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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25화 (125/160)

〈 125화 〉 어르스름

* * *

유지아를 공략하고 1주일이라는 시간이 수확도 없이 지나버렸다. `공장`에 대해 알아본다던 유지아는 깜깜무소식이었고 우리는 할 수 없이 훈련에만 매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나는 백진희와 매일 실전과 같은 대련을 했고. 성현이는 가디언즈의 일원에게 접근하려 노력했다. 웃기게도 유지아를 공략하러 모인 이후. 나는 성현이랑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

다른 여자와 잤다고 삐졌거나 실망해서 그런 게 아니라. 훈련이 끝나면 곧장 씻고 잠들어 버릴 정도로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어서였다.

칠격의 습격이 있던 날 이후,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지금의 평온이 폭풍전야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영또플에서 정상적으로 흘러야 할 2년이라는 시간이 앞당겨진 상황. 그 말은 소설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고. 피날레를 장식하는 건 최후의 빌런인 `나`일 테니까.

최후의 히로인과 빌런을 담당하는 나의 [큰 흐름]은 어떤 것일까. 그것에 고민이 요즘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성현이와 대립하다 공략당해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성현이의 손에 공략당해 죽는 것이 운명일까.

부정적인 고민을 할 시간조차 더는 없다. 이를 악물고 온몸이 떨려와도 검을 휘두르며 성장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단순히 백진희와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나는 과거의 신아린이 쌓아놓은 전투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단순하다고 말하기에는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목이 몇십 번 베여져 그 여파로 `갈증`이 찾아와 마석을 2개나 흡수할 정도였지만.

일주일 만에 나는 백진희와 대련다운 대련을 할 정도로 미친 듯한 성장을 했다. 성장이라는 말보다는 과거의 힘을 복구 또는 수복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고 봐야 했다.

이제는 검의 무게중심을 잡는 법부터 공격하고 난 뒤 검을 회수하는 요령, 전투에서의 센스 같은 것들도 자연스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백진희는 단순히 라이벌이라는 설정 때문에 자신에게 맞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어겨 내 성장에 대해 의심을 하진 않았다.

"오늘 훈련은 여기서 끝."

검 면을 따라 내 목을 베고 지나간 백진희의 검에. 내 목에서 터져 나오듯 흘러나오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내가 과거의 힘을 되찾았다 해도, 백진희에게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실전과 같은 대련을 하면서 상대방이 죽지 않을 정도의 상처만 주는 것 자체가. 백진희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는 것이니까.

거기에 백진희는 마법이라는 무기까지 사용할 수 있다. 원거리부터 근거리까지 엄청난 실력을 가진 다재다능한 괴물. 내 힘만으로는 백진희를 이길 수는 없으나,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성현이와 한서아, 레이나, 토우코까지. (유지아는 비전투 영웅이니 제외) 성현이의 능력 덕분이지만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생겼다. 그래서 더욱 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니어도, 내가 없어져도.

내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은 성현이의 곁에 있으니까.

성현이에게 공략당해 세상을 구하고 죽거나, 이 소설의 결말을 보았을 때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다거나.

그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목에 들이붓고, 피에 젖은 훈련복을 벗어 던지고 물에 젖은 수건으로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낼 때. 백진희가 다가와 내 손에서 수건을 가져가 손이 닿지 않는 등을 닦아주었다.

"이제 어느 정도 훈련의 성과가 나타났으니까. 내일은 직접 마인을 사냥해보자. 네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래."

백진희와 마인을 사냥한다. 사냥이라기보다는 게임에서 고인물이 뉴비에게 강제로 쩔해주는 것이라고 봐야 옳다. 마석으로 성장하고 싶지 않지만, 백진희는 억지로 마인의 시체에서 마석을 끄집어내 나를 성장시킬 것이다.

내가 거부한다면 팔다리를 잘라 강제로라도 흡수하게 할 수 있는 게 백진희였다. 그렇다면 순순히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준비할게."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백진희의 모습에 생존본능이 날뛰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낼 수 있었다.

***

백진희와 헤어지고 지친 몸으로 방으로 돌아오자, 나를 반기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토우코였다. 귀여운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전형적인 일본 아이돌중의 외모와 밝음을 담당하는 리더 포지션 같은 미녀.

"엣! 아린씨 어서 와요! 당근 케이크 사놨어요. 얼른 드세요!"

