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함정속으로
* * *
우리는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서든 유지아를 우리 편으로 데려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유지아와 섹스해야 한다는 것을 나를 대신해 아린이가 설명해줬지만.
다들 그리 탐탁지 않는 눈빛이었다. 내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말한다면 쉬운 일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말해봤자 좋은 것도 없었으니, 그냥 믿어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럼, 술 게임을 해서 억지로 술 먹인 다음에 해버리는 건 어때?"
조금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아린이의 모습에 당황스러워하며 턱을 쓰다듬자. 레이나도 지지 않으려는지 의견을 제시했다.
"그냥 나랑 주인님이랑 섹스하는 거 보여주면 발정 나서 자기도 박아달라고 애원할걸?"
색기 있는 미소로 그리 말하는 레이나의 모습에 이마를 붙잡고 한숨을 내쉬자. 한서아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창녀 같으니."
그 말에 대답할 가치도 못 느꼈는지 레이나는 연신 몰캉몰캉한 가슴을 내 팔꿈치로 꾹꾹 눌러댔다. 여기서 발기하면 아린이에게 무슨 눈빛을 받을지 몰라.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러고 보니, 유지아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했는데…."
토우코의 말에 테이블이 침묵에 휩싸였다. 자신의 발언이 가져온 어색한 분위기에 당황한 토우코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사, 사귀는 건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 응, 응…!"
"…그렇지? 요즘 처녀는 인기 없어."
분위기를 살리려는지 의외로 레이나가 토우코의 말을 거들어줬다.
"일단 밥 먹고 보드게임 카페에 갔다가, 자연스레 휴식 겸 호텔에 간다고 생각하자. 로열 스위트룸이면 6명이 들어가도 충분할 테니까."
아린이의 정리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 어떻게 유지아를 따먹게 할지 의견을 제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
20살. 요즘은 17살부터 성인으로 인정하는 세상이지만, 아카데미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나이는 20살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벗어나 영웅협회에 인턴십으로 들어가게 된 유지아는 [고속 정보망]이라 이름 붙인 재능 덕에 영웅협회의 정직원이 될 수 있었다.
비전투 재능이라 꿈꾸던 던전을 탐험하고 마인과 싸우는 현역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무직 영웅이었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아 가디언즈의 막내 비서급으로 취급되고 있다.
영웅협회의 정직원, 가디언즈의 막내 비서. 또래에 비하면 엄청난 출발이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항상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돌 덕질만 9년차. 잘생긴 외모의 남자를 보며 연인이 되고 싶다. 섹스하고 싶다는 망상만 하며. 재능을 이용해 몰래 아이돌의 휴대폰을 해킹하거나 SNS를 훔쳐보는 게 11살 때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한숨만 나왔다.
9년간 남자 손 한번 못 잡아보다니. 자신을 여자로 보는 남자도 있었지만, 외모적으로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아 거절했다. 솔직히 말하면 얼빠기질이 아니었다면, 이미 남자친구를 사귀었을지 모른다.
당장 해킹으로 아이돌의 민낯과 큰 자지들을 몰래 훔쳐볼 수 있는데. 잘생기지도 않고 자지도 작은 남자와 사귈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접근한 남자의 휴대폰을 해킹하니 친구들과 만든 단체 채팅방에 자신을 따먹을 거라고 장담하는 모습에 더욱 꼴 보기 싫었다.
그래도 해킹으로 나체 사진과 대화를 캡처한 사진을 연락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돌려 사회적 살인으로 복수해주긴 했다.
유지아는 사랑을 찾고 있었다. 잘생기고 자지도 큰 이상향적인 남자. 단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야수 같은 남자.
하지만, 자신의 주변은 진짜 짐승 새끼들 밖에 없었기에. 한숨을 쉬며 오늘도 방송용 이미지가 아닌 너저분한 아이돌의 뒷모습을 관음이나 할까 했는데.
토우코 언니가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계속 부탁하여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에서 빠져나와 초월역으로 향했다.
매일 출근할 때 타는 버스라 그런지. 주말에도 출근하는 기분이라 힘 빠진 모습으로 정류장에 도착해 메시지를 보내자. 골목에서 토우코 언니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지아짱!"
"…제발 크게 이름 좀 부르지 마. 쪽팔려."
몇 번이고 부탁했는데.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자아예요`라고 광고하듯 크게 이름을 외치는 토우코 언니는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언니였다.
휴대폰과 컴퓨터를 붙잡고 매일 같이 음침한 모습으로 회사 생활을 하는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가자. 친구들이 지아짱 기다려요."
"…친구들?"
팔짱을 낀 토우코 언니에게 미간을 좁히며 묻자. 모른 척 자기 팔을 끌고 가는 뒷모습에 유지아는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거 싫은데.`
1명은 괜찮지만, 그 수가 많다면 조금 부담되었다. 금방 자리에서 일어날 구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손으로 휴대폰의 알람을 10분 뒤에 맞춰놨다.
전화 받는 척 빠져나간 다음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니까.
골목 안의 작은 카페 안에 들어가자. 토우코와 어울리는 미녀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
도시의 차가운 늑대 같은 인상에도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왕자님이 그곳에 있었다.
그동안 망상 속에 그리던 야수가 현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져. 유지아는 눈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김성현이에요. 토우코 누나에게 들었어요. 유지아 누나 맞으시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는 김성현이라는 이름의 야수에. 유지아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내민 손을 잡자, 크면서도 운동으로 단련된 단단한 손을 느끼자, 가슴이 설렜고 몸이 붕 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게…. 사랑?`
첫눈에 반한다는 진부한 말이 왜 그리 자주 영화와 드라마에 나오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생각하며 유지아는 표정을 관리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꾸미고 나올걸. 토우코 언니만 만나는 줄 알고 가볍게 입은 게 후회가 되었다.
