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생존 이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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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틴의 회장실에서 나는 조민성과 만났다. 회장실 안에는 온갖 유물들과 무기들이 자랑이라도 하듯 전시되어 있었다. 수십억을 넘을 유물들을 유리관 안에 전시하고 있는 모습은 플라틴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지. 얼마나 대단한 기업인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나열된 값비싼 유물들을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바라보자. 조민성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조민성을 바라보니, 묘한 미소와 함께 찻잔을 들어 향긋한 차를 마시는 조민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괜스레 들뜬 모습을 보인 게 아닌가 부끄러워져. 헛기침하며 이름 모를 비서가 내온 차를 마셨다.
"저번에 내가 준 차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신다라…. 발전이 없는 건가 아니면 겁이 없는 건가?"
비웃는듯한 말을 내뱉은 조민성을 보며 나는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며 음미하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믿는 거야. 파트너니까."
내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비웃는 듯한 표정 그대로 한 방 맞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조민성은 한참 뒤에야 어이없는 듯한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쳤구나. 내가 너한테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데."
"정말로 위험했다면 나를 속이려 하지. 자신이 위험하다고 경고하지는 않았을걸."
내 대답에 조민성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팔로 턱을 괴더니 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뭐가."
"…날 싫어하잖아."
이상하게도 조민성의 그 말을 듣자 조금 화가 났다. 당연히 조민성이 내게 한 짓들을 떠올리면 싫어하고 화내는 게 정상인데. 어째서인지 저 말에 반발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네가 날 싫어하는 거지."
"…맞아. 난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거든."
조민성의 말에 나도 모르게 풋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어?"
도저히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조민성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참아내고 말했다.
"백진희나 신재호나. 다들 나를 억지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 난리를 치는데. 유일하게 너만 나에게 불행하라고 말해줬으니까."
내 말에 침묵하며, 나를 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조민성의 시선에 나는 말을 이어갔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사람들은 못 믿겠는데. 내가 불행했으면 좋겠다는 사람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웃었어."
"실연이라도 당한 게 아니면 미친 거네."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분명 목숨을 베팅한다며 떨리는 마음으로 플라틴의 본사까지 찾아온 건데. 어째서 조민성의 앞에서 이리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일까.
"혹시 나를 만나자고 한 게 연애 상담이나 이별에 대한 어쩌고저쩌고 얘기면은 난 할 말 없어."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연애 상담은 왜 안돼? 너 인기 많잖아."
"난 약혼자가 있거든. 그래서 연애는 안 했어."
그 말에 조금 놀라웠다. 항상 여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조민성이 여자 경험이 없다니. 거기에 약혼자가 있다는 말은 영또플에서도 나온 적이 없던 것이라 흥미가 생겼다.
"약혼자? 누구인데?"
"…있어. 옛날에 결혼하자고 매일 같이 강요한 멍청이가."
더는 말하기 싫은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조민성에게 더 추궁하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지만.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미간을 좁히며 `얼른 본론이나 말해!`라고 얼굴에 써놓아서 본론을 말했다.
"나를 도와줘."
"네가 불행하길 원한다고 아까 말한 것 같은데. 그새 잊은 건 아니지?"
"알아. 거래하면 되잖아."
조민성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 앞에 손을 흔들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이게 몇 개로 보여?"
"두 개. 그리고 나 정상이야."
"김성현이 부탁이라도 하든? 내 머리로는 네 행동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내 의지로 너를 찾아왔어. 백진희 신재호. 그 둘을 막으려면 네 힘이 필요하니까."
관찰하듯 나를 바라보던 조민성은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게 있기나 할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최대한 조건에 맞게 노력할 테니까."
그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조민성의 얼굴에는 뱀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뭐든지?"
"응. 내 몸을 원한다 해도 들어줄게. 약속만 지킨다면."
조민성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조민성이 내 몸을 원할 리 없다는 생각에서 크게 베팅한 것인데. 상대방의 반응이 내 예상과 달랐으니까. 정말로 내 몸을 원하는 건 아니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참을 나를 노려보던 검은 눈동자는 이내, 조금의 흥분을 담아냈다.