당황스러워하며 토우코에게 팔을 붙잡힌 채 방 안으로 들어가자. 나를 기다렸는지 성현이와 다른 여자들 모두 케이크를 먹으며 바닥에 앉아 있다가 나를 돌아봤다.

"왔어 아린아?"

오늘 모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기에, 꿈을 꾸고 있나 눈을 끔뻑거릴 때 들려오는 성현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왜 다들 여깄어?"

"비밀 얘기하기에는 여기가 제일 좋다고 생각해서…. 어차피 너 오는 것도 기다려야 하니까. 미안 너한테 미리 허락받았어야 했는데…."

성현이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저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속 좁아 보이잖아.

내 팔을 붙잡고 있던 토우코가 바닥에 앉으며 칭찬하듯 말했다.

"아린씨 방 넓어서 좋아요!"

"언니, 욕하면 안 돼."

"에? 욕 안 했는데…. 죄, 죄송해요!"

유지아의 장난에 당황스러워하며 사과하는 토우코에게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주고, 씻지 않아 냄새가 날까. 황급히 속옷을 챙긴 뒤, 씻고 나온다고 말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원래 계획은 샤워하고 잠시 낮잠을 잔 뒤, 성현이와 간만에 저녁 식사를 같이하려 했었는데 계획이 어긋나버렸다.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자기들끼리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웃고 있는 모습에 무언가 기분이 묘했다.

비어있는 토우코의 옆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산 당근 케이크를 얼른 맛보라며 내주는 토우코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한 입 먹었다.

"맛있네…."

"그쵸! 제가 2시간이나 웨이팅해서 겨우 구매한 거에요! 여러분들에게 이 맛있는 케이크를 소개해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열심히 자신이 산 케이크를 자랑하는 토우코의 모습에 어떤 마음인지 공감이 되었다. 자신만 아는 재밌는 소설이나, 음식 같은 걸 남들에게 공유해서 즐기는 것을 보는 재미.

자신에게 이득이라고는 만족감 정도의 감정일뿐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입소문을 타고 흥하는 소설이나 영화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정말 맛있어요. 토우코씨 고마워요. 다음에는 제가 사 올게요."

그런 사람에게는 별말 필요 없이 담백한 감상과 함께 고마움을 표현해주면 된다.

"헤헤헤."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며 내 반응에 만족스러워하며 몸을 배배 꼬는 모습이 나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무척이나 귀여웠다.

오렌지 주스와 함께 케이크를 먹고 난 뒤. 한서아와 유지아가 뒷정리를 했다. 의외로 한서아와 레이나를 제외하고는 우리끼리 다툼은 없었다.

내 선언 때문인지 단순히 성현이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나. 뒤늦게 합류한 유지아까지도 그냥 성현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해서. 정치질로 머리가 아픈 일은 없었다.

"오늘 모인 이유는 유지아가 조사한 정보를 모두에게 공유하려고 모인 거야."

성현이의 진지한 목소리에 조금 소란스럽던 방 안의 분위기가 진지하게 변했다. 확실히 여러 사람을 만나서 그런 걸까. 성현이는 전보다 자신감도 넘쳤고 암컷들을 다루는 우두머리 수컷 같은 리더쉽도 생겼다.

"흠흠! 일단 차성에 대해 조사해봤어요. `공장`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며 플라틴과 엄청난 금액의 마석을 거래하는 것도 알아냈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아직 잡지 못했어요. 보안 시스템도 엄청나기도 하고 해킹을 대비한 시스템을 구축해서 알아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어요."

유지아의 말에 나는 무심코 조민성이 떠올랐다. 나를 구하면서 일부러 차성과 결탁한 게 자신이라고 말하던 것.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런 말을 꺼내 칠격을 자극할 이유가 있었나 싶었다.

"…대신에 이상한 점을 하나 찾을 수 있었어요. 플라틴이 지금 엄청나게 자금을 소모하고 있어요. 플라틴의 유물창고를 개방해 자금을 끌어모아 미친 듯이 마석을 사들이고 있어요. 대부분은 차성에서 구매하지만, 암거래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마석들을 모으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포션을 만드는 것에 차질이 있을 정도라는 말이 돌고 있더라고요."

유지아가 우리에게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며 플라틴의 보유한 마석의 추정치를 보여주자. 다들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조민성이 마법사라고 해도 그만한 마석을 모을 이유는 없어.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저 마석을 나쁜 쪽으로 사용한다면…. 아예 이 세계가 끝나버릴지도 몰라."

