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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11화 (111/160)

〈 111화 〉 창 끝에 달린 온기

* * *

짙은 심연과 같은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피와 먼지가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검붉은 피가 질척하게 묻은 교복의 찢어진 사이로 흉 하나 없는 대리석 같은 흰 피부가 달빛을 받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흑요석같이 밝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는 물 위를 규칙 없이 떠다니는 낙엽처럼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사랑에 빠져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던 소녀의 미소는 사라지고, 얼마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선명한 잇자국과 피딱지가 올라와 있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흘러나왔는지, 항상 깔끔하게 정리해 만족스러웠던 방 안은 어떠한 규칙과 질서도 없이 마음속의 혼돈을 따라 엉망진창의 모습이었지만.

깊은 심연의 절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위태로운 소녀의 모습과 퍽 어울려, 만족스러운 감정이 자연스레 미소를 그려냈다.

빛을 잃어버린 듯 음영이 사라진 검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신아린의 모습에, 감정 없는 인형으로 살아가던 본래의 신아린의 모습과 겹쳐 보여 나는 잔혹한 미소를 지워낼 수가 없었다. 이건 큰 흐름일까, 설정이 만들어낸 억지력일까.

묻고 싶지만, 이 세계로 나를 끌어내린 존재는 언제나처럼 내 물음에 침묵할 뿐이었다.

철저하게 꾸민 계획을 당연하단 듯이 어그러트리고, 내가 만들어낸 길을 걸으면서도 항상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혼돈의 존재. 그렇기에 지루한 일상 같던 굴레를 더욱 매력적으로 바꾼 `변수`.

칠격의 사냥에서 벗어난 사냥감은 자신의 동굴로 들어와 구석으로 몸을 숨겼지만, 공포에는 벗어나지 못했는지 피칠갑을 한 모습 그대로. 절망이라는 늪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고개만 돌려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공포는 절망을 불러오고, 절망은 자연스레 무기력이라는 족쇄를 채워낸다. 육체의 문제가 아닌 정신의 족쇄. 그러기에 더욱더 효과적이며 치명적인 파괴력을 가졌다. 그렇기에 그저 방관하면 늪에 빠진 사냥감은 무기력에 짓눌려 의지를 잃고, 깊은 늪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내가 다가가 핏기 없는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 손길에 음영이 사라졌던 눈동자가 아주 작은 빛을 발하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백진희…."

피로에 갈라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신아린의 모습에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이름만이 아니라, 성까지 붙이는 것으로 보아. 또다시 이 작은 동물은 그동안 곁에 두었던 친구가 포식자임을 깨닫고, 가시를 내세우고 있었다.

나는 대답 없이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부드럽게 아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기만 해도,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두개골을 두부처럼 으깨버릴 수 있지만, 그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몇 번이고 그 감정을 되새길 수 있겠지만.

나는 그저 유혹을 힘겹게 버텨내는 내 정신력의 고통을 즐기며. 이해하고, 배려하는 척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다. 그 손길을 따라 흑요석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더욱 아름다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괜찮아."

기한신이 계획대로 납치하지 못했지만, 칠격이 너를 죽을 때까지 고문하여 김성현의 증오를 사지는 못했지만 괜찮았다. 이 변수들이야말로 이 `회차`가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였으니까. 매일 같이 걸어 다니던 통학로에 보지 못했던 노점이 들어서 호기심이 생기는 것처럼, 이 변수들이 가져올 고통과 즐거움이 내 무료를 없애주고 있으니까.

"괜찮아 아린아."

너는 더 버틸 수 있으니까. 이 세계의 주인공을 위한 희생 장치이자, 슬픔을 위해 존재하는 설정이니까. 더욱 높게 올라 태양에 가까워져 날개가 불타 심연의 밑바닥으로 추락할, 그렇기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존재니까.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아까워, 나도 모르게 그 눈물을 손가락으로 받아냈다. 피부에 스며들어 사라지는 눈물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이 눈물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고, 수많은 슬픔이 만들어질 텐데.

이렇게 눈물을 낭비하다니. 멍청이, 나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 손길에 온기라도 느꼈는지 내 손을 힘겹게 붙잡더니 얼굴을 부비는 모습이 비 맞은 강아지 꼴이라 귀엽게 느껴졌다.

