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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28화 (128/160)

〈 128화 〉 혼돈

* * *

백진희의 서늘한 시선에 방바닥에 뒹구는 검을 얼른 다시 주웠다. 순진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애가 정말로 마인이 맞는 것일까.

"마인이…. 확실해?"

내 물음에 백진희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연히 마인이 확실하지.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애새끼 하나 죽이자고 너를 데려왔을까 봐?"

"그, 그렇지만…."

아이다. 그것도 4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아이. 그런 아이를 마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죽여야 한다고…?

"저 아이가 사람을 몇 명을 죽였는지 알아?"

다그치듯 내게 물어보는 백진희에게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6명이야."

백진희의 말에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저런 작은 아이가 6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아, 아니에여 우리 애는 아무도 앙주겨써요!"

어눌한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하는 여자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피하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역력한 모습에 거짓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엄마…."

엄마의 반응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여자의 등에 달라붙었다.

"저 애가 왜 마인이 됐을까?"

백진희의 물음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즐거운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백진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빠르게 머리를 돌려 가장 가능성 있는 추론을 내놓았다.

"엄마를 지키기 위해?"

"맞아. 정답이야."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백진희는 입을 열었다.

"이 여자는 지능에 장애가 있어. 그래서 남자들에게 노려져서 노예처럼 팔며 살다가 덜컥 아이를 뱄지. 여느 때처럼 남자들은 아이를 낙태시키려 했지만, 이 여자는 도망친 거야. 아이를 지키려고."

백진희의 말이 계속될수록 여자는 삐쩍 말라 살가죽밖에 없는 팔을 가려운지 긁어대며 연신 불안한지 눈치를 봤다.

"아이가 태어났고 남자들은 여자를 찾았어. 여자를 괴롭히고 고문하고 다시 몸을 팔게 했지. 남자들은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고 아이는 몇 번이나 아사할 뻔했지만 엄마의 정성으로 자라날 수 있었어. 그리고 아이가 3살이 되었을 때 술에 취한 남자들은 아이에게 손을 대려 했고. 그것을 막으려던 여자가 얻어맞는 것을 본 아이가 「염원」을 담아 빌었어. 엄마를 구해달라고."

구역질이 올라왔다. 저런 어린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미친놈들이 있다니. 그런 쓰레기들에게서 엄마를 구하려 마인이 된 아이를 마인(?人)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침 어린 여자애를 좋아하는 마족 하나가 그 염원에 닿았고. 5살이 되기 전에 잡아먹기로 계약을 하고 자신의 힘을 주었지. 그 힘으로 아이는 자신의 엄마를 괴롭히는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어."

"5살이 되면 죽는 거야…?"

"맞아. 곧 마족에게 죽을 운명이지. 그 전에 우리가 사냥하면 마족에게 갈 마석도 빼앗을 수 있는 거지."

나는 백진희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죽을 운명인 아이니까 동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 하지만 이 불쌍한 아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성장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아린아? 살고 싶으면 남을 희생시키는 게. 당연한 거잖아."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백진희는 비웃는듯한 미소를 지으며 놀리듯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분노를 참아보려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에 깃든 불안함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싫다. 남의 목숨을 빌어 내 목숨을 이어가는 삶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 아이는 곧 죽을 텐데? 오늘 죽지 않는다 해도 결국 고통스럽게 마족에게 온몸을 찢겨 요리 당할 거야. 오히려 지금 죽이는 게 자비일 수 있어."

나는 입을 다물고 백진희를 노려봤다. 만약 내 끝이 고통스럽다 해도 나는 성현이와 하루라도 더 있고 싶어 할 것이다.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나는 아이를 죽일 생각이 없다.

"불쌍하게 느껴져? 그냥 모르는 아이잖아. 살고 싶다고 성장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하던 건 금세 잊어버렸나 보네."

"이건…. 달라."

