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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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허물어진다. 혼돈이 내 안을 침식한다.
백진희를 향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흑색의 섬광이 검의 궤적을 따라 모든 것을 적셨다.
일렁이는 혼돈이 새하얀 빛으로 맞받아치는 백진희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백진희의 몸에 각인된 룬문자와 파훼시킬 수 있는 계약을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움직였다.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백진희의 손에서 날카로운 고드름들이 나를 꿰뚫으려 쇄도했다.
궤적을 예측하고, 가볍게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파훼하자. 기다렸다는 듯 얼음의 파편 사이로 백진희의 검이 내 목을 노리고 검격을 쏟아부었다.
카카가강!
그것들을 모조리 맞받아친 뒤, 검을 휘두르자 충격파로 벽이 무너지며 빌딩이 진동했다.
"꺄아악!"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잠시 검을 멈추자. 백진희가 오른팔을 한 바퀴 돌려 여자의 목을 베려 했다.
찰나의 순간 몸을 뒤틀어 비어있는 왼손에 검을 만들어내 그것을 막아내자. 곧장 마력이 담긴 일격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몸을 회전시켜 칠성으로 일격을 튕겨내자 검은 섬광이 번뜩였다. 그대로 허공에서 멈춰 세운 검을 가속해 휘두르자, 백진희는 무릎을 굽혀 공격을 피하고 몸을 비틀어 공격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나랑 진심으로 싸우고 싶은 거야 아린아?"
순식간에 백진희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칼날 같은 고드름들이 나타났다. 주변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얼어붙을 것만 같은 추위가 찾아왔다.
그 기세에 맞서 내 주변으로 잿가루들이 흩뿌려지며 혼돈이 퍼져나갔다. 지금이라면 내 힘만으로도 백진희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진희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검을 들어 겨냥했다.
"죽인다."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을 옮길 때. 무언가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경계가 무너져 혼돈이 가득한 마음속 어딘가에 무언가 내 정신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급격히 몸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삐걱거리며 요동쳤다. 감정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격류였다.
"오고 있구나."
내 이상 반응에 백진희는 기대감을 간직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쥐고 있던 검을 놓쳤다. 밀어내야 했다. 내 안의 경계를 기어오르는 이것이 정상에 도달한다면 온전히 침식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부림쳤다.
그런데도 그것은 멈추지 않고 기어오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생존 이해력]이 미친 듯이 발동되었다.
검이 없음에도 마인화가 풀리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해력이 가능성을 도출해냈다.
내 얼굴 위의 정체 모를 가면.
그것을 벗어내야 했다. 황급히 가면을 벗으려 했지만, 내 얼굴에 동화라도 된 것처럼 가면과 얼굴의 경계가 사라졌었다. 도저히 손으로는 벗길 수가 없었다.
바닥에 놓인 검을 들어 파훼의 권능을 담아 내 얼굴을 찔렀다. 어떠한 걸림도 없이 검은 끝까지 내 얼굴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통증도, 가면의 파훼도 없었다.
검을 바닥에 던지고 가면을 벗으려 손으로 얼굴을 긁어댔지만, 안개를 손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경계의 끝에서 기어오르던 것이 모든 것을 침식하며 정상에 오를 준비를 끝마쳤다.
기어오르는 것을 밀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자. 내 모습을 지켜보던 백진희가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웃음소리는 점점 방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아왔던 웃음을 이제는 견딜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뒤틀며 웃음을 터트리는 백진희에게서 광기의 잔향이 느껴졌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갑작스레 푸른 섬광이 터져 나왔다.
***
찌는 듯한 더위에 데이트임에도 얼마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토우코와 가까운 빙수 가게로 도망치듯 대피해. 망고 빙수를 사 먹었다.
토우코와 데이트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어젯밤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아직 데이트 한 번 안 한 거 알고 있냐는 토우코의 물음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곧장 데이트 약속을 잡게 되었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게 많았는지 망고 빙수를 먹으면서도 쉼 없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을 설명하며 내게 의중을 묻는 토우코의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자.
근처에 있는 복합쇼핑몰을 설명하던 토우코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부끄러워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귀여워서."
