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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30화 (130/160)

〈 130화 〉 희생

* * *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푸른 섬광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섬광이 사라진 직후, 마치 나를 보호하듯 내 앞에서 백진희와 맞서는 조민성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뒷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나는, 기억에는 없지만 오래전 잃어버린 감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조민성…!"

웃음을 터트리던 백진희는 조민성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얼굴이 흉악스럽게 일그러졌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 말과 함께 조민성의 주변을 나선 하던 푸른 선들이 백진희를 향해 쇄도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벽이 푸른 선들을 막아섰다. 첫 공방이 오간 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마법을 구현해 격돌하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나는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밀어내보려, 내 온몸의 뼈가 부러질 정도로 마력으로 짓누르며 저항했지만. 육체의 고통으로도 `그것`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정상을 향했다.

빌라를 그대로 주저앉힐 생각인지 백진희 주변의 벽에 푸른 선들이 박혀, 빌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꺼져라. 마녀."

조민성의 말에 백진희는 벽에 박힌 푸른 선들이 마법진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야 몸을 빼내려 했지만. 푸른 섬광과 함께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한번 밖에 통하지 않는 잔재주라 아껴둔 건데. 아쉽네."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린 조민성은 바닥을 기고 있는 나에게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마주하려 했다.

"바, 바라보지 마…!"

가면을 직시한다면 조민성에게 광기가 전염될 것이다. 그것을 알려주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조민성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지. 내 턱을 붙잡아 억지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멍청한 파트너."

그렇게 말하는 조민성의 입가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더는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는지 눈을 감은 조민성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 거래다."

순식간에 엄청난 마력이 조민성의 왼팔에 집중되어, 대기가 아지랑이처럼 휘어 보였다. 주변을 나선 하던 푸른 선들이 조민성의 왼팔에 붕대처럼 감겨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민성은 한쪽 눈만 뜨고 나를 직시했는데. 그 눈동자에는 푸른 빛이 감돌았다.

"버텨."

그 말과 함께 조민성의 왼팔이 내 얼굴에 닿았다. 조민성의 왼팔과 내 얼굴에서. 거센 공명과 진동이 발생했다. 가면에 일렁이던 혼돈이 극렬한 저항을 나타냈다.

조민성의 왼팔을 감싸던 푸른 선들이 혼돈에 닿자. 염산에 젖은 듯 녹아내려 잿가루로 변했다.

그런데도 조민성은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가면과 내 얼굴의 경계를 찾아냈다. 조민성의 손끝에 가면의 경계가 걸리자. 내 안을 기어오르던 것이 이상을 눈치채고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가면 위를 일렁이던 혼돈은 더욱더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해. 조민성의 왼팔에 혼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왼팔에 겹겹이 감겨있던 푸른 선들이 녹아 사라지며 팔이 검게 물들며 혈관이 터지는 게 보였다.

그만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얼굴 전체를 힘으로 뜯어내는 듯한 격통에 소리 없는 비명만 질러댔다.

내 가면을 벗겨내는 조민성의 손은 녹아 사라졌지만, 손에 담아뒀던 마력이 그대로 형태를 유지해 내 가면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졌다.

우드드드득

억지로 벗겨지고 있는 가면이 형체가 없음에도 부서지며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조민성의 주변으로 푸른 마나들이 쉼 없이 모여 가면에 들러붙었다.

마침내 얼굴에서 벗겨진 가면과 함께 기어오르던 `무언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마인화가 풀리며 순식간에 반동이 찾아왔다. 격한 피로가 뒤늦게 몰려왔다.

그런데도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작아진 내 손으로 한쪽 눈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조민성의 뺨을 만졌다. 그제야 감았던 다른 쪽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오른쪽 눈을 잃고, 팔꿈치까지 팔이 검게 변해 녹아 없어진 채. 땀에 젖은 머리. 거친 숨을 내쉬며 가슴을 들썩이면서도.

조민성은 나를 향해 맑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귀엽게 변했네."

그 모습에 나는 눈물을 흘리며 한마디의 말 밖에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바보…."

아주 오래전에.

나는 조민성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

상태창의 이상에 황급히 아린이에게 연락을 했지만 받지 않았다. 휴대폰의 전원이 꺼져 있는지 통화연결음도 얼마 못 가 끝나버렸다. 미친놈처럼 토우코를 내버려 두고 기숙사로 달려갔다.