"내가 원하는 건 네 몸이 아닌데."
부정적인 말에도 그 목소리에 담긴 즐거움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거짓말. 내 전부를 준다 해도 싫다는 거야?"
"아니, 전부가 아니잖아. 몸이 아니라 정신을 준다면 생각해볼게."
침묵이 찾아왔다. 조민성과 내 시선이 말없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몸이 아닌 내 정신을 원한다는 그 말. 백진희처럼 나를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려는 걸까.
큰 실망이 찾아왔다. 조민성이라면 조금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모를 배신감에 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
"나를 또 세뇌하고 싶어? 아니면, 백진희처럼 억지로 나를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 이어지게 만들고 싶은 거야?"
흥분을 참지 못하고 조민성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흥분을 달래려 한숨을 내쉴 때, 조민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또 세뇌라…. 그래, 그래서 네 정신을 원하는 거야."
"무슨 소리"
"네 심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너를 도와줄게."
내 말을 끊은 조민성의 말은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상을 확인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너를 세뇌하거나, 네 몸뚱이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단지, 알고 싶을 뿐이야."
"무엇을?"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내게서 시선을 고정한 채 조민성은 다소 복잡한 얼굴로 자기 이마를 긁더니 손을 내밀었다.
"플라틴과 차성. 이 둘이 거래할 때는 항상 한쪽이 손해를 봐야 한다고 말했지. 그래도 내 도움을 원해?"
마치 선심 쓰듯이 말하는 조민성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도움이 간절한 건 나였다. 조민성이 내게 내민 손에 내 손을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에서 푸른 마나로 이루어진 끈들이 나타나 붙잡고 있는 팔을 묶었다.
"잠깐 자고 일어나면 끝■■■…."
조민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몽롱한 정신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확인하니. 창문 밖이 어둑해진 게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았다.
잠들어 있던 나를 위해 소파로 옮겨준 것일까. 테이블이 아니라 소파에 누워있던 내 곁에 조민성이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깨어났어?"
"…응."
"그럼 돌아가."
다짜고짜 축객령을 내리는 조민성에게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뭘 봐`라는 시선으로 마주하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그래서 나 도와주는 거야?"
"…아니."
"뭐?"
"안 도와줄 거야."
이 미친 사기꾼 새끼. 심상을 확인하면 도와준다더니 확인하니까 이제 와서 말을 바꿔? 화가나 조민성에게 무어라 쏘아붙일 생각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야이 사기"
"다음 주."
조민성이 가차 없이 내 말을 끊었다. 무언가 절묘하게 내가 화낼 타이밍을 끊어버린 조민성 때문에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던 게 부끄러워져 슬며시 손을 내렸다.
"다음 주 뭐."
"다음 주 토요일에 차성에서 파티가 열려. 네 아빠가 주관하는 파티. 참석하지 말고 김성현 옆에 붙어 있어. 그게 이번 거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진지한 조민성의 말에 나는 따지려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게."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 나갈 생각을 했다. 문득 드는 생각에 뒤를 돌아 복잡한 얼굴을 하는 조민성을 바라보니.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조민성이 고개를 들어서 나와 허공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조민성에게서 생존 본능이 보내는 경고를 느낀 적이 없다는 것을. 심지어 성현이에게도 생존 본능이 경고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도대체 넌 뭐야."
푸른 마나 살인귀라는 악명을 가진 김성현의 라이벌이자 열등감의 원인. 세계관 최고의 잠재력을 가진 천재 마법사. 그런 것들보다 신아린이 갖고 있던 신뢰와 동정심. 그리고 금제 속의 신아린이 외친 파트너라는 단어. 조민성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네…파트너."
퉁명스러운 목소리 밑에 깔린 미묘한 감정이 내 마음을 간지럽게 했다.
***
다음 날. 약속했던 대로 백진희와 나는 마인을 사냥하기 위해 만났다.
오늘의 약속 장소는 아카데미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신산동이라는 곳이었다.
"안녕, 아린아."
"응. 안녕 진희야."
