다가 칠격이나 조민성에게 납치라도 당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해킹해야 해서 조금 시간이 걸릴지 몰라."

"그래."

길게 한숨을 내쉬자. 눈치를 보던 유지아가 슬쩍 내게 물었다.

"신아린이 또 뭐 잘못했어?"

"…그래."

"걔는 진짜. 성현이가 자기 때문에 위험한 것도 고마워할 줄 모르고 왜 그런데…."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지 그런 말을 하는 유지아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나는 그것조차 짜증이 났다.

대답없이 이마를 긁으며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자. 눈치 없이 유지아가 또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도 한서아의 말에 찬성이야. 괜히 마인이랑 엮어서 좋을 게 뭐가 있어. 차라리 가디언즈에게 신아린이 마인이라고 알려주­ 커억!"

짜증이 폭발했다. 유지아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꾹 조이자.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변한 유지아가 발버둥 치며 목을 잡은 손을 필사적으로 툭툭 쳤다.

"아가리 닥치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손을 풀어주자. 오줌을 지리며 유지아가 바닥에 토를 해댔다. 역겨운 냄새에 더욱 짜증이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위치 찾으면 말해. 밖에 있을 테니까."

"…으, 응…. 알았어."

충혈된 눈으로 대답하는 유지아를 한번 쏘아보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심호흡하자. 가까스로 내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목에 손자국 모양으로 피멍이 든 유지아가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그…. 찾았어."

"어딘데."

"플라틴 호텔."

"…뭐?"

가까스로 억눌렀던 분노가 또다시 치밀어 올랐다.

***

도저히 낮잠을 잘 수 있는 정신이 아니라. 한참을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 내 몸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모습대로 쭉쭉 늘어나는 몸을 신기하게 관찰하다.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내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 신기한지.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는 최선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황급히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일단 만나서 성현이의 분노를 해결해야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이유 모를 분노도 조금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택시에서 내려 내 방으로 돌아가자.

성현이가 아닌, 한서아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는 어디론가 연락을 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혹시 한서아라면 무슨 일인지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물어봤지만,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누군가와 통화하는 데만 집중했다.

"응…응…. 알았어. 잡아둘게…. 응…10분…알았어."

통화를 끝낸 한서아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왔다.

"신아린."

나를 바라보는 한서아의 표정에서 묘한 비웃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성현이는?"

"기다리면 성현이가 곧 올 거야. 앉아서 기다려."

명령하듯 내게 의자를 가리키는 한서아의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저번부터 나를 싫어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보이는 한서아의 모습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서로를 바라보며 매서운 눈으로 시선을 교환하자. 지지 않으려는지 한서아는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와 나를 올려다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너 때문에 성현이가 힘들어하고, 걱정하는데. 너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지?"

"죄책감 있어. 항상 미안하고. 근데 그걸 왜 너한테 말해줘야 하는 데?"

"당연히 내가 성현이를 사랑하니까. 나는 내가 성현이에게 해가 된다면 자살할 정도로 성현이를 사랑해. 너처럼 피해 주면서 옆에 붙어 있지 않고."

그 말에 나는 이를 갈며 한서아를 노려봤다.

"그래서. 나보고 지금 자살하라고 말하는 거야?"

"아니, 너는 자살 못 해. 나만큼 성현이를 사랑하지 않잖아?"

더는 한서아와 대화하기가 싫었다. 나는 짜증을 가득 담아 한서아를 보며 말했다.

"됐으니까. 내 방에서 꺼져."

"싫은데?"

실실거리며 웃는 한서아의 모습에 더는 참을 수 없어 손을 들자. 기다렸다는 듯 한서아가 내 명치를 주먹으로 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무방비하게 배를 얻어맞아. 장기가 뒤틀린 듯한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쿨럭­거리며 숨을 내뱉자. 한서아가 내 머리를 발로 누르며 말했다.

"너 때문에 몇 명이 피해 보는 거냐고 이기적인 년아."