짙은 혈향과 얼굴에 묻은 피딱지. 그 위로 남은 눈물 자국만 아니었다면 더욱 완벽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쉬움을 삼키며 아린이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조금 정신을 차린 것인지. 내 손에 얼굴을 부비던 행동을 멈추고는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었어?"

누군가를 걱정하는 방법은 잊었지만, 상대방에게 거짓을 보여주는 방법은 잊지 않았다. 위선을 떠는 내 행동에 나를 향해 내세우던 가시들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죽고 싶지 않아…."

나에게 마음속의 절망을 겁 없이 보여주는 모습에 폐 속 깊숙이 차오른 웃음을 억누르며, 나는 내 안에 있는 분노의 열기를 끌어올리며 아린이를 껴안았다. 그 열기를 온기로 착각이라도 한 것일까. 내 품으로 더욱 파고드는 아린이의 모습에 나는 결국 입술이 찢어질 만큼 입꼬리가 올라가 버렸다.

"절대 널 죽게 놔두지 않을 거야."

절대, 절대.

아직 죽게 놔둘 생각은 없다. 너는 행복해야 하니까. 심연의 밑바닥으로 추락할 정도로 높이 오르지 못했으니까. 내가 원하는 상황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날개를 잃어 추락하는 것을 보여줘야 하니까.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태양에 다가가도록 날갯짓을 가르치고, 따스한 온기를 느끼게 해줄게. 날개를 부러트리고, 부리를 제거했지만. 그 고통이 더욱 강한 날개를 갖게 하고, 전보다 더욱 단단한 부리를 만들어 낼 것을 아니까.

더 큰 추락을 위해, 더 큰 비행을 하게끔 도와줄게.

네 행복이 가져올 내 행복을 위해서.

***

"아린아."

나를 부르는 귓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내 시야에 보이는 건. 신이 만들어낸 예술적인 공예품에 가까운 찬란한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는 백진희의 얼굴이었다.

"백진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백진희는 내 어깨를 붙잡아 다시 자기 무릎 위로 내 머리를 올려놨다.

"조금 더 누워 있어. 몸은 괜찮아?"

백진희의 질문에 나는 대답 없이 손을 들어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목 안에 모래가 낀 듯 꺼끌꺼끌한 통증이 느껴져 말하기가 힘들었다.

"꼴이 말이 아니야."

머리카락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피를 떼어내며, 백진희는 여느 때와 같이 예쁜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예쁜 미소. 멍하니 백진희를 바라보고 있자,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던 백진희는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냄새도 나고."

훅­하고 다가온 백진희의 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혔다. 코를 박고 그 향기를 폐 속 깊이 집어넣고 싶을 정도로 중독성 있는 향기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기는 손길에 계속 누워있고 싶었지만. 냄새가 난다는 말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씻지를 않아서 피와 땀이 만들어낸 악취가 백진희의 향기를 뚫고 내 코에도 느껴져, 부끄러웠으니까.

"힘들어?"

뜬금없는 백진희의 말에 주먹으로 얼굴을 맞은 것처럼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내 몸에서 나는 악취에도 불구하고 백진희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다시 물었다.

"누가 널 해칠까 봐 두려워?"

백진희의 그 말에 발작이라도 하듯, 내 몸이 미친 듯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잊고 있던 공포가 가슴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내 발작을 잠재우려는 듯, 따뜻한 온기로 나를 꼭 끌어안아 준 백진희 덕분에 몸의 떨림이 점점 줄어들어 갔다.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감춰놨던 감정이 툭 하고 터져 나왔다.

"무., 무서워…흐아아앙……"

엄마의 품에 안겨 두려움을 해소하려는 아이처럼, 나는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백진희의 품에 필사적으로 엉겨 붙으며 울음을 쏟아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그 탓에 또다시 발작하듯 내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죽,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아픈 거 싫어…."

기한신에게 붙잡혔을 때, 나는 너무나도 두려웠다. 잠깐의 행복의 대가로 고통 속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버릴까 봐. 내 인생의 마지막이 성현이와의 행복이 아니라 지옥의 고통 속에서 끝날 것 같다는 두려움에 미칠 것 같았다.