데이트를 나오듯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백진희는 카페 안에서 비현실적인 외모로 주변의 시선을 모조리 끌어모으고 있었다.
"마인 죽일 준비는 됐어?"
어디 놀러 가자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죽일 준비가 끝났냐는 백진희의 물음에 나는 긴장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어."
"그럼, 가볼까?"
카페에서 벗어나 백진희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따라가자. 주택지가 모여 있는 골목으로 들어오게 됐다. 빌라들과 골목마다 있는 편의점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의 모습이었다.
"아린아, 사람이 어떻게 마인이 되는지 알고 있어?"
갑작스러운 백진희의 질문에 나는 기억나는 대로 대답했다.
"악마와 계약하거나, 악마의 피를 마시는 거 아닌가?"
"맞아. 마인은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마족에게 받치는 일종의 계약이야. 그 대가로 이 세상에 넘어올 수 없는 마족의 노예가 되어 주인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마인이 되는 거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차성의 공장에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마인으로 만드는 것일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일까. 아니면 피를 강제로 마시게 하는 걸까?
"왜 사람이 마인이 된다고 생각해?"
백진희의 맥락 없는 물음에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냐는 듯이.
"힘을 얻고 싶어서겠지."
그러나 백진희는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염원」그것은 꼭 힘만 있는 것이 아니야 아린아."
그렇게 말하며 백진희는 어느 허름한 빌라 앞에 멈춰 섰다. 바퀴벌레로 보이는 것이 사람의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며 이리저리 도망치는 모습에 저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계단을 타고 내려온 백진희는 자연스레 집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자 환기를 시키지 않은 건지 벽지 대부분이 곰팡이가 펴. 방안이 검게 보일 정도였다. 퀴퀴한 냄새와 바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벌레들에 경멸이 일었다.
"네 말대로 힘을 얻고 싶어서인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 살고 싶다는 같은 염원으로 마인이 된 사람도 있어."
그 말과 함께 백진희가 옆으로 걸음을 옮겨 내게 방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4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무척이나 말라 영양실조가 의심될 정도의 여자가 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며 아이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사, 사여주세요."
여자가 말을 할 때 입안의 치아가 모두 검게 썩어 있는 것이 보여 나도 모르게 눈매를 찌푸렸다. 더러운 집안, 양치를 전혀 하지 않는 듯한 모습. 이 사람이 마인인것일까.
"마인 사냥할 준비가 됐다고 했지?"
"그래."
살기 위해서는 눈앞의 여자를 죽여야만 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그나마 사람을 해하는 마인을 죽인다는 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허리에 찬 칠성을 뽑아 여자에게 겨냥했다. 정비를 마친 칠성은 기름칠까지 해 스스로 예기를 뿜어낼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 끝이 자신을 향하자 여자는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요, 요서해주세요…."
그 간절한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마인. 내가 죽여야 할 동족이자. 괴물이었다. 어금니를 깨물고 다가가자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아이를 보호하려는지 팔을 펼치는 여자의 모습에 동정심이 훅하고 내 마음을 흔들었다.
여자를 겨냥한 검 끝이 미치도록 요동친다.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내 생존을 위해 죽이려 한다. 나를 위협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을 본 적도 없는 여자를….
어금니를 악물었다. 상대는 마인이다. 동정할 가치가 없는 마인. 팔을 높이 들다 천장에 검 끝이 닿아 멈춰 섰다.
눈앞의 여자는 마인이면서도 누군가의 엄마였다. 등 뒤의 꼬마는 나 때문에 자신의 엄마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대로 누군가가 나를 말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마인이라 해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백진희가 손을 들어 나를 막아섰다. 고마운 마음에 백진희를 바라봤다.
"아린아 저 여자는 마인이 아니야. 네가 죽여야 할 건 저 여자의 딸이야."
백진희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와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여자의 표정이 서서히 무너졌다. 등 뒤의 여자아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여자의 뒤에서 얼굴을 빼. 순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엄마는 놔두고 딸을 죽여."
그 서늘한 목소리에 여자는 자식을 지키려는 비명을 내질렀고, 나는 그만 검을 떨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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