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19화 (119/160)

〈 119화 〉 쓰레기

* * *

얼마 잠들지 못하고 눈이 떠졌다. 격렬하게 나눈 행위의 증거가 온몸에 남아있을 정도라. 피로감으로 눈이 감기는데. 오늘로 미뤄둔 일들에 정신은 벌써 긴장하고 있었다.

생각을 지우려 해도, 앞으로 닥칠 일들이 무섭게만 느껴져 더욱 상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제와 같은 하루가 계속되었다면. 이번 주말까지만 푹 쉬었다면.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또다시 현실의 문제에서 도피하는구나. 나에 대한 한심함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음을 다잡고 죽는 힘을 다해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쉬운 길이 없을까 찾아보는 꾀만 부리고 있다니….

그때, 잠결에 뒤척이던 성현이가 팔을 움직여 더듬더듬 거리며 내 몸을 만지더니 어깨를 찾아내고는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

무심코 말 한마디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가장 필요할 때. 무의식으로도 나를 따스한 온기로 보호하듯 품어주는 성현이의 행동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온기에 의념이 자연스레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하루가 끝나고 이 따스한 온기 속에서 잠이 드는 일.

그래, 이것을 위해 싸우자.

차성이든, 칠격이든, 백진희든, 그 어떤 것이든지.

내게서 이 행복을 절대 못 뺏어 가게 할 거야.

몸을 더욱 밀착해 엉겨 붙듯 성현이의 품 안을 파고들자. 내가 뒤척인다고 생각했는지 잠든 와중에도 걱정스레 내 등을 쓸어내리는 성현이의 손길에 상념은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성현이의 고른 숨소리를 따라 숨을 내쉬니.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몸이 피로감을 호소하여.

따스한 체온과 중독성 있는 체취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

잠에서 깨어 잠시 눈을 뜨자, 따스한 갈색의 눈동자로 품 안에 끌어안은 나를 바라보는 성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코에서 느껴지는 향기로운 냄새에 샤워를 끝내고 다시 나를 끌어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성현이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사랑해."

일어나자마자 목이 잠긴 채, 꺼낸 말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그런데도, 내 말을 들은 성현이는 놀리는 기색 하나 없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내 이마에 살짝 입맞춤해주고는 작게 속삭였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해."

그 고백에 품 안으로 더 파고들려 했지만, 성현이가 내 어깨를 붙잡고 막아섰다.

"일어날 시간이야."

더 투정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이제는 미뤄뒀던 것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킬 때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성현이의 따스한 눈빛에서 묘한 성욕 어린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성현이의 시선이 내 얼굴이 아닌 밑으로 내려가 있는 것을 보고 별생각 없이 고개를 내렸다가. 아직도 유두가 드러나 있는 메이드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으, 앗…."

수치심이 밀려 들어왔다. 어젯밤의 격렬한 정사와는 다른 문제였다. 벗은 몸을 몇 번이나 보여줬어도,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팔을 들어 가슴을 가리자, 조금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던 성현이는 모른 척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씻, 씻고 나올게."

"응."

황급히 화장실로 도망쳤다. 정액과 애액이 굳은 옷을 벗어 던지고 곧장 샤워한 뒤.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대충 머리를 말리고 화장실 밖을 나오자.

누워있던 성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나를 의자에 앉히고는 드라이와 함께 머리를 빗겨줬다.

내 머리를 부드럽게 빗겨주는 성현이의 손길을 느끼며, 머릿속에서 성현이에게 할 말을 정리했다.

빗질이 끝나고 물을 한잔 마신 뒤. 의자에 앉아 성현이를 바라보며 머릿속에 떠올린 계획을 얘기했다.

"칠격이 나를 납치하려 했을 때. 기한신이 그런 말을 했어. 나를 납치하는 이유는 공장 때문이라고. 차성에서 만들어낸 공장이 바로 내 `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는 건 알고 있지?"

"응. 알고 있어. 저번에 가보기도 했으니까."

이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실망할까. 아무렇지 않은 척 배려할까.

