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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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아린이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카데미에서 졸업할 때까지 네가 [공략 플래그의 달인] 능력을 각성하지 못하게 동정으로 남게 하려고 했던 거야."
아린이의 말에 첫 만남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내게 사과하던 것도…. 내가 각성할까 봐 막아선 것에 대한 사과였던 걸까….
"그러다, 백진희한테 세뇌당해서 너한테 끌려다니다가 사귀게 되고, 너한테 혼전순결이라고 거짓말하면서 네가 다른 여자랑 섹스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어. 그래서, 기아스로 너랑 나를 묶어놓은 거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진희에게 세뇌당했다는 말은 또 뭘까.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아린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나랑 사귄 건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각성할까 봐 그런 거야?"
"...응."
아린이의 대답에 쓴 것을 삼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배신감이라는 감정인 걸까. 그동안 아린이와 보냈던 추억이 거짓이 된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왜 각성하는 걸 막으려 한 건데."
"소설에서 너는 다른 여자들을 공략하고 다녔고…그 중에 하나가 내가 될 것 같아서 그게 두려웠거든."
"나한테 공략당할까 봐. 무서웠다고?"
"그래, 나는 남자니까. 같은 남자한테 따먹힌다고 생각해봐 당연히 거부감이 들지. 그래서 막으려고 했었어."
아린이의 말에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연신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아린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왜 잔 거야? 아니, 나를 사랑하긴 했어? 사랑한다고 한 말도 거짓말이었던 거야?"
내 말에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아린이는 시선을 내리깔며 작게 대답했다.
"같이 있다 보니 좋아져서…널 속이는 것도 힘이 들었고…. 처음엔 거짓말로 사랑한다 했는데…나중엔 진짜였어."
힘없어 보일 정도로 어깨가 처진 아린이의 모습에 평소처럼 품 안에 끌어안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린이의 떨리는 손만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백진희가 세뇌했다는 건 무슨 말이야."
"백진희도 나와 같이 빙의자야. 예전에 너한테 공략당해 배신당한 과거가 있어. 그래서 나를 세뇌해서 자신을 대신해 나를 너랑 사랑에 빠지게 했어. 기아스로 우리의 운명을 엮었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뇌진탕이라도 걸린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아린이뿐만이 아니라 백진희도 빙의자라니. 예전에 공략당했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일까.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시 멍하니 있자,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린이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너한테 건 기아스를 [파훼]할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
"글쎄, 아마도 네가 날 지금처럼 좋아하진 않겠지…아니면, 싫어하게 되거나. 사실 나도 잘 몰라. 기아스라는게 소설에 나온 설정이 아니거든."
연신 불안한 듯 흑요석 같은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에 아린이도 진실을 밝히는데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진실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용기를 낸 것이다.
지금까지 나를 속여왔다는 아린이의 말에 배신감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지금 내가 아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영향을 주진 못했다. 애초에 우리의 시작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아니었으니까.
"...기아스를 꼭 파훼해야 해? 난 지금 우리 사이 괜찮은 것 같은데."
내 말에 아린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내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잡고 있던 손을 꼼지락거렸다.
"나…남자라니까? 너 속이고 사귄 거라고…."
"알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그래서 말하는 거야. 지금은 나 사랑한다며 그거면 됐는데 난…."
내 말에 아린이는 감동을 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보다 잡은 손을 풀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래서 기아스를 파훼해야 한다는 거야.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도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내 감정을 기아스탓으로 돌리는 아린이의 모습에 조금 반발심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고, 내가 사랑하는 것인데 왜 기아스때문에 사랑한 것처럼 말하는 걸까.
"그럼, 기아스를 파훼하면 내가 너한테 화낼 거라고?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 아냐?"
"아니, 기아스는 구속이나 그런 힘이 있는 유물이니까. 그냥 너는 나를 사랑하게 세뇌당한 거야. 내가 너에게 기아스를 걸었을 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해서…."
"그게 아니면? 기아스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영원히 널 사랑하게 됐다면?"
내 말에 아린이는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럴 리 없어."
"그래, 그럼 파훼해. 나도 궁금하네 내가 어떻게 변할지."
조금 감정이 상해 비꼬듯 대답하자. 고개를 들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려는 듯 빤히 바라보는 모습에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자,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내게 다가와 나를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그동안 미안했어. 널 속인 것도 이용한 것도… 다 내 잘못이야."