방안으로 도망치듯 돌아왔을 때, 기한신이 다시 나타날까 두려움에 방의 구석에 숨어 몸을 웅크리고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연락해도 성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위로받고 싶었고 보호받고 싶었는데. 성현이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더욱 절망스러웠다.

그래서 나를 안아주는 이 따스한 온기에 나는 아이처럼 울며 내 불안을 해소했다. 진희라면, 내 행복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줄 진희라면, 분명 나를 도와줄 테니까.

"도, 도와줘 진희야…."

애원하듯 품에 안겨 그렇게 말하자, 나를 끌어안던 진희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안전한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어미처럼, 나를 끌어안고 있는 진희에게 나는 기댈 수밖에 없었고.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진희에게 불안함을 느껴 옷이 헝클어질 때까지 손으로 꾹 쥐고 놓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도 힘이 아닌 부드러운 손길로 품 안으로 엉겨 붙던 나를 떼어낸 진희는 순백의 눈동자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행복하게 해줘, 행복하게 해준다며…약속했잖아…."

애원하듯 그리 말하며, 진희의 손을 붙잡자.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진희는 말없이 내게 입술을 포갰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두려움을 그대로 짓눌러버리는 듯한 그 온기에 심연에서 빛을 찾은 아이처럼 나는 참지 못하고 몸을 밀어붙이며 진희와 혀를 섞었다.

혀가 얽힐 때마다, 내 안을 가득 채우던 두려움과 공포가 달콤한 쾌락에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내 윗입술을 장난스레 살짝 깨물고, 혀 아래를 긁으며 진득한 타액을 주고받는 뜨거운 키스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 몽롱함에 나는 공포에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몸에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매일 같이 성현이에게 발정하던 몸뚱이가 오늘은 진희가 전해주는 달콤한 쾌락에 반응했다. 달뜬 숨을 내뱉으며, 진희가 도망가지 못하게 목을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으려 몸을 밀착했다.

혀가 얽힐 때마다 들려오는 음란한 소리가 더욱 쾌락을 증폭시켰다. 공포와 두려움에 흘렸던 눈물은 쾌락과 안도의 눈물로 변해버렸다. 달콤했다. 애무하듯 혀를 얽힌 것보다, 내 두려움과 공포를 위로하듯 등을 쓸어내리는 따스한 손길에 진희의 존재가 여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기한신도 조민성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진희만 내 곁에 있다면 그 누구도 나를 해하지 못할 테니까.

키스를 멈춘 진희가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약속했잖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그 말에 생존본능이 미친 듯이 날뛴다. 당장 도망치라고, 거미줄에 몸을 내던지지 말라고. 본능이 온갖 소리를 내지른다. 그런데도 나는, 진희를 놓칠까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진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알았지?"

그 달콤한 유혹에 온몸이 가시로 뒤덮인 수풀에 떨어진 듯한 소름이 올라왔다. 그런데도 나는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애원하듯 대답했다.

"그럴게."

그 말이 정답이었는지. 어깨에 파묻은 얼굴을 떼어낸 뒤, 보상으로 다시 달콤한 입맞춤을 한 뒤. 진희는 내 귀에 뜨거운 숨결을 뱉으며 작게 속삭였다.

"성현이는 다른 여자랑 있나 보네?"

"응…."

"아린이는 위로가 필요한데 말이야."

그 말에 대답할 시간도 없이 진희는 또다시 내 턱을 당겨 입술을 덮쳐왔다. 혀가 얽힐 때마다 뇌가 달궈지는 느낌이었다. 열기가 치솟은 몸은 매일 같이 느꼈던 자극과는 다른 쾌락에 더욱 흥분했다. 본능적으로 감았던 눈을 떠, 진희의 새하얀 눈동자를 응시하자, 그 눈빛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열기로 가득했다.

키스를 멈추고, 진희는 쾌락으로 녹아버린 나를 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은 내가 위로해줄까?"

그 말에 대답하듯, 나는 진희의 몸에 달라붙어 입을 맞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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