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추악한 이기심의 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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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희와 검술 훈련이 끝나고 몸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낸 뒤. 찝찝한 상태로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훈련장 앞의 샤워장을 이용해도 되지만, 몸이 피곤해 씻고 바로 침대 위로 눕고 싶다는 충동이 컸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사람들이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지금쯤이면 성현이는 훈련을 하고 있을까?
문득 오늘 데이트를 하자던 성현이의 모습이 떠올라 잊고 있던 죄책감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칠격이 나를 납치하려는 이유. `공장`의 가동을 막기 위해서라던 기한신의 말.
차성이 사람들을 납치해 마인으로 만들어 심장을 갈라 마석을 채취하고 있다. 순현동의 테러도 차성에서 꾸민 일이라는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내게 공장이 가동되면 갈증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한 이유가 직접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으니까.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인 딸을 위해, 아버지가 대신 손을 더럽히고 있다.
그 진실이 가져올 후폭풍이 두려웠다.
진실을 말하면 성현이가 나를 미워할까, 원망할까 두려움이 들었다.
나 때문에 성은이가 위험했던 거다. 성은이를 위해 내 팔다리를 자른 게 아니라 죗값을 치른 것 뿐이었다.
죽기 싫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비중을 가진 것이 바로 성현이었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고, 행복해지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진실을 말하면 내게 화를 낼까 봐, 나를 미워할까 봐. 겁이 나 아무렇지 않은 척 잘못에서 몸을 돌리고, 죄책감을 숨겼다.
항상 진심으로 대한다고 약속해놓고 성현이를 잃기 싫다는 일차원적인 감정인. 소유욕을 이기지 못하고 태연하게 거짓을 말했다.
그 추악한 욕심에 죄책감이 든다. 내가 성현이의 곁에 있는 게 옳은 것일까. 고개를 푹 숙이고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기숙사에 도착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민을 안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가자. 내 눈에 보인 건 의자에 앉아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현이의 모습이었다.
"성현아?"
방에 미리 와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당황하며 다가가려다 씻지 않았다는 사실에 냄새가 날까 걸음을 멈췄다.
의자에 앉은 채 서늘한 시선을 보내는 성현이의 모습에 마음속에 남아있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내 발밑으로 무언가 툭하며 떨어졌다. 발끝에 닿은 물건이 피임 젤임을 확인하자 당황스러움에 고개를 들어 성현이를 바라봤다.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놓은 피임 젤을 성현이가 우연히 발견했을 리는 없다. 설마, 내 방을 뒤진 건가?
"언제부터야?"
"성현아…."
"언제부터 피임했냐고."
분노한 듯한 성현이의 모습에 할 말이 없어 입술을 깨물고 답하지 않자. 의자에서 일어난 성현이가 나를 끌고 가 침대 위로 던지듯 눕혔다.
그대로, 저항하지 못하게 내 몸 위로 올라타 체중을 실어 나를 제압한 뒤,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성현이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져 두려웠다.
"미안, 미안해…."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말하자. 내 턱을 붙잡고 성현이는 입을 맞췄다. 평소처럼 눈을 감고 입맞춤에 응하자, 성현이는 거친 손놀림으로 내 옷을 벗겨냈다.
단추를 억지로 뜯어내며 옷을 벗기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가슴을 만지며, 혀를 얽혀오는 것을 한동안 받아들이고 있자. 젖꼭지를 꼬집어 평소보다 더 아프게 비틀기 시작했다.
"아, 아파…."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강하게 젖꼭지를 비트는 행동에 혀를 떼고 물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오히려 반대편 젖꼭지도 강하게 비틀었다.
성현이의 행동에 애정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고통과 실망에 참았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뿌옇게 변한 시야로 나를 아직도 매섭게 내려보는 성현이의 시선이 느껴져 더욱 서운함에 눈물이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왜 자꾸 날 속이는 거야."
배신감이 진득하게 담긴 목소리에 어떠한 변명도 할 수가 없어서, 눈물만 흘리고 있자. 또다시 성현의 입이 나를 덮쳤다. 혀가 뒤섞일 때마다 슬픔과 고통 사이를 비집고 몸을 근질거리게 만드는 쾌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혀를 섞자, 이번에는 고통스럽게 비트는 게 아닌 부드럽게 유륜을 따라 손가락을 빙글거리며 가슴을 자극하는 손길에 점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각에 나도 모르게 목에 팔을 둘렀다. 성현이는 나를 용서하려는 걸까. 이대로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성현이는 키스를 멈추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 아이 갖기가 싫었던 거야?"