성현이 앞에서 계산하지 않기로 했으면서도, 자연스레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공장은 사람들을 납치해서 강제로 마인으로 만든 뒤, 심장에서 마석을 채취하는 곳이야. 순현동의 테러때 실종된 사람들이 `공장` 안의 컨테이너에 있었다는 기한신의 설명도 있었어."

"컨테이너…. 그렇구나."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미간을 살짝 좁힌 성현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신의 말이 맞는다면…. 아마 맞을 거지만, 나 때문에 성은이랑 너희 가족이 위험해졌던 거야. 미안해. 정말로…."

"…그래서였구나. 죄책감을 계속 느끼고 있던 이유가."

"…응?"

"어젯밤까지도 네 욕구는 죄책감이었거든. 그래서 내 곁에 있는 것 때문에 그런 줄 알았어."

성현이의 옆에서 행복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 공장과 관련 된 것과 성은이가 나 때문에 위험해졌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안했고, 내게 실망할까 봐 두려워 선뜻,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괜찮아 아린아. 네가 그런 거 아니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그렇지만 공장은…."

"너도 몰랐잖아. 그리고 네가 아니었어도 차성은 공장을 만들었을 거야. 내가 기억하는 네 아버지라면 돈을 위해서라면 그럴 것 같았으니까."

내 아버지에게 조금 적대감을 내비치는 성현이의 모습에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고 있자. 그제야 성현이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네 아버지를 욕하려는 건 아니고…."

"아니야. 네 말이 맞아. 아버지, 아니. 신재호는 백진희와 같은 위험한 사람이야."

그 말에 성현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초경이 끝나고 억지로 사람을 잡아먹게 마인을 이용해 `갈증`을 유발했어. 그리고는 주기적으로 사람을 잡아먹게 만들고 금제를 통해 나를 조종하려 했어."

내 말을 들은 성현이는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며 내 손을 잡아줬다. 위로하듯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성현이를 보며,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갔다.

"나도 몰랐는데. 내 엄마가 마왕이었대. 그래서 나는 마왕의 핏줄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신재호와 백진희가 나를 성장시키려는 이유를 알 수 있었어. 그 둘은 공장을 통해 수확한 마석을 이용해 내가 성장해서 마왕이 되길 원해."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어서인지. 성현이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의혹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백진희가 마왕이 되길 원한다는 건 저번에 마석의 일 때문이야?"

"아니, 조민성이 떠나고 기숙사로 돌아오자 백진희가 찾아왔어. 아마도 칠격의 사냥에서 벗어난 나를 확인하려고 온 거겠지. 그리고 나는 연기로 백진희를 속일 수 있었고…. 백진희가 내게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어. 백진희는 마석을 흡수해서 S급의 마인이 되라고 말하더라."

"…그렇다면 마왕이 되길 원하는 게 맞는 거네. 씨발…. 조금 더 의심했어야 했는데."

미간을 좁히며 자책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백진희는 수많은 사람을 세뇌하고 조종하는 흑막이야. 지금 당장은 백진희와 싸우면 안 돼. 실력으로도 백진희에게 밀리지만, 백진희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그걸 알아내야 하니까."

"…백진희를 공략한다면?"

"말했잖아. 백진희는 너에게 배신당한 전적이 있어서 너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이 있다고. 단순히 너랑 백진희를 엮기만 해도 이성을 잃어버리고 나를 공격할 정도야."

한숨과 함께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시간을 주려,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한 물 한잔을 따라 건네줬다.

고마워하며 단숨에 물을 들이켜 마신 성현이는 잔을 내려놓고 나를 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 물음에 한참을 고민하다, 생각을 정리한 뒤 대답했다.

"`공장`의 가동을 막자. 정말 사람들을 납치해 마인으로 만들고 있는 게 맞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니까. 혹시, 가디언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나도 가디언즈는 일면식밖에 없어서…. 아직 공략 한 사람도 없고. 증거도 없어서 인턴인 내 말을 믿어줄 사람도 없을 거야."