아린이의 목소리에 짙게 깔린 후회와 죄책감에 나는 말없이 아린이를 끌어안아 따스한 체온을 느꼈다.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다, 아린이는 내게서 떨어져 왼손을 허공에 들었다.
"이제…할 게."
"응."
정말로 아린이 말대로 기아스때문에 사랑했던 걸까. 조금은 불안해졌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 내가 느꼈던 행복이 사실은 기아스로 만들어진 허구이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나와 같은 두려움을 느낀 건지 겁을 먹은 것처럼 몸을 작게 떨며 심호흡을 하던 아린이는 오른손에 검은색의 검을 만들어 냈다.
왼손의 새끼손가락 근처로 검을 가져다 대는 모습을 지켜보며 긴장한 채 침을 삼키고 있자, 아린이의 조금 물기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웠어 성현아."
그 말과 함께 아린이가 새끼손가락에 있는 옅은 붉은 선에 검을 가져다 대자, 붉은색의 마나가 요동을 치며 전에 보았던 붉은 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린이도 붉은 실이 보이는지 허공에 시선을 옮겼다가 나를 바라봤다.
망설이는 듯한 눈빛. 누군가 억지로 떠민 일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린이에게 괜찮다며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여주자. 아린이는 검을 휘둘러 우리에게 연결된 [붉은 실]을 끊어냈다.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 붉은 실은 빛을 잃어가며 사라졌고, 내 손에 남아 있던 옅은 붉은 선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붉은 실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아린이를 바라보니. 조금 물기 있는 눈으로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나 이제 싫어졌어…?"
울먹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에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변한 게 있나…? 붉은 실이 끊어진 것을 봤으니 기아스는 사라진 것 같은데.
"잠시만... 신아린 상태창."
어차피, 내 능력에 대해 알고 있으니 대놓고 확인해도 되겠지. 내 말에 놀란 눈으로 변한 아린이의 시선을 받으며, 상태창을 확인하자.
◇김성현과 기아스로 묶여 있음. 이라고 적혀 있던 슬롯이 사라진 게 보였다.
상태창으로 확인해 보니, 확실히 우리를 묶고 있던 기아스가 사라진 게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 손을 흔들어 상태창을 지우고 아린이를 바라보자, 사형 집행이라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불안한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게 보여. 조금 장난기가 돌았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린이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하자. 망설이며 내게 다가온 아린이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내 눈치를 보는 모습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가학심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내 마음을 모르겠어."
"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린이의 모습에 내 안에 있던 음흉한 악동이 간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기아스가 묶어놓은 건 내 안에 있는 음흉함이 아니었을까.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그 말과 함께 아린이의 붉은 입술을 맞대며, 움찔거리며 도망치려는 아린이를 양팔로 붙잡고, 입을 벌려 입술을 혀로 핥자 꾹 닫혔던 입술이 조금씩 벌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모른 척 계속해서 윗입술을 혀로 핥자 참지 못했는지 벌어진 입술 틈으로 아린이의 혀가 빠져나와 내 혀를 휘감으려 했다.
내 혀를 휘감으려는 아린이의 혀를 피해 혀를 슬쩍 뒤로 빼자,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뭐해`라는 시선을 보내는 아린이의 모습에 웃으며 방황하는 아린이의 혀를 뜨겁게 휘감았다. 키스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린이는 곧 본능대로 내 머리를 붙잡고 최대한 혀를 빼내며 타액을 섞었다.
한동안 서로의 타액을 주고받으며, 혀를 휘감자 나는 본능적으로 아린이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속옷의 패드 너머로 느껴지는 뭉클거리는 가슴의 감촉에 딱딱하게 발기하는 것을 느끼며, 아린이의 옷을 벗기려는데. 키스를 멈추고 아린이가 내 팔을 붙잡았다.
"잠, 잠깐. 확인했잖아."
"뭘…?"
아린이의 뜬금없는 말에 나도 당황해 되묻자. 아린이는 나를 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키스 어땠어…? 평소처럼 좋았어? 아니면, 기분 나빴어?"
부끄러운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키스가 어땠냐고 물어보는 아린이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예뻐 보여, 말없이 손을 끌어 발기한 자지에 가져다 대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내는 모습에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아, 아니!! 바보야! 성욕 말고! 기분이 어땠냐고 물은 거잖아…."
그 말에 나는 웃음을 멈추고, 무릎 위에 앉혀놓은 아린이를 부드럽게 침대 위로 눕히며 몸을 밀착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흑요석 같은 검은 눈에 담긴 불안감에 장난을 멈추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춘 다음 작게 속삭였다.