"아니. 절대 그런 거 아니야."
혹시라도 그런 오해를 할까 황급히 대답하자. 의아한 표정으로 고래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왜 피임한 건데?"
"지금 아이를 가질 상황이 아니잖아."
당장 어제만 해도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신한다면 거동도 불편할 것이고 나와 아이까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내 말에 이해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간을 좁힌 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던 성현이가 작게 속삭였다.
"그럼 나한테 숨기지 말고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성현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설득하면 지금보다는 좋았을 것이다.
"네가 싫어할까 봐…."
사실은 막무가내로 성현이가 임신시킨다고 하면 거절하지 못할까 봐 말을 못 꺼냈다. 그래서 뒤에서 몰래 피임을 하고 있던 것이고….
"나에 대한 믿음이 없구나?"
"그건…."
그렇게 받아들여도 할 말이 없었다. 믿지 못한 게 사실이니까. 아랫입술을 깨물고 미안해하자. 성현이는 한숨을 내쉬며 내 볼을 쓰다듬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믿을 정도야? 그래서 자꾸 거짓말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나한테 실망할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야…."
"이미 날 속인 거에 실망했다면?"
그 말에 감정이 툭 하고 터져 나왔다. 눈물을 흘리며 성현이에게 벗어나려 몸부림치자 몸으로 나를 눌러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는 계속해서 나를 추궁했다.
"나는 네가 임신하기 싫다고 했어도 이해했을 거야. 너의 선택이니까. 그런데 말없이 날 속이고 피임했다는 건 배신감 밖에 안 느껴져. 또 뭘 속이고 있는지 의심하게 돼."
성현이의 말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 말대로 성현이를 믿고 솔직하게 얘기했다면 좋았을 텐데.
"미안해…."
"또."
"응…?"
"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나를 바라보는 성현이의 눈빛이 너무나도 애절해 보여, 나는 더는 어제 일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나 있어."
내 말에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짓는 성현이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져 왔지만,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걸 털어놓고 사죄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칠격이 나를 납치하려 했어…. 그래서 기한신이랑 맞서 싸웠는데…."
"기한신이라니?"
내 말을 끊으며 성현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인 기한신이랑 내가 싸웠다는 말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기한신 살아있어. 지금은 칠격의 멤버인것 같고."
"살아있다고…?"
"어떻게 인지는 모르는데, 머리가 터지고 몸이 갈라져도 소니아처럼 몸을 재생해서 살아 나."
그 말에 무언가 생각하던 성현이가 뇌까렸다.
"살아있다면…. 백진희가 속인 거구나."
"맞아. 기한신만 세뇌한 건지 칠격 전부를 세뇌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칠격이 나를 납치하려 했고 그걸…. 조민성이 구해줬어."
내 말을 들은 성현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내 몸 위에서 떨어져 옆에 앉아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침묵 속에서 무언가 생각하던 성현이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아까 조민성이랑 얘기한 건 그것 때문이었어?"
"응? 아…. 알고 있었구나. 맞아. 자기 말로는 변덕으로 구해줬다던데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라…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 했으니까…."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성현이는 침대에서 벗어나 생각을 정리하듯 침대 주변을 걷더니 단호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말 안 했어. 내가 물었잖아. 무슨 일 있었냐고."
화가 난듯한 성현이의 모습에 나는 조금이라도 화를 진화할 수 있을까 싶어 입술을 달싹이며 변명했다.
"네가 걱정할까 봐…."
"…웃기지 마."
차가운 목소리로 내 변명을 잘라 낸 성현이는 내게 분노를 토해냈다.
"내가 실망할까 봐, 내가 걱정할까 봐. 왜 다 네 멋대로 생각하는 건데? 나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도 아니고, 너 혼자 넘겨짚고 날 속이는 걸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데?"
진심으로 내게 분노를 토해내는 성현이의 말에서 느껴지는 절절한 감정에 나는 입술을 깨물고 죄책감에 짓눌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내 이기적인 마음이 만들어낸 상황이었고, 성현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믿지 않는 나에게 화를 낼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동안 내 이기심을 성현이 때문이라고 외면하며, 자위하던 추악한 모습을 질타하는 말에 침묵하는 것밖에 없었다.