"다른 건 없어 네가 위선을 부리고 있다는 거 빼고는."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백진희에게 고성을 내지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백진희는 내게 한걸음 다가와 서늘한 손으로 내 목덜미를 강하게 붙잡았다.

들끓던 분노가 서늘한 손길에 식어갔다. 지금 이곳에서 손짓 하나로 모두를 죽일 수 있는 건 백진희였다.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나에게 백진희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이 아이를 구할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해."

"…뭐?"

떨리는 심정으로 되물어봤다. 이 불쌍한 아이를 구할 방법이 있다고…?

"네 능력으로 마족과의 계약을 [파훼]하면 되잖아?"

"그게 가능할 리가…."

내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고는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에서 흰색의 마나가 눈처럼 흩뿌려지더니, 무언가 강한 빛이 터져 나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빛이 사라지고 눈을 뜨자. 백진희의 손에는 여태까지 본 적 없는 크기의 거대한 `마석`이 짙은 어둠을 내뿜고 있었다.

그 마석을 본 찰나의 순간 [생존 이해력]이 미친 듯이 발동하여 나는 지금 이 상황이 함정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저 마인을 살리고 싶으면 이 마석을 흡수해서 성장해. 이것만이 저 불쌍한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손을 뒤집어 마석을 바닥에 떨어트린 백진희는 묘한 미소와 함께 내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궁금하네. 위선을 떨지 본성을 드러낼지. 다시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불쌍한 인간까지 죽이고 싶은 게 아니면."

그 말과 함께 백진희는 나를 두고 문을 닫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쥐고 있던 검을 떨구고 나는 무너지듯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마석을 바라보니 [생존 본능]이 미친 듯이 경고를 보냈다.

이건 잘 짜인 함정이었다. 백진희는 내가 마석을 흡수하길 꺼리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양자택일의 상황에 밀어 넣은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검을 쥐고 의념을 집중했다. 혹시 지금의 마인화 능력으로도 계약을 파훼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았지만, 내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권능]을 사용했지만 내 육안으로는 파훼할 대상이 보이지 않았다.

"딸, 딸을 해치지 마세요…."

"엄, 엄마 울지마…."

내게 살려달라고 울며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손을 비비는 여자와 그런 엄마의 모습에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에 등에 몸을 숨겼으면서도 엄마를 걱정하는 딸의 모습에 나는 짙은 동정심을 느꼈다. 불행한 인생에서 겨우 찾아낸 한 줄기의 빛을 내가 뺏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빛은 내가 아니라면 결국 어둠에 삼켜질 운명이었다. 그 운명을 파훼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밖에 없다.

바닥에 놓인 마석이 내게 묻는 듯했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심연`의 어둠에 빠질 각오를 할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지.

생존 본능은 계속해서 내게 경고를 보냈다. 저 마석을 흡수하면 사랑하는 성현이를 잃을 수도 있다고. 백진희와 신재호가 성장하는 걸 원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냐고.

생판 모르는 남이었다. 누군가를 죽일 생각으로 검을 들고 각오에 임한 채 나왔지만 내가 생각했던 마인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마음속으로 나는 사람을 해치는 마인은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며 살인을 정당화하려 했다.

하지만 무슨 상황인지 이해도 못 한 채 자신의 엄마가 슬퍼하자 덩달아 슬퍼하며 우는 아이에게 내가 어떻게 검을 들이밀 수가 있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한다 해도 결국 나는 어떻게든 성장하게 될 운명이었다. 초월 아카데미의 최종 보스. 차성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기르던 마족.

이런저런 말보다 단순히 저 모녀를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컸다. 그것이 주제넘은 동정인지, 설익은 위선인지는 모르나.

나는 마석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놨을 뿐인데 느껴지는 강렬한 악의(??). 온몸이 떨려왔다. 그런데도 나는 마석을 흡수했다.

내가 괴물이 되는 게 운명이라면 나를 쓰러트릴 건 성현이의 운명이었다. 내 목숨을 가져가는 게 성현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

마인화를 유지한 채 마석을 흡수하자. 혈관을 타고 격렬한 불씨가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내 안을 파고드는 격렬한 힘에 주위의 공기가 공명했다.

