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이해할 수록
* * *
아카데미에 등교하는 길.
아린이와 보폭을 맞추며 걸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린이와 함께 매일 등교 길을 걷는다. 평상시와 다를 게 없는 모습에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린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비록, 함께한 시간은 채 1년이 안 되고, 서로를 의심하고 원망하며 상대에게 거짓을 말하던 안 좋았던 시간이 많았지만.
한 달간의 혼수상태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관계가 진정한 연인의 관계로 발전했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알아가려 노력했고, 나는 상태창의 도움을 받아 아린이의 마음을 유추하기도 했으니까.
어떤 음식을 선호하는지, 식당에 들어가면 어떤 자리의 위치를 선호하는지. 아이스크림은 뭘 좋아하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도 아린이와 관련 된 거라면 기억했다.
배려하고 싶었고, 노력하고 싶었고, 아껴주고 싶었으니까.
또 한번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겼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온전히 아린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편안하고, 진심을 담긴 눈빛을 내게 건네며 사랑을 속삭일 때는 모든 걸 아는 듯한 착각이 들지만.
실제로는 나는 아린이의 일부분만 알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아린이가 자신에 대해 고백한 날 이후.
서로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빙의 전의 삶.
나는 아린이를 단 한 번도 남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 아린이는 사랑스러운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회피하고 있다. 아린이의 남자였을 때의 삶에 대해 알게 된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스스로 확신이 없었으니까. 내 섣부른 행동이 아린이에게 다시 상처를 줄까 봐 무서웠고 겁이 났다.
그런 주제에, 나는 온전함을 원하고 있다. 나와 같이 규칙적인 보폭으로 길을 걷고 있는 아린이를 보면, 온전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상태창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내 마음으로 그 진심을 확인하고 싶다.
내 어설픈 사랑이 아린이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우리 관계가 지금 비정상인 것도 알고 있다.
아린이를 사랑하면서,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
내 행위를 이해한다고 말해주는 아린이를 볼 때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의심이 든다.
만약, 우리가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내가 여자를 공략하는 게 아닌, 아린이가 남자를 공략하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린이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화를 내며, 미워하고,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사랑으로 협박을 하며, 그것을 무기로 삼아 아린이를 옥죄어 왔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린이를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는 더더욱 아린이를 모르게 되어버린다.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감정과 아린이의 마음에 있는 감정이 같은 성질인 것인지,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지. 의심이 든다.
"아린아."
갑작스러운 부름에 생각에 잠겨 길을 걷던 아린이가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는 흑요석의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
"금요일에 유급 시험 끝나면. 간만에 데이트할까?"
"데이트?"
"응. 요즘에 시험 준비한다고 못했으니까."
"응. 그러자."
간만에 데이트 약속을 잡자. 조금 신이 난 듯한 아린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아린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
아린이와 함께 교실에 도착하니 평소보다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들이 모인 곳을 확인하니, 팔과 얼굴에 치료한 흔적이 남아 있는 조민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플라틴의 회장에 잘생긴 얼굴, 천재라고 불리는 재능까지.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조민성은 주변의 걱정에 손사래를 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민성을 향한 과거의 열등감은 사라졌으나. 성은이와 아린이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것 때문에 나는 조민성을 극도로 싫어했다. 조민성이 다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있을 때, 내 귀로 아린이의 탄식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째서일까.
자신을 죽이려 했고, 성은이를 납치하고 아레아를 희생시킨 쓰레기 같은 미친놈한테.
걱정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 걸까.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자리에 앉았다. 질투가 만들어낸 초라한 배려였다.
옆자리에 앉아 진희와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는 아린이의 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짓눌린 듯 쓰려왔다.
*
점심을 같이 먹고 난 뒤, 교실로 돌아와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아린이가 화장실을 간다며 교실을 나갔다. 휴대폰으로 데이트할 만한곳을 찾다가, 갈증을 느껴 식수대를 찾아 교실을 나간 내 눈에 복도의 끝에서 조민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린이의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대화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가슴을 타고 피어올라 복받치는 감정에 입술을 깨물고 눈치채지 못하게 기둥 뒤로 숨었다.
한서아와 키스하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것을 들킨 내가. 단순히 대화하는 모습에 질투를 느낀다는 것이 남에게는 얼마나 어이없는 모습으로 보일지는 알지만, 상대가 조민성이라는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열등감을 깨워냈다.
문득 백진희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민성이 아린이를 좋아한다는 말. 그 말 때문에 조급함을 느껴 나는 내 것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 매일 밤 비골을 이용해 매일 밤 아린이를 발정 나게 해 첫 경험을 가졌다.
당시에 나는 조민성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부족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라도 아린이를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에서야 그 행동이 얼마나 나빴고, 이기적인지 알지만. 당시에는 아린이를 뺏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 이기적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라, 추하게 기둥 뒤에서 남의 대화를 몰래 엿듣는 것이다.
"...많이 다친 것 같네."
"별거 아냐."
조민성을 걱정하는 듯한 아린이의 목소리에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다.
"어제 일은 남자친구에게 말 안 한 것 같은데."
"응…. 너도 괜한 말 하지 마."
"파트너의 부탁이라면 뭐."
그 대화에 아린이와 조민성이 어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게는 아무 일도 없다고 거짓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추리보다 들려오는 대화 소리를 엿듣는 것에 집중했다.
"어제 일은 고마웠어. 진심이야."
