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고백
* * *
한참을 침대에 누워 신아린의 기억을 정리했다. 몰랐던 것들과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 정리하자. 두통이라도 난 듯 머리가 아파져 왔다.
정리한 것들을 떠올리자면….
신아린의 아버지 신재호는 자기 딸을 이용해 차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마왕으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사람을 잡아먹게 했다.
그리고, 신재호는 에르엘이라 불리는 마인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기억 속에 종종 등장해 나를 고문해 `갈증`을 유발하게 만들어 사람을 잡아먹게 했다.
마석을 흡수할수록 마인의 힘이 강해지고, 내가 강해지는 걸 신재호와 백진희가 바라고 있다는 신아린의 말에 나는 그 둘의 공통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둘은 과정이 어떻게 되든 나의 행복을 원한다. 내 마음이 짖이기고, 찢겨나가고 감정이 없는 인형이 돼도. 자신들이 정해놓은 행복이라는 단어에 나를 억지로 욱여넣는 것이다.
신재호는 평범하게 살다가 자신이 만들어낸 마왕이 되는 길을 걷길 원하고, 백진희는 내가 김성현과 사랑하며 행복하게 있는 것을 원하고. 아니, 솔직히 백진희의 진의는 모르겠다.
신재호와 같이 내가 마왕이 되길 원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자신이 공략당할까 무서워 나를 내세운 것뿐일까.
기억 속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내 아버지 신재호의 본모습을 보게 된 것보다. 조민성에게 갖고 있던 신아린의 동정심과 고마움이 남은 기억에 조금은 놀라웠다.
`푸른 마나 살인귀`라는 악명을 가진 조민성이 불우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 초월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게 도와줬다는 점까지.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있던 조민성에 대한 살의가 조금은 칼끝이 흔들릴 정도로 변했다.
조민성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고개를 내려 왼손에 찬 요정왕의 팔찌를 매만졌다.
사람을 죽이는 쓰레기는 분명하다. 영또플에서도 그 점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애초에 `살인귀`라는 악명에 가까운 칭호가 그 사실을 증명해주니까.
작가의 숨겨진 설정 같은 것이 있는 걸까. 조민성에 대해서는 조금 더 조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다음은 백진희.
신아린은 기아스도 백진희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이해]한 결과로는 백진희는 단순한 회귀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금제 속에 있던 신아린도 트페레밧의 봉으로 본 백진희의 오래된 기억을 읽었을 터이니. 백진희가 회귀자라는 사실만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회귀자가 아니라 이 세계의 설정을 바꾼다는 말을 언급한 걸로 보아. 무언가 백진희가 짜놓은 판은 아직도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왼손에 얕게 남은 붉은 선을 만지며, 기아스가 성현이의 목줄이라고 필사적으로 외치던 신아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김성현을 통제해서는 안 돼`라고 말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다.
원작에서 김성현과 지금 김성현의 차이. 아마도, 나에 대한 광기가 아닐까.
본래 김성현은 하렘을 만들어 비중이 없던 한서아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사랑을 주고, 아껴주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처럼 `다른 여자들은 오나홀`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물론, 오나홀처럼 다루긴 했어도 각 히로인들마다 애정을 가졌고, 그것 때문에 자연스레 누가 정실이냐를 두고 `백진희 코인`, `레이나 코인` 등 독자들끼리 여러 히로인을 두고 싸워댔을 정도로. 조금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딱 한 명에게만 사랑을 집중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를 공략했을 때 그 코인이 잠깐 반짝이며 상승하다가, 다음 히로인이 나오면 코인이 떡락하며 여타 히로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으니까.
물론, 백진희는 상당히 매력적인 히로인이었고 공략하기 힘든 히로인이어서 그만큼 독자들이 [다른 창녀들이랑은 다름 ㅋㅋ] [이미 허벌인 애들이랑 백진희는 결이 다르지 ㅎ] [쪼임도 다를듯 ㅋㅋ] 라며 댓글을 달 정도로 정실 취급을 받긴 했다. 나도 그중에 하나였고….
기아스를 해제하면 김성현은 원작의 모습대로 한서아와 레이나에게 지금과 달리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차라리 지금보다는 그게 더 나을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기아스는 해제하는 게 맞다. 원작대로 김성현이 영또플의 마지막 보스인 나를 공략하는 게 [큰 흐름]에 적합할 테니까.
김성현과 연결된 기아스를 [파훼]하기로 결정하고, 다음으로 정리한 기억을 되짚어 봤다.
신아린의 전투 능력.
신기하게도 기억이 돌아와서인지 검을 어떻게 다루는지, 어떻게 쥐고 베어야 하는지, 신아린이 배웠던 검술이 무엇인지까지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아직 테스트해보지는 않았지만, 능숙하게 검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전의 신아린이 알아낸 마인화의 활용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 나는 단순히 검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 마인화인줄 알았으나. 기억속의 신아린이 훈련하는 것을 보고 엄청 비효율적으로 마인화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칠격에서 신아린에 대해 조사 보고서를 만들었을 때. 초월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능력에 대해 `검을 검게 만듦`이라는 설명을 했었는데. 멍청하게도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단순히 들고 있는 검을 검게 물들이며 마인화를 유지하는 것과 검이 없는 상태에서 마력으로 검을 만들어 검게 물들이는 것의 차이는 당연하였던 것이니까.
마석을 흡수하기 전에도 검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 마인화는 1분을 넘었는데, 검을 만드느라 마력이 부족해 10초도 유지 못 한 것이다.
즉, 지금 상태에서 내가 검을 소유한 채 마인화를 한다면…못해도 1시간은 넘게 마인화를 유지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인화를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고 봐도 무방했다.
