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07화 (107/160)

〈 107화 〉 무의식

* * *

낯선 천장…은 아니고. 많이 익숙한 보라색 패턴의 천장이 보였다.

무거운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부드러운 손길이 잠을 몰아내 주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일어났어?"

정신을 잃기 전 나를 쾌락으로 부숴버릴 듯. 무서운 표정으로 애원하는 나를 강제로 절정 시키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스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자연스레 다시 눈을 감게 되었다.

정신을 잃은 나를 어떻게 씻긴 다음, 물기를 닦아내고 잠옷까지 입혀놨을까. 조금 신기하긴 했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을 텐데.

정신을 잃을 정도로 격렬한 섹스를 하는 게 정상적인 걸까. 성현이와 섹스를 하면 거의 무조건 정신을 잃게 되니, 지금처럼 섹스했다가는 정말 내게 큰일이라도 나는 거 아닐까 조금 걱정이 들었다.

조금 전 느꼈던 쾌락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랑이사이가 욱신욱신하며 곧장 애액을 흘릴 정도로, 성현이는 나를 성욕에 푹 절인 암컷으로 만들었다. 내 안의 깊숙한 곳을 푹 찔러 긁어내듯 휘젓는 것은 성현이가 아니었다면 절대 나 혼자서는 알지 못할 쾌락이었으니까.

아. 또 생각해버렸다.

아랫배가 자연스레 꾹꾹 눌리는 게 느껴져, 한숨을 내쉴 때 성현이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내 미간을 꾹 눌러줬다. 그 손길에 슬며시 눈을 뜨자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성현이가 따뜻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려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무슨 생각해?"

"섹스하면 정신 잃는 거…위험한 거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어."

부끄러움에 입술을 오물거리며 대답하자. 성현이는 웃음을 지으며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나는 기쁜데. 정신을 잃을 정도로 나와 섹스하는 게 행복하다는 거잖아."

"...그렇긴 한데."

내가 걱정하는 건 그거랑은 좀 다르긴 하지만. 성현이와 섹스하는 게 행복하지 않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라고 말 못하니까.

홍콩이 아니라 강제로 좌석에 묶어 세계 일주를 가버리게 하는데. 이것이 진짜 행복인가 아닌가 고민하고 있자. 성현이는 몸을 돌리더니 무언가를 집어 내 입에 넣었다.

"포도야. 임유모님이 갖다주셨어."

그 말에 안심하고 입을 오물거리자 맛있는 청포도의 맛이 느껴졌다. 내가 오물거리자 재밌다는 듯 또다시 내 입에 포도를 먹여주는 성현이덕에 침대에 누운 채 얌전히 포도를 받아먹으니, 어디 로마의 귀족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임유모가 눈치챈 거 아니야?"

"눈치 못 채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그렇게 소리 질러 놓고."

성현이의 말에 부끄러워져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이제 임유모 얼굴을 어떻게 볼까.

"괜찮아. 임유모님도 이해하신다 했으니까."

내 입에 포도를 넣어주며, 안심시키는 성현이의 모습에 입을 우물거리자. 성현이는 내 볼을 쿡쿡 찔러댔다.

"왜 눌러?"

"귀여워서."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만 부끄러울 수는 없다는 반발심에 나도 손을 들어 성현이의 볼을 쿡쿡 찔렀다. 내 행동에도 아무 말 없이 볼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왜 안 물어봐."

"물어보길 원하는 것 같아서."

"...나를 너무 잘 알게 된 것 같아."

내 말에 미소 짓던 성현이는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너 잠들어있는 동안 생각을 좀 정리해봤어. 그리고, 아직 이해 안 되는 게 있어서…물어봐도 될까?"

성현이의 진지한 목소리에 상체를 일으켜 바라보자. 성현이는 궁금했던 것들을 내게 물어봤다.

"일단, 네 말대로 이게 소설 속의 이야기인 것을 전제로 얘기할게. 소설의 시작이 소니아에게 내가 동정을 잃고 능력을 각성하는 걸로 시작해서 네가 막은 거잖아. 그럼 그것 때문에 일어난 나비효과는 있었어?"

성현이의 각성을 뒤로 미뤄 일어난 일.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봤다.

"소설이랑 다른 점 말이야."

"아. 원래 네가 생존 실습 때 한서아랑 엄청나게 섹스하는데 그게 바뀌었어. 그리고 나랑 사귀게 된 거랑 원래 조민성이랑 라이벌이어야하는데 아닌 것 정도?"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라 그렇게 말하니 성현이는 내 말을 듣고 무언가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백진희가 내게 공략당해 배신당했다는 말은 무슨 말이야?"

성현이의 말에 내가 너무 축약해서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세히 설명해줬다.