"그럼, 이제 인사 정도 는 받아주는 사이가 된 건가?"
"그건 생각해 볼게."
그렇게 말하며 웃는 아린이의 모습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질투심에 불이 붙어 폭발해버린 것 같았다. 대화가 끝난 것 같아 보이는 모습에 황급히 자리로 돌아와 아무 일 없는 척 휴대폰을 만지고 있자.
자리로 돌아온 아린이가 아무렇지 않게 시험공부를 하는 모습은. 내 가슴속에 남아 있던 질투에 장작이라도 넣은 것처럼 활활 불타오르게 했다.
조민성에게 아린이가 고마워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나에게는 어제 일을 숨기는 것일까. 내게 죄책감을 가진 이유는 조민성과 관련된 일인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며, 계속해서 이어지기 시작했다. 각성했어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자. 아린이도 조민성과 사랑을 나눈 거 아닐까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
흔한 양판형 야겜에서나 볼 수 있는 NTR X NTR 스토리지만. 서로의 입장을 바꾼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아린이가 재능을 복사한다며 모르는 선배와 모텔에 갔는데, 나를 좋아하는 여자가 아린이의 빈자리를 채워준다고 나타난다면?
소니아나 백진희가 내게 접근했다면 나는 그것을 거절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린이가 내게 죄책감을 가진 것도 말이 되었다.
다른 여자랑 잠자리를 갖느라 연락도 되지 않는 남자친구 때문에 홧김에 조민성과 잠을 잤다면. 그래서 내게 죄책감을 가진 거라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모른 척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 불타오르는 질투심과 분노를 아린이에게 표출해야 하는 걸까.
예전이었다면 당장 아린이를 사람 없는 곳으로 끌고 가 억지로 키스하며 사랑을 확인했을 나였지만. 이제는 경험이 쌓이다 보니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인지 알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른 척 진심을 떠보는 방법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어제 공부 많이 하지 않았어?"
"응? 아. 응, 도서관 이용 시간 끝날 때까지 공부했지. 그래도 한 달이나 쉬었더니 지금 수업 따라가는 게 힘들어서."
한숨을 쉬며, 책을 바라보는 아린이의 모습에 나는 분노를 억누르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힘들었겠네.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혼자 자느라 무섭다고 나한테 전화도 엄청나게 했잖아. 잠도 제대로 못 잔 거 아니야?"
"아니야. 잘 잤어."
내 직감이 말해준다. 아린이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책을 보는 척 시선을 내리깔면서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고.
"...그래. 다행이네."
왜 내게 거짓을 말하는 걸까. 내 의심이 맞는 걸까. 내 앞에서 항상 진심으로 대한다던 그 말은 거짓이었던 걸까.
아린이를 침대로 끌고 가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나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쾌락에 울며 내게 매달리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었다.
"오늘 훈련 쉬고, 어제같이 못 있었던 것만큼 오늘 같이 있자. 그러고 싶어."
질투와 분노가 만들어낸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아린이를 침대라는 취조실로 끌고 가려 했다. 절정에 빠져 몽롱한 상태의 아린이라면, 내 추궁을 견디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아린이는 그 의도를 눈치챈 건지. 책에서 고개를 들어서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미안, 나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누구랑?"
혹시 조민성일까. 나도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반응에 당황했는지, 아린이는 입술을 달싹였다.
"백진희가 검술 훈련 봐주기로 했거든."
그 예상치도 못한 말에 내 안에 있던 분노와 질투심도 멈춰버려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누구? 백진희?
"백진희랑?"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하니까. 내가 먼저 부탁했어."
나는 예상외의 상황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린이를 바라보며 주변에 들리지 않게 따지듯 속삭였다.
"백진희가 위험하다고 한 건 너잖아. 너를 세뇌하고 기아스로 우리를 묶고, 함정에 빠트리려고 계획도 세우고 있다며? 그런데 백진희랑 둘이서 훈련을 한다고? 오히려 지금보다 거리를 둬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이해가 안 되었다. 백진희가 위험하다며 기아스를 파훼하던 아린이가 어째서 백진희에게 부탁까지 하며 접근하는 걸까?
내 말에 아린이는 짓씹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한참 뒤에야 입술을 떼었다.
"나 너랑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나도 그래."
맥락 없는 아린이의 말에 상황을 회피하려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의심을 할 때. 세상 진지한 얼굴로 아린이는 말을 이었다.
"나도 백진희를 믿지 않아. 하지만 백진희의 능력은 진짜고, 백진희가 나를 이용하는 것처럼 나도 백진희를 이용해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너무 위험하잖아."
또다시 백진희에게 세뇌당한다면? 아린이가 감당할 수 없는 함정을 파놓는다면?
"너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싶진 않아. 우리는 언제든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고. 마석을 제외하고 내가 빠르게 성장할 방법은 이것뿐이야. 위험을 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거 너도 알잖아."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이제 곧 있으면 가디언즈"
"아니."
아린이가 내 말을 끊었다.
"더는 네 뒤에 숨고 싶지 않아.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백진희의 옆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할 거야. 이 이야기가 슬픈 결말이 아니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런 행복한 끝이길 원하니까. 그러니까 내 선택을 존중해줘."
아린이 나름대로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불구덩이에 짚을 들고 뛰어가려는 것을 막지 않는 건 후회스러운 일이 될 테니까.
그런데도 아린이는 평소와 다르게 내 간절한 애원에 가까운 설득에도 그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