당장에라도 마인화로 한서아의 목을 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는 마인화를 하지 말라는 조민성의 말이 떠올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리를 짓밟던 한서아는 내 등에 침을 뱉고는 발로 내 머리를 툭툭 쳤다.

"일어나. 좆같은 마인년아."

그 말에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은 배를 붙잡고 몸을 일으키자. 한서아가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가서 앉아."

말을 안 들으면 주먹이라도 휘두를 생각인지 내게 주먹을 내밀어 보이는 한서아의 모습에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혹시 내가 신아린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러는 것일까.

동생을 구해주고 부모님의 공장을 도와줬다고 고마워하던 한서아와 지금의 한서아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일단 성현이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으니. 별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앉았으니까 말해줘.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성현이가 화가 난 거야?"

"네가 성현이 연락 씹었다며."

연락이 안 된 거로 그렇게 화가 났다고…? 요즘 바빠서 연락도 자주 안 했는데. 몇 시간 동안 연락이 안 됐다고 이성을 잃고 분노한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서아에게 물어봤자 더는 좋은 대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침묵하고 기다리고 있자.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을 부술 듯 거칠게 열며 성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보다 하얗게 보이는 성현이의 모습에 화가 풀린 건가 생각했을 때. 성현이의 목소리에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잘했어 한서아."

너무나도 큰 분노는 오히려 불처럼 뜨겁지 않고 얼음처럼 차가운 법이었다. 내게 다가온 성현이는 서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보며 물었다.

"걱정했어 아린아. 어디에 있던 거야."

"미안. 그냥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나를 추궁하듯 서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보는 성현이의 모습에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졌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백진희와 마인을 사냥하러 갔다고? 그러다 마석을 흡수해 죽을 뻔하다가 조민성에게 구해졌다고?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내게 성현이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따스한 온기로 가득했던 성현이의 손이 오늘은 뜨거울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걱정하더라도 사실대로 얘기하기로 약속했으니. 백진희와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백진희랑 오늘 만나기로 약속­ 끄으아아악!!"

우드득!

성현이를 잡고 있던 손이 강한 힘에 뒤로 뒤틀리며 손목의 뼈가 부러져 격통이 찾아왔다. 손등이 완전히 뒤로 젖혀져 팔에 닿은 채 성현이의 손에 붙잡힌 채 고통에 의자에서 떨어져 카펫 위를 굴렀다.

"거짓말."

"아윽, 아윽…아, 아파 성현아…아파…아윽…!!!"

부러진 뼈가 피부를 뚫고 나와 팔을 타고 피가 흘러내려 바닥의 카펫을 적셨다. 내 고통 섞인 신음에도 성현이는 내 손을 부러트린 채 음영이 사라진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조민성이랑 호텔에 있었잖아."

"그…그건…. 끄아아악!!!"

우그드드득!!!

이번엔 발목이 부러졌다. 아니, 으스러졌다는 표현이 옳다고 봐야 했다. 체중을 실어 내 발목을 짓밟아. 격통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한서아가 내 몸을 붙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아윽, 아읏…왜, 왜…왜 그러는거야…흐윽, 흑…."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성현이가 나를 때렸다는 사실과 미친 듯이 경고를 보내는 생존본능 때문에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넌 항상 거짓말뿐이었어 아린아."

"아, 아니야…으극, 으긋…내, 내가…설명…끄으으으윽…!!!"

우드드득투드득!!!

반대쪽 발목은 아예 발이 뒤틀린 채 으스러졌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의식을 잃지 않게 하려는지 한서아는 내 목덜미를 꼬집었지만, 그 정도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양쪽 발목에서 느껴지는 격통이 더욱 컸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네가 나를 온전히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어…."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보려 입을 열려 했지만, 한서아가 뒤에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근데 이젠 아니야. 더는 못 참아. 온전한 사랑을 갖는다는 게 욕심이었던 거야. 어떻게 해서든 너를 가지면 되는 거였는데."

광기와 집착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어울리는. 소유욕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성현이는 내 배를 내려찍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