"아. 반가워요. 영웅협회에서 일하고 있는 유지아예요."
"혹시 저 모르세요?"
남자의 물음에 유지아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져봤지만, 이런 핸썸한 애니멀과의 접촉은 자기 삶에 없었다고 확신했다. 이 외모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폭력적으로 각인될 정도로 설레는 모습이었으니까.
"처, 처음 보는데…."
"아, 제가 가디언즈 인턴이라. 혹시 지나가다 저를 봤을까 싶어서요."
"가디언즈 인턴?!"
세상에, 잘생긴 것만 아니라 능력까지 있다. 거기에 가디언즈 인턴이라면...가디언즈의 막내 비서인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운명이야…!`
아이돌 팬픽에서나 보던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조금 눈물이 날뻔했다. 토우코 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다 문득 주변의 여자들과 무슨 관계일까 경계심이 들었다.
이런 외모를 가진 수컷을 딱 봐도 문란해 보이는 암컷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니. 일단 휴대폰의 알람부터 해제했다. 이런 기회 놓쳐서는 안 된다.
"다른 분들은…?"
"아, 이쪽부터 레이나, 신아린, 한서아예요. 간단하게 보드게임 동아리라고 보시면 돼요. 주말마다 보드게임을 하는데, 이번에 토우코 누나도 끼게 됐거든요. 그런데 숫자가 홀수라서 짝이 안 맞아서 한 명이 필요해서 부탁드린 거에요."
"아, 아…."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주변의 암컷들을 확인해봤지만. 남자에게는 관심 없는지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일단 여자친구는 아니라는 거잖아…!`
유지아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에 민망함에 입술을 입안으로 숨겼다.
"저녁 먹고 보드게임카페 갈려는데…. 괜찮으세요?"
"좋, 좋죠."
쪽팔리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괜스레 허벅지를 꼬집으며 민망함을 달래자. 눈앞의 남자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말 편하게 하세요. 누나."
별거 아닌 말에도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유지아가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아이돌을 실제로 보았을 때와 흡사했다.
"으, 응. 그럴까? 너도 말 편하게 해."
"응. 누나."
길게 입꼬리를 늘이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아이돌 덕후로써. 캡쳐해서 보정 할 필요 없이 매일 보고 싶을 정도로 설레는 모습이었다.
"가자, 주변에 괜찮은 라멘집 있대."
남자의 옆에 있던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미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괜스레 경계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작은 키를 가진 여자애랑 팔짱을 끼고 카페를 나가는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딱히 관심은 없는 건가…? 진짜 순수한 보드게임 동아리일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자신이 저 야수의 미녀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런 망상을 하며, 유지아는 토우코와 함께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
쾅! 때그윽….
"...제발 정상적인 할리갈리 좀 할까?"
김성현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유지아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을 때리는 게 아니라 서로의 손등을 어떻게 강하게 때릴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인 걸까.
"괜찮아. 한서아가 그렇지 뭐."
"가슴처럼 손에도 살이 쪄서 반응이 느린 건 아니고?"
"뭐…?"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는 한서아와 레이나의 모습에 김성현의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그만들 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뭐 하는 거야."
싸울 기세의 두 사람을 중재하고 김성현은 미안한 표정으로 유지아에게 말했다.
"미안 누나. 얘네 둘이 경쟁심이 세서 종종 이래."
"아, 아니. 열심히 하는 게 좋아 보이네…."
너무 열심히 해서 종이 찌그러져 제구실을 못 하는 게 문제지만…. 애초에 쇠로 된 종이 저리될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한서아, 레이나. 잠깐 나 좀 봐."
서늘한 목소리로 신아린이 그리 말하자. 잠시 보드게임 카페에서 나가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고 돌아온 둘은 풀죽은 얼굴로 조용히 게임을 했다.
조금 진정된 상황에 종을 바꾸고 다시 할리갈리를 하다, 우연히 김성현의 손에 유지아의 손이 포개졌다.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내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종을 치는 김성현의 모습에 또다시 미친 듯이 자기주장 하는 심장을 느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보드게임이 이렇게 스킨쉽이 많은 게임이었나 싶을 정도로, 바로 옆자리에 앉아 같이 젠가도 하고 부루마블을 하면서 부쩍 거리감이 사라진 김성현에게 이제는 자연스레 팔뚝을 툭 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팔뚝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에 옷 아래 있는 탄탄한 근육이 상상되어 유지아의 몸이 달아올랐다. 노트북이라도 있으면 김성현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친해진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플레이했던 보드게임을 정리하며 김성현이 그렇게 말하자, 아쉬움이 찾아왔다. 이대로 오늘은 끝인 걸까.
"응. 호텔 방 잡아놨는데. 다 같이 가서 좀 쉬자."
호텔? 신아린의 말에 당황한 유지아가 토우코를 바라보았지만, 시선을 못 받았는지 토우코는 보드게임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야식으로 치킨을 먹자는 말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유지아에게 다가온 김성현이 수컷의 체취를 물씬 풍기며 유지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을래?"
이미 늦은 시간이다. 김성현과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크긴 했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호텔을 가는 건 유지아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를 세상이니까.
"나는…."
"지아짱! 오늘은 언니랑 같이 자자!"
갑작스러운 토우코의 제안에 당황한 유지아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김성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따로 방 잡았으니 걱정 마. 여자들의 밤에 제가 낄 생각은 없으니까."
자신을 배려하는 듯한 말에 괜스레 미안해져 유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래, 어차피 내일 일요일이니까. 그러지 뭐."
여자들끼리만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인 유지아의 뒤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을 유지아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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