능글맞은 대답에 얼굴이 빨갛게 변한 토우코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갑자기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귀여우면 뽀뽀…!"
부끄러워하면서도 챙길 건 챙기는 토우코의 모습에 웃음을 흘리며, 턱을 잡아당겨 부드럽게 입술을 맞췄다. 이 입맞춤이 토우코에게 달콤한 추억이 되길 원하면서.
섹스와 3P까지 해놓고서도 아직 뽀뽀만으로도 귀까지 새빨개지는 토우코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옆자리로 건너가. 토우코를 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엣. 갑자기 스킨쉽은…!"
"가만 있어 봐."
어차피 구석진 곳이라 주변의 시선이 닿지도 않았고 커플들끼리 카페에서 이 정도의 스킨쉽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 품에 안겨 부끄러워하면서도 손을 꼼지락대며 내 배를 만지던 토우코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왜 섰어요?"
묘한 색기가 묻은 목소리로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발기한 자지를 조심스레 손끝으로 툭툭 건들며 물었다.
"하고 싶어서."
내 솔직한 대답에 토우코는 내 품에서 민망함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나랑 막…. 하고 싶어요?"
"응. 엄청 사랑해주고 싶어."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토우코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어 귀엽게만 보였다.
"토우코."
이름을 부르자. 부끄러웠는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는 모습에 손을 붙잡자 토우코는 그제야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말해. 강제로 할 생각은 없으니까. 싫은 건 싫다고 좋은 건 좋다고 내게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내 말을 들은 토우코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는지 손부채질을 하면서도 무언가 망설이는듯한 기색으로 내 눈치를 봤다.
갈팡질팡하듯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망설임을 달래더니, 무언가 결심했는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콘, 콘돔 끼고 해요! 피임약은 몸에 안 좋다니까…."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켜내고,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했다. 무슨 말을 할까 했더니, 피임 얘기였다니. 그 정도는 결심까지 할 필요도 없이 내게 얘기만 해준다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것인데.
"당연하지. 그리고 그런 건 그냥 얘기해도 돼. 토우코는 이제 내게 소중한 사람이잖아."
"에, 엣…."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없어요!"
내 반응에 안심한 듯 히죽히죽하며 토우코의 입술이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내 여자 중에서 리치인 레이나를 제외하고,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도 귀엽고 애교 넘치는 토우코가 너무 사랑스러워 양쪽 볼을 살짝 꼬집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감촉이 꼭 찹쌀떡 같았다. 쭉 늘어난 볼을 아프지 않도록 애정을 담아 살살 흔들다가 놓아주자 탄력 있는 볼살이 살짝 빨개진 것 빼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파!"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며 내 품 안으로 파고드는 토우코의 내숭을 못 이기는 척 받아주며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문득 정말로 많은 것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린이와 사귄다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던 소년이. 이제는 자신에게 헌신하는 미녀들을 옆구리에 끼고 매일 같이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고 있다.
심지어 여자들을 속이고 몇 다리를 거치는 것도 아니었고, 몇 번은 같이 잠자리를 갖기도 했으니. 그 어떤 수컷도 지금의 상황에서 어깨가 으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는 여자들.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는 요즘이 가끔은 환상이나 꿈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내 품 안에 안겨있는 토우코의 따스한 온기와 향긋한 향기, 작게 느껴지는 심장의 울림이.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게 해준다. 행복하다. 너무나도 불안하게.
아린이를 완전히 공략한다면, 이 불안함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러 갈까요…?"
내 품에서 부끄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어보는 토우코에게 괜스레 장난기가 솟았다.
"뭘 하러?"
놀리고 싶다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짐짓 모른 척 물어보자, 품속에 있던 토우코가 몸을 움찔하더니 내 배를 꼬집었다.
"아야!"
"장난친 대가에요!"
품 안에서 삐진 척을 하며 흥! 흥! 거리며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는 토우코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린이도 사랑스러웠지만, 토우코는 뭔가 적극적이면서도 부끄럼을 타는 상반된 모습이 매력이었다.
"미안, 너무 귀여"
무언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워, 순간 말이 끊어졌다.
그건 몇 번이고 봐왔던 아린이의 상태창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