"백진희는 나처럼 소설 속에 빙의했는데 회귀도 할 수 있어. 처음 소설에 들어왔을 때 지금의 나처럼 너랑 사랑에 빠져서 지금 나처럼 너에게 모든 걸 고백했다가… 너한테 배신당해서 사지가 절단돼."

그 말을 하다 보니 조금 두려움이 들었다. 지금 갑자기 성현이가 돌변해 내 팔다리를 자른다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충격에 백진희처럼 백치가 돼버리지 않을까.

내가 조금 두려워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성현이는 걱정하지 말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내가 왜 배신 했는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응?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냥 사랑한다고 하더니 갑자기 뒤에서 찔렀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고."

턱을 긁으며 무언가 생각하던 성현이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유 없이 그러진 않을 것 같아서."

"응,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연중 되기 전까지 내가 좋아하던 너는 이유 없이 그럴 놈은 아니었으니까."

내 동의하는 말에 성현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볼을 꼬집으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내 팬이었구나?"

"뭐, 뭐래."

"좋아하던 소설주인공이랑 사랑하니까 기분이 어때? 연예인이랑 연애하는 기분인가?"

그 장난스러운 물음에 나는 얼굴이 빨개져 시선을 피했다.

"난…좋아한 게 아니라 그냥 응원한 거야…내가 남자를 왜 좋아해."

내 말에 성현이는 볼을 꼬집던 손을 내려 잠옷 위로 내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 손길에 놀라 몸을 움찔하니 성현이는 작게 속삭였다.

"나 안 좋아해?"

"...너 빼고 다른 남자를 왜 좋아하냐고 말한 거야."

내 변명에 성현이는 웃으면서 가슴에서 손을 떼고 나를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따스한 체온, 중독성 있는 성현이만의 체취에 순식간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가장 묻고 싶었던 게 하나 있어."

"응…뭔데?"

"너는 이 세계를 어떻게 생각해?"

성현이의 말에 나는 무언가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연히…소설 속 가상의 세계라고 생각했었다.

그저,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 김성현도 조민성도 소니아도.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성현이를 갖고 싶었다. 내 옆에 두고 싶었고 같이 영원히 사랑하고 싶었다. 임유모와 차기사님과도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권을 준다면….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있을까. 소중한 사람. 소중한 인연들을 뒤로 할 수가 있을까.

"처음엔…그저 소설 속의 세계라고만 생각했어. 누군가 잘 만들어낸 가상현실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어. 내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너와 백진희.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의 실물을 볼 때마다 이 세계가 허구라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원래라면 하지 않을 짓도 많이 했어."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세계. 나는 그걸 지켜보던 독자였을 뿐이었다. 소설 속 묘사에 내가 상상했던 것과 실제로 봤을 때의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나와 외모의 순위를 다툰다던 백진희는 내가 봤던 그 어떤 여자들보다도 아름다웠고, 권선징악. 세계를 위한 자기희생을 하던 김성현이 각성하기 전에는 얼마나 성욕 덩어리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마인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한 줄의 글을 봤을 때와. 초월역에서 성현이를 만나러 걸어갈 때 보았던 이름 모를 사람들이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의 괴리감은 상당히 컸으니까.

"소설 속 세계이고, 허구인 걸 알지만…그래도 이제는 소중해졌어. 널 만나서 행복하고…같이 있고 싶고. 지금 있는 이곳이 좋아졌어. 네가 나에게 현실을 가져다주니까."

내 대답에 성현이는 묘한 눈빛으로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 밝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내게 입맞춤을 했다.

"만약,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거야?"

"너랑 함께하는 게 아니면 싫어."

성현이의 말에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나도 그래."

품속에 나를 끌어안고 있던 성현이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들이쉬며, 내가 어디론가 사라질까 두려운지 숨쉬기 힘들 정도로 꽉 껴안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내가 숨을 못 쉰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팔에 힘을 푼 성현이 덕분에 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성현이를 노려봤다.

"힘 조절 좀 해."

"미안, 아직 적응이 힘들어."

미안해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성현이의 가슴에 뒤통수를 갖다 대고 몸을 기댔다.

"또 물어볼 건 없어?"

"음…. 백진희랑은 지금 무슨 관계야? 너를 세뇌 했었다며."

성현이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백진희와 무슨 관계인지 생각해 봤다.

"백진희는 내가 행복하길 바란대. 그래서 세뇌한 거고 그거에 대해서는 더는 얘기하지 않기로 했어."

"정말?"

"응. 조금은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지만 내 행복을 위해 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으니까. 백진희는 어떤 방법이든 내가 행복해지기만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거든.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중시하는 싸이코 느낌이랄까. 지금도 백진희는 내 행복을 위한다는 말로 무언가를 꾸미고 있어. 기아스도 그 계획 중의 하나였을 거고."