"그럼 증거를 모아야겠네. `공장`이 실존한다는 증거."

어디서 증거를 찾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자 성현이가 의견을 제시했다.

"저번에 너랑 성은이가 납치된 곳…. 거기도 공장이었잖아."

"이미 정리가 끝났을 거야. 내가 다친 곳인데 그냥 놔뒀을 리가 없잖아."

"그런가…."

아쉬워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이해력]을 사용해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었다.

"한 가지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성현이는 내 목소리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내켜 하지 않으며 물었다.

"…뭔데?"

"칠격과 거래하는 거."

"뭐? 무슨 미친 소리야?"

예상했던 대로 격한 반응을 보이는 성현이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듣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리는 성현이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너를 납치하려 했던 놈들과 거래하자고…? 난 칠격새끼들 보면 대가리 터트려버릴 생각밖에 없는데?"

"그렇지만 공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칠격이야. 거래는 할 수 있잖아."

내 말에 화가 났는지. 고개를 젓던 성현이가 뒤돌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또다시 너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어."

"칠격과 거래하면 가디언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분노를 다스리며 내 말에 깊은 고민을 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나만 아니었다면…. 성현이는 지금쯤 레이나와 질펀한 섹스하며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고 있었을 텐데.

미안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턱을 쓰다듬고 있던 성현이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내가 안겨 오자 당황했지만, 평소처럼 내 등을 쓸어 내려주는 성현이의 손길에 머릿속을 채우는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며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 더는 안주할 수도 없고. 나도 두렵고 힘들지만…. 성현이 너랑 함께하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 미안하지만 도와줘 성현아."

내 말에 성현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내 턱을 잡아 올리고는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었다.

따스했다. 내 허리를 끌어안은 손도, 내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는 듯한 부드러운 연인의 입맞춤도.

짧지만 너무나도 행복한 입맞춤이 끝나고, 성현이는 따스한 갈색의 눈동자로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하지. 널 위해서라면 난 모든 걸 할 수 있어. 사랑하니까."

그 말에 느껴지는 진심에 고개를 숙여 가슴에 얼굴을 파묻자. 성현이는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수리에 볼을 부비다가 작게 속삭였다.

"칠격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어."

"다른 방법…?"

"우리 둘만으로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는 힘들어. 도움을 받자."

"누구…?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증거도 없고 차성이라는 배경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친구도 없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있어. 나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들."

확신에 찬 성현이의 목소리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레 [이해력]이 발동되었다.

"설마…."

"맞아. 내가 공략한 여자들."

잊고 있었다. 원작의 김성현이 어떻게 혼자서 마인의 위협과 가디언즈, 칠격의 사이에서 버틸 수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잊고 지내던 스토리 후반부 성현이를 부르던 별명이 떠올라. 무심코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암컷몬 트레이너…."

"뭐…?"

내 말에 어이없어 하는 성현이의 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영또플의 후반부에서 공략한 여자들과 함께 전투에 나섰던 김성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포켓몬 트레이너처럼 공략한 여자들을 군단처럼 끌고 다니며, 소니아 레이나를 필두로 마인을 사냥하던 김성현.

공략한 암컷들을 앞세운 전투씬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의 불타던 반응이 자연스레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이게 하렘이 아니면 뭐임ㅋㅋ]

[이것이 K­하렘? 역시 당해낼 수 없는 wwwww]

[그동안 내가 봤던 하렘은 하렘이 아니었구나…]

[영또플은 순애입니다!]

[풀 타입 암컷도 한 명 공략하자!]

[맘마통 꽉찬 탱커 하나 공략해서 파티에 넣는게 정석 아닐까요?]

[그래도 대단한게 김성현은 지우라고는 안함. 낳으라고 강요함 진짜 순애(순순히 애를 낳아라)임]

[한서아는 한토리얼이 아니라 한죤투였네 오늘도 안나옴 ㄷㄷ 대체 언제 찾으러 감?]

└[김성현:몰?루]

└[이제는 좀 놔줘…]

"이 쓰레기."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