혈관 안을 타고 흐르는 피들이 뜨겁게 들끓듯 한 착각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전신의 뼈와 근육을 망치로 짓이기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검을 바닥에 박아 몸을 지탱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며 뒤틀리며 몸에서 괴기한 소리가 울려댔다.

끄드드드득──! 우드드득──!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려댄다. 받아들인 마석의 힘이 억지로 심장을 늘려 찢어냈다. 갈비뼈가 부서지고 뼈가 폐를 찔렀다.

척추에서 무언가 흘러 내리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장기들이 제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고 녹아내리고, 터지고, 찢어져 버린다. 온몸의 신경을 짓누르는듯한 참기 힘든 격통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격통이 끝나고 내 주변에 잿가루가 흩뿌려졌다. 그것을 마치 눈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아이의 몸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끈처럼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 육안에 들어왔다.

검을 들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자기 딸을 지키려는 여인을 가볍게 밀쳐내고 아이에게 검을 겨누었다. 검게 변한 검 위로 붉은빛이 감돌았다. 자연스레 나는 아이의 계약을 이해했고 [파훼]하는 법을 찾아냈다.

이상을 감지했는지. 아이의 몸을 휘감던 글자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살이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소리와 함께 아이의 뒤에서 흑색의 검은 팔이 내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그런데도 나는 피할 생각도 없이 가볍게 검을 쥐고 휘둘렀다.

검게 물든 칠성이 붉은 꼬리를 남기며 눈앞의 모든 것을 [파훼]했다. 나를 향해 쇄도하던 검은 팔은 일격에 형태를 잃고 무너졌고. 아이의 몸을 휘감던 글자에 검 끝이 닿자. 아이의 몸에서 방 안을 가득 채우듯 마기가 방출됐다.

닿는 순간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이며 녹아내리는 마기. 검은 곰팡이가 핀 벽은 마기에 닿자마자 녹아내렸다. 내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지만 나는 쓰러져 있는 여자를 위해 검을 허공에 휘둘러 마기 자체를 [파훼] 시켰다.

조금 전 일이 환각이라도 된 것처럼 방안은 조금 녹아버린 벽을 제외하고는 전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몸 상태를 확인했다. 계약이 완전히 [파훼]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아이를 일으켜 엄마의 품에 안겨줬다.

심장에서 촉발된 감정이 온몸을 자극했다. 고개를 내려 변한 내 모습을 확인했다. 입고 있던 옷은 어디로 갔는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깊은 충족감이 내면에서 차올랐다. 나는 또다시 나를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겨냈다. 온갖 감정들이 울컥 치솟았다. 마음속의 경계를 부수며 감정들이 범람했다.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뒤섞이며 혼합되어 이제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그 덩어리의 이름을 나는 왜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혼돈」

그것은 자연스레 형상화되어 내 얼굴 위로 가면을 만들어냈다. 가면 위로 혼돈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가면에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구멍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모든 것을 느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적응할 필요도 없이 으레 그렇듯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나를 두려워하는 모녀를 내려보지 않았다. 내 가면을 직시한다면 필시 광기에 빠질 것을 알았으니까.

몸을 돌렸다. 드레스가 요동치며 짙은 어둠을 머금은 전신 갑주로 변했다. 검을 들고 내 안에서 솟구치는 마기를 검에 집중시켰다. 악의{??)를 형상화한 듯한 검격(??)이 문 뒤의 존재에게 향했다.

문이 무너지며 그 뒤로 검격을 맞받아친 존재가 선연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주변을 하얀빛으로 물들여 갔다.

하얀 마력이 공간을 우그러트렸다. 그 사이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백진희가 한 발자국 내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이 세계의 재앙아."

혼돈의 가면을 직시하며, 백진희는 그동안 본적 없던 환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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