"에엣. 혹시 최근에 마인 방어 시스템을 만든다고 마석을 사용해서 그런거 아닐까요?"

토우코의 말에 성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방어 시스템을 점검하러 나도 갔는데 마석이 엄청나게 사용되긴 했지만, 이 추정치의 반 정도밖에 안되었어. 즉, 반은 어디론가 사라진 거지."

성현이의 말에 다들 침묵에 빠졌다. 도대체 조민성은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왜인지 나는, 조민성을 믿고 싶다는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나를 구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 감정이 아닌, 아주 오래된 조민성을 향한 신뢰 같은 것이 내 마음속에 있었다.

"…조민성에 대한 조사는 끝났나요?"

따로 성현이를 통해 유지아에게 조민성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만약 조민성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 아주 작은 확률이지만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면. 그보다 강한 동료를 얻기란 힘들었으니까.

"아. 그게…. 기록이 전부 삭제되거나 기말처리되어서 문서로 보관돼있더라고요."

"네?"

"`푸른 마나 살인귀`라는 호칭이 붙은 이유에 대해서도 마법사 협회에도 특급 기밀처리로 남아있어서 알아낼 수 없었어요. 마법은 해킹할 수 없어서…."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눈치를 보는 유지아에게 황급히 고생했다고 말하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살인귀`라는 악명과 같은 호칭을 하고 있으면서도, 조민성은 범죄자가 아니었다.

내 기억 속에 남은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 때문에 그 호칭에 대한 사연을 알게 되면 조민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정도로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직접 조민성에게 듣는 게 아니라면…. 나라면 조민성에게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아니면, 거래를 통해서라도….

"아린아."

나를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성현이를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조민성에 관한 이상한 생각은 그만둬. 그놈은 그냥 미친놈이니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성현이는 경고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고 있어…."

문득 성현이가 내 생각을 읽는 건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몇 번 성현이는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읽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그 웃긴 망상에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영또플을 몇 번이나 정주행한 내가 상태창에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공략 대상의 섹스에 관한 것이나 스탯창, 재능에 관한 것들만 있을 뿐. 공략 대상의 생각을 읽거나 욕구를 알아내는 것은 없었으니까.

순수하게 성현이의 사기적인 능력만을 이용해 공략하는 것이 [공략 플래그의 달인] 능력이었지. 진짜 미연시처럼 선택지를 고르게 나눠주는 것 같은 개입은 하지 않았다.

공략도와 음란도, 재능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용도였을 뿐. 상태창은 영또플에서 큰 비중이 없는 설정이니까.

"일단은 플라틴과 차성이 한패라고 생각하자. 차성은 마석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고 플라틴은 마석을 이용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가디언즈는 정말 모를까?"

갑작스러운 한서아의 말에 성현이가 당황하며 한서아를 보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내가 따로 조사해봤는데. 가디언즈가 마인 방어 시스템을 점검하겠다고 나선 게 차성과 플라틴의 협력 기사가 나오고 난 뒤, 몇 시간 뒤였어. 그리고 차성은 가디언즈의 공식적인 협력처고. 짜고 치는 판이라고 생각 안 들어?"

한서아의 말에 방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정말로 가디언즈까지 공장을 알고도 묵인한 거라면…. 공장에 대한 증거를 찾아 가디언즈의 도움을 받자는 우리의 계획은 크게 틀어지는 거니까.

"…그럼 플라틴, 차성, 가디언즈까지 모두 적으로 돌려야겠지."

결연한 성현이의 목소리에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이제야 상황이 실감이 된 건지 토우코도 미소를 지우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닥을 내려봤다.

"…신아린이 마인인것을 공개하면?"

"뭐?"

침묵 속에서 튀어나온 한서아의 말에 성현이가 화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사람들에게 신아린이 마인이라고 말하고 차성이 이런 짓을 했다고 말하면 되잖아. 굳이 신아린 하나 때문에 성현이 네가 위험할 필요가 있어? 사람들에게 그 셋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얘기만 해도­"

"입 닥쳐 한서아."

서늘한 목소리로 한서아의 말을 끊은 성현이가 분노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린이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린이와 같은 상황이어도 나는 포기 안 할 거야. 그러니까 그런 말은 다시는 꺼내지 마."

성현이의 말에 다들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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