"언제나처럼 사랑스러웠어."
내 말에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아린이가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는지. 이리저리 눈을 돌리기에, 다시 입술을 맞대자 그제야.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티셔츠를 벗기려 손을 내리자, 아린이가 황급히 내 손을 붙잡았다.
"왜?"
"아, 아니…. 너 내가 말한 거 기억하지? 나 원래 남자였다고…."
"알아. 기억해 빙의자라며."
26살이라고 했나. 그럼 몇 살 차이지…. 9살 차이인가?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아린이의 모습에 덩달아 나도 의문에 휩싸였다.
"아, 혹시 형이라고 불러야 해?"
"...그게 아니라!!! 원래 남자라니까?"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주고받다 답답했는지 아린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 않아…? 내가 남자였다는 게? 나는 솔직히 조금 그래. 나는 원래 이성애자였으니까…. 그래서 너 각성하는 것도 막으려고 한 거였고."
아린이의 말에 무슨 말을 하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아린이는 빙의전 자신의 `성`대로 자신을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사실은 남자였다! 라고 밝혀도. 섹스하지 않았던 때라면 모를까, 침대 위에서 온갖 것들을 다 했는데 갑자기 정신적으로 `남자`라는 이유로 거부감이 들 리가 없다. 그도 그럴 게 방금의 키스는 평소처럼 무척이나 뜨거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야했으니까.
아린이의 음란한 몸은 여전히 나를 흥분시켰고, 입술은 부드러웠다. 어차피 육체는 `여자`니까 상관 없는 거 아닐까. 아린이가 남자에게 따먹힌다는 거부감이 있다 해도…. 나는 그저 평소처럼 아린이와 뜨거운 섹스를 할 뿐이니까.
정신적으로 남자든 여자든. 보지는 보지였으니까.
아린이는 누가봐도 아름다운 여자였고, 내가 사랑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거기에 스스로 `남자`였다고 말하면서도 평소처럼 키스 할 때 본능적으로 내게 몸을 밀착하며, 오래 키스하고 싶어서 내 머리를 붙잡질 않나. 내가 혹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이는데 어떻게 `남자`로 대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내 안에 있던 음흉한 악동은 간만에 등장한 만큼 아린이의 불안함을 해소하기보다는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듣고 보니 그렇네…."
내 말에 몸을 크게 움찔하며,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는 눈빛에 당장에라도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아린이에게 말했다.
"휴, 그럼…어떻게 할까. 솔직히, 난 모르겠어…. 아직 내 마음이 어떤 건지…."
내 말에 이별이라도 통보받은 사람처럼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갈 뻔한 걸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그, 그래…당연히…그렇겠지…너도 게이는 아닐 테니까…."
울먹거리며 풀죽은 모습을 보이는 아린이의 모습에 웃음을 꾹 참느라 내 입에서 조금 슬픈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인해…볼까…. 내가 아직도 너를 사랑하는지? 나도 알고 싶어…."
내 말에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린이를 보며 슬며시 가슴을 만지자. 황급히 내 팔을 붙잡고는 변명하듯 말했다.
"아, 아니. 그래도 이건…."
"일단 몸은 여자니까…스스로 남자라고 했으니까…느끼지는 않을 거 아냐?"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나는 더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 아린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나도 확인하고 싶어. 네가 날 아직도 사랑하는지."
내 말에 아린이는 내 몸도 떨릴 정도로 크게 몸을 움찔했다.
"기아스가 사라졌다고 이제 내가 싫어진 거 아닐까… 걱정이 들크흡…."
마지막에 웃음이 터져 나와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필사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았다. 웃을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걸까. 웃음을 참느라 몸을 들썩거리고 있자. 내가 울고 있다고 오해했는지 아린이는 내 등을 위로해주듯 쓸어내리며, 물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마음은 그대로야…."
그 말에 나는 대답 없이 아린이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기아스가 파훼 되고 뭐가 변한 건지 [이해]해버렸다.
그동안 아린이를 사랑한다며, 먼저 만지지도 않는다. 소중하게 아껴주겠다고 스스로 제한을 걸어놓았던 게…풀려버렸다.
물론, 지금도 소중하게 아껴주고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지만….
순수한 사랑보다 자극적인 사랑이 내 입맛에 맞으니까.
아린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오래간만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