방에도 아린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황급히 주변에 연락을 돌려봤지만 아린이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씨발!"

다른 여자들의 상태창은 이상이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아린이의 상태창은 이상한 변화를 감지한 뒤로는 불러오지 못했다.

아린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두려움에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유지아에게 황급히 연락했다.

"아린이 휴드폰 위치추적 가능하지?"

[응. 저번에 휴대폰 해킹하라 했을 때. 위치추적 앱도 깔아놨어.]

"찾아봐."

[잠시만….]

설마 칠격이 다시 아린이를 납치한 것일까. 후회가 치밀었다. 아린이를 아예 내 옆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에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 아린이를 다시는 보지 못할까 불안함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린이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걸. 괜한 계획 같은 걸 세운다고 아린이와 거리를 벌리지 말걸.

씨발. 씨발. 씨발.

나에 대한 분노에 팔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려왔다. 팔다리를 잘라내더라도 아린이를 내 곁에 뒀어야 했는데.

[추적이 안 돼….]

"씨발!"

욕설을 내뱉으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들었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아카데미를 빠져나가 미친 듯이 아린이를 찾아 돌아다녔다.

***

헉. 하는 폐 안 깊숙이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의식을 되찾았다. 낯선 천장에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잠들었던 감각이 순식간에 깨어나며, 머릿속에서 마지막 기억을 되짚었다.

기억을 떠올릴수록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조민성과 시선을 마주하다 피로를 못 이기고 그대로 품 안으로 안기듯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멋있게 꾸며진 방안은 아무래도 호텔 스위트룸 같았다. 설마 조민성이랑 호텔에 온 건가?!

무슨 짓을 한 건 아닐까 황급히 고개를 내려 내 몸을 확인했는데. 생각해보니 마인화의 반동으로 몸이 작아진 상태였다.

아무리 조민성이 싸이코라해도 이런 어린애한테 손대는 놈은 아닐 테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다. 내 옷들과 칠성이 의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 잠깐, 내 옷이 왜 저기에?

다시 고개를 내려 내 몸을 확인하니. 작아진 나에게 딱 맞는 아동용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설마, 조민성이 나를 갈아입힌 건가…? 그런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미간을 좁히고 있을 때.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황급히 이불로 내 몸을 보호하듯 가렸다.

"어? 깨어났네요?"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조민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과 함께 어디서 본 사람인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최선아 영웅님?"

"어머, 기억하고 계셨군요?"

전에 플라틴에서 조민성을 만났을 때 나를 치료해준 영웅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몸에는 딱히 상처가 없어서 제가 치료할 건 없었어요. 그래서 옷만 갈아입혀 드렸는데 불편하진 않으시죠?"

"아, 괜찮아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조민성이 내 알몸을 본 건 아니구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뭘요. 한 것도 없는데."

웃으면서 컵에 물을 따라 내게 건네주는 최선아에게 허리를 숙이고 컵을 받아 시원한 물을 마시자. 한결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아. 조민성은요?"

"회장님은 밖에 계세요. 지금 만나실 건가요?"

"네…."

고맙다고 얘기해야지. 칠격과 백진희에게서 내 목숨을 구해주고 다치기까지 했는데. 내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었다.

침대에서 벗어나 나를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최선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 쇼파에 앉아 있는 조민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눈을 가리는 붕대와 짧아진 왼팔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보고, 그제야 잊었던 것이 떠올랐다. 조민성이 나를 구하다가 팔과 눈을 잃었다.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을 직시하게 되자.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열심히 태블릿으로 쓰고 있던 조민성은 집중했는지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열심히 펜을 움직였다.

"큼큼­!"

최선아의 헛기침에 드디어 태블릿에서 시선을 뗀. 조민성이 하나만 남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몸은 어때?"

"…좋아."

나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반면에 조민성은 나를 구하려 팔과 눈을 잃었다.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까. 평소처럼 나를 바라보는 조민성의 모습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옷을 만지작거렸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군가 옆에서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동안 침묵한 채 옷만 꼼지락거리며 만지고 있자. 조민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나를 어린아이 다루듯 들어 올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어린애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리 말하며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조민성의 모습에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복잡해진 머릿속으로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다.

귀여운 조카를 바라보는듯한 시선을 보내는 조민성 때문에 압박감을 느끼고 내뱉은 말은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고마워."