"…연인이잖아. 사랑하는 사이고. 그런데 이렇게 서로를 못 믿어야겠어? 잘못된 게 있으면, 대화로 풀어나가야지. 싸우기 싫다고 속이고, 상처받기 싫다고 외면하면 그게 괜찮은 거야?"
혹시라도 내게 상처 주는 말을 할까. 차오르는 분노를 심호흡으로 다스리면서도 성현이는 나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 모습이 내 죄책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내 추악한 이기심의 발로.
싸우기 싫다.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냥 행복하고만 싶다.
그 안일한 사고가 가져온 지금의 상황이 몹시 후회되고 자책스러웠다.
외면하고 미뤄뒀던 잘못들이 결국은 터져 나와 나를 질척한 죄책감에 깊게 가라앉게 했다.
"내가 너한테 믿는가는 행동을 못한 건 맞아. 그래서 바뀌려고 노력했고 너랑 한 약속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했잖아…."
"알아…."
과거 서툴렀던 사랑이 남긴 상처를 덧씌우려는 듯, 성현이는 각성 이후 참으로 따듯하게 대해줬다. 사랑을 속삭여주며, 상처를 치료해주고. 배려해줬으며, 내게 한 약속을 이행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나를 위해 성현이는 바뀐 모습을 보여줬지만, 나는 발전하지 못한 채 성현이를 의심하고 이기적으로 굴었다. 스스로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의 탓으로 돌렸다.
이렇게 행동하면서 성현이에게 자신을 `을`의 입장이라고 말했던 게 떠올라 자괴감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성현이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나는 다른 여자랑 자는 것도 너한테 말하잖아. 부끄러운 일이고 너한테 못 할 짓인 거 알면서도 너한테 숨기기 싫어서. 차라리 나를 욕하고 미워하더라도 다시는 네게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너는 목숨이 위험했던 것조차 내게 말 못하겠다는 거야?"
"절대, 절대로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
"당연히 걱정하지!!!"
내게 분노를 토해내는 성현이의 낯선 모습에 나는 당황스러웠다. 배신감이 짙게 깔린 눈빛,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깃든 눈동자. 화를 다스리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분노와 배신감에 크게 떨려오는 어깨와 가슴. 그 모습 하나하나가 내게 큰 죄책감으로 돌아와 시선을 내리깔 수 밖에 없었다.
"나도 너랑 싸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 매일 같이 그냥 행복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야. 그런데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니까…. 또다시 너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른 여자랑 자는 게 마냥 좋을 것 같아? 너한테 그 얘기를 꺼낼 때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어. 널 두고 바람피우는 기분이라 억지로 다른 사람들을 오나홀 같은 물건으로 취급하는 거야…."
쓸어넘겼던 앞머리를 짜증스럽게 매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감정을 느끼면 정말로 바람피우는 것 같아서…그런데도 너를 지키고 싶어서 아무런 감정도 없는 여자를 공략하고, 괜찮은 척 노력하는 데도 너는 왜 날 믿어주지 못하는 거야…."
성현이의 날카로운 말이 비수가 되어 내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픔을 느낄 자격도 없을 텐데. 날 위해 노력하는 성현이에게 믿음조차 주지 못한 나쁜 사람인데. 나 같은 추악한 사람 때문에 슬퍼하고 화를 내는 성현이에게 미안한 마음밖에 없어, 화를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미안해…잘못했어. 내가 이기적으로 굴었어…."
잘하고 싶었다. 처음이었고,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이기적으로 굴었고 상처를 줬다. 따지고 보면 내 이기심이 만들어낸 상황을 이겨내려 노력한 건 성현이 혼자였는 데. 나는 단 한 번도 성현이의 처지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음속 한 구석에 다른 여자랑 섹스하는 게 좋은 걸까. 나보다 다른 여자가 더 좋은 거 아닐까 하는 추한 질투심을 감춰놓은 채. 아무렇지 않은 척해놓고서는, 성현이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거짓을 말했으니까.
그것이 성현이를 위한 것이라고 착각했다. 사실은 나를 위한 것이었으면서.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추한 내 모습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 내 잘못을 다시 한번 용서해 주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성현이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나를 깊은 절망으로 빠트렸다.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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