기아스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왼손에 시선이 갔다. 이제는 새끼손가락에 남아있던 붉은 실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던게 사라진 기분이라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 말을 들은 성현이는 말없이 내 배에 손을 올려놓고 침음을 삼켰다.

배에 올라와 있는 핏줄이 튀어나와 있는 남자다운 손을 바라보다. 괜히 자세 때문에 뱃살이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슬쩍 배 위에 얹은 손을 치울 겸 손을 잡았다.

한참을 조용히 무언가 생각하던 성현이는 잡은 손을 주물럭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혼수상태일 때…. 백진희랑 얘기를 나눴어."

"무슨 얘기?"

"네가 깨어나기를 거부해서. 내가 직접 너를 구해야 한다고."

그 말에 나는 꿈이라고 생각했던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깊은 피의 심연에 잠겨 있던 나를 붉은 실로 만들어진 낚싯줄로 끌어올리던 누군가의 목소리.

"그거 너였구나."

단순히 지독한 고통이 만들어낸 환각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성현이었다니 조금은 놀라웠고, 그 자책과 질식의 지옥에서 날 끄집어내 줘서 고마웠다.

"백진희가 네 심상(心?) 안으로 들어가게끔 도와줬거든. 그래서 너의 심상에 들어가 기아스를 이용해 너를 구해 낼 수 있었어."

"고마워 성현아."

"아니야, 널 구하는건 당연한 거니까. 나는 당시에 믿을 사람이 없어서 조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는데. 백진희가 나를 도와줬어. 네가 깨어나기 전에 백진희와 만나 마석에대해 알아봤고 백진희가 찾아낸 마인을 죽이기도 했어. 백진희가 너한테 마석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몇 번이나 내게 설명했거든."

성현이의 말에 마석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생존 본능이 떠올랐다. 금제 속에 있던 신아린이 내게 마석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신재호와 백진희가 설계한 거미줄. 그건 도대체 무엇일까.

"백진희가 정말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면, 더는 마석을 사용하지 마."

내 생각을 읽듯 그렇게 말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조금 궁금증이 생겼다. 성현이는 어떤 의미에서 저 말을 한걸까?

"왜?"

"그날 너에게 퇴원 선물이라고 너에게 마석을 건네기 전에 네가 만약 거부한다면 억지로라도 마석을 흡수하게 하라고 백진희가 말했거든. 나는…너한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억지로 강요했고."

자기 행동을 자책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는 말없이 성현이의 팔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너한테 사랑이라고 둘러대면서 강요해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축 늘어진 입꼬리에 괜스레 마음이 아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스레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괜히 분위기가 처지는건 싫었으니까.

"그래. 앞으로 섹스할 때도 억지로 정신 잃을 정도로 막 가게 하려 들지 마. 그것도 쾌락 강요야!"

"아, 그건 빼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즉답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성현이는 언제 축 늘어졌냐는 듯 길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아직 나는 용서 안했는 데?"

"으, 응?"

분명, 입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묘한 불안감에 슬쩍 몸을 뒤로 빼려 하자. 내 어깨를 붙잡고는 으르렁거리듯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한신에게 조교 당한 일. 내게 숨긴 거."

"조, 조교가 아니라…체벌이었어…. 그것도 억지로."

내 말에 성현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엉덩이를 맞으면 자세를 바꾸고, 허벅지를 두드리면 위로 올라타려 하면서?"

"그, 그건 무의식중에…."

"그게 용서가 안 된다는 거야. 의식한 것도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게."

분노한 목소리로 나를 노려보는 성현이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 것에 누군가 흔적을 남겼다는 게 미치도록 화가나."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지그시 눌러 나를 침대에 눕혔다. 저항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했다.

저 눈빛을 볼 때마다 나는 아랫배가 쿵쿵거리며, 앞으로 다가올 쾌락에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움찔움찔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

내 몸은 이미 김성현이 가져다줄 쾌락에 내 통제를 무시했으니까.

침을 삼키며 두려운 눈으로 성현이를 바라보자. 시선을 마주한 성현이의 눈빛에는 진득한 정복감이 깃들어 있었다.

기아스를 파훼한 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야수의 목줄을 풀어버렸더니 내 목덜미를 물고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자기 몸 아래 깔아뭉개 버렸다.

성현이에게 걸려 있던 목줄이 이제는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내 몸을 구속해버렸다.

"무의식도 나를 원하게 해줄게."

나를 내려다보는 갈색의 눈동자에 깃든, 대답을 강요하는 듯한 눈빛에 나는 묘한 기대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