"말로만?"

"원하는 게 있어…?"

팔과 눈을 잃은 대가는 무엇으로 치를 수 있을까. 수십억을 준다 해도 플라틴의 회장인 조민성의 성에는 차지 않을 텐데. 또 내 정신을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눈으로 조민성을 바라보자. 내 얼굴이 웃긴 지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 부탁 하나 들어줘.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서."

"정말 그걸로 괜찮아…?"

몸이 작아져서 그런 걸까. 죄책감에 조금 물기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조민성은 내 물음에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옆자리에 나를 앉혀두고는 내 볼을 꼬집듯 쭉 당겼다.

어린아이에게 하듯 약하게 꼬집어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를 정말 애처럼 보는 것 같아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자. 어린아이를 귀여워하듯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괜스레 부끄러워져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앞으로 마인화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 가면이 다시 너를 집어삼킬지 모르니까. 한 번 실패했으니 다음번엔 더욱 기를 쓰겠지."

"나도 알아. 근데…. 어떻게 알고 날 구해준 거야?"

나는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백진희와 내가 오늘 마인을 사냥하러 간다는 건 성현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조민성이 내 앞에 나타나 구할 수 있던 것일까?

"요정왕의 팔찌 때문에."

"아, 어? 내 팔찌 어디 갔어?"

항상 왼 손목에 껴놓고 다니던 팔찌가 사라져 어색하게 보였다. 몸이 작아졌다고 빼놓은 건가?

"용도를 다했으니 파괴됐지."

조민성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상자 위에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녹아버린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저것 때문에 조금은 버틸 수 있던 거니까. 아쉬워는 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드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팔찌가 없으면 또 백진희에게 세뇌당할 수 있겠네…."

"아니, 이제는 그러지 못할 거야."

"…왜?"

조금은 확신하는듯한 조민성의 말투에 의아함에 물었다.

"네 안의 힘이 너무 강해져서. 불가능할 거야."

그 말에 왜인지 수긍이 되었다. 그 마석을 흡수하고 나서 보이지 않던 계약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파훼한 것부터. 백진희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강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내 뒤에 있던 모녀만 아니었다면 백진희에게 전력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녀는 어떻게 됐지?! 조민성의 눈과 팔만 깜빡한 게 아니라 모녀까지 까먹고 있었다. 진짜 난 멍청한 걸까?

갑자기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얼굴을 찡그리자.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다시 내 볼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나쁜 손을 쳐내며 물었다.

"그 집에 있던 사람은 어떻게 됐어?"

"보호시설에 넘겼어. 그런 곳에서 사는 것보다 시설에서 도움을 받는 게 아이한테 더 좋을 테니까."

"그렇구나…."

다행이다. 계약도 파기 되었으니 엄마랑 딸이 사이좋게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김성현 옆에서 떨어지지 마."

"그건…왜에에에?"

결국 내 저항을 뚫고 내 볼을 쭉 당기는 조민성의 행동에 말끝이 볼처럼 쭉 늘어났다.

"백진희를 이길 수 있는 건 김성현밖에 없으니까. 나보다 김성현이 너에게는 제일 안전할 거야. 오늘 백진희에게 했던 방법은 단순한 시간 벌이라 두 번은 통하지 않거든. 그래도 3일 동안은 백진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 볼을 놔준 조민성은 태블릿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다가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돌아가. 나는 할 일이 많아서 먼저 일어날게."

그 말과 함께 조민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왜인지 모르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 괜스레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선아가 내게 검정 상자를 내밀었다.

"응? 이건 왜…?"

내가 쓰던 우리 회사의 휴대폰의 최신형 기종의 상자였다.

"본래 쓰시던 휴대폰이 충격에 박살이 나서 데이터도 옮길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회장님이 새로 휴대폰 하나 준비하라 했거든요. 원래 쓰시던 거랑 같은 걸로 준비했어요."

"아. 고맙습니다."

하긴 온몸의 뼈가 부러질 정도로 마력으로 짓눌렀는데. 휴대폰이 버틸 수가 있을까.

다행히 클라우드에 성현이와 찍었던 사진들과 연락처를 업로드해놔서. 그것들을 다시 복사해서 휴대폰으로 집어넣었다.

"후…."

아무래도 조민성은 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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