[파훼]의 권능을 제외하고서도, 검을 들고 있을 때 느껴지는 세계가 멈춘 것처럼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초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초고속]은 마인화의 기본 능력이었으니까. 조민성과의 싸움에서 초고속이 가져다준 이점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권능]을 사용한 채 마인화를 유지하는 건 또 다른 얘기이니 이것도 확인이 필요했다. 그동안 안일하게 살아왔던 것들이 한 번에 돌아오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많이 지나, 밥을 먹고 있었는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밥을 먹던 김비서가 나를 보고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기에 고개를 저으며, 옆의 의자에 앉아 임유모에게 나도 밥을 달라고 손짓을 했다.
"됐어. 밥 먹어."
"아, 예…."
밥을 먹으면서 넌지시 김비서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혹시 내 칠성 어디 있는지 알아?"
기억 속에 신아린은 항상 자신의 검을 갖고 다녔다. 심지어 따로 이름까지 붙일 정도로 애정을 품고 있던 검이었는데 칠성이라는 애칭과 다르게 본래의 이름은 패도칠성검(?七??)이라는 유물이었다. 영또플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유물이어서 기원은 정확히 모르나, 차성의 후계자가 사용하는 검답게 예사검이 아니었다.
"...칠성 말입니까? 아, 검 얘기하시는 겁니까. 그거 저번에 공방에 관리 맡기시지 않았나요?"
잃어버렸던 신아린의 기억이 돌아오긴 했으나, 그런 세세한 일까지 기억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김치를 떠먹고 있는 김비서를 빤히 바라봤다.
"...하실 말씀이?"
"뭐겠어, 검 가져오라고."
내 말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김비서는 황급히 물을 삼켜 입안의 음식물을 삼켰다.
"당장 갔다 오겠습니다."
"고마워."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곧장 공방으로 달려 나가는 김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래서 높은 사람들이 비서를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편리해.
***
"후, 시발."
긴장으로 굳었던 몸을 풀며 짙은 한숨과 함께 담아놨던 욕을 내뱉었다.
가디언즈의 입단 시험에 통과했다. 곧장 면접까지 볼 줄 몰랐기에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다행히 영웅 협회에서 면접관으로 나온 사람 3명 중에 2명이 여자여서,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냥 네. 라고만 대답해도 알아서 확대해석해주며 여자 면접관들은 높은 점수를 주었다.
입단 시험에 통과했다고 바로 가디언즈가 되는 것도 아니고, 2년간의 인턴 기간을 거친 뒤. 가디언즈들의 동의를 받아 가디언즈에 합류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내 목적은 가디언즈에 소속되는 게 아닌, 가디언즈에 소속된 [초월자] 여자들을 공략하는 게 내 목적이었다.
어찌 됐든 인턴이라 해도 가디언즈 입단 시험에 통과했다는 사실이 기뻐, 아린이에게 곧장 합격했다고 연락을 하자. 아린이도 기뻐하며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 했다.
택시를 타고 아린이가 살던 집으로 가자. 마중이라도 나온 건지 멀리서 아린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기다려주고 있던 걸까. 기쁜 마음에 아린이에게 다가가다, 조금 달라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밤의 달빛을 받아서 그런 걸까. 아린이의 분위기가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변했다는 게 느껴졌다.
"안녕."
내게 짧은 인사를 건네며 예쁜 미소를 짓는 아린이의 모습에 평소보다 더욱 크게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이 또다시 눈앞의 여자에게 반했다는 증거였다. 여느 때처럼 입술을 맞대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부끄러워져 괜스레 뒷머리만 긁었다.
"왜 나와 있어 안에서 기다리지."
"너 온다고 했잖아. 바람 쐴 겸 나왔어."
그렇게 말하며 내 팔에 팔짱을 끼는 모습에 처음 데이트하듯, 괜스레 조금 팔짱을 낀 팔의 근육에 조금 힘을 주게 된다.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걸어가며 얘기를 나눴다.
"밥은 먹었어?"
"응, 난 아까 먹었어. 너는?"
"난 면접 보기 전에 먹었어."
그 말에 아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풀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방금까지 팔을 감싸던 따스한 온기가 사라지자 짙은 아쉬움이 마음에 남았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입단 시험에 관한 얘기를 하며,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아린이의 방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린이의 침대를 보고 전의 기억이 떠올라 조금은 어색하게 침대에 걸터앉자. 아린이는 내 옆자리에 앉아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저 묘한 눈빛을 볼 때마다 항상 내 예측을 넘어서는 것들이 저 예쁜 입에서 흘러나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성현아, 오늘은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고백?"
"응. 그동안 너에게 숨겨왔던 것들. 속여왔던 것들 전부."
역시나, 이 소악마는 오늘도 내 예측을 넘어섰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오늘따라 흑요석같이 빛나는 검은 눈이 더욱 깊게 느껴졌다. 아린이의 진지한 태도에 나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너를 속인 게 너무 많아서…. 일단, 처음에 너를 만났을 때 소니아랑 네가 섹스하려던 걸 막았던 거 기억나?"
"응. 기억해."
어떻게 기억하지 못할까. 나에게 사과하며 눈물을 흘리던 아린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때, 소니아를 막아선 건 일부로였어. 네가 변할까 봐."
아린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금 멍청한 시선을 보내자. 아린이도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귀엽게 자기 입술을 손으로 살짝 때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니까, 네가 동정을 잃으면 지금처럼 변하는 걸 알고 막으려 했어."
"...내가 변하는 걸 알고 있었다고?"
이게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정을 떼면 멋있어진다는 걸 나를 처음 본 아린이가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응, 봤으니까. 너는 영또플…. 그러니까, `영웅은 또 플래그를 세웠다`라는 소설의 주인공이야. 소설의 시작이 아카데미 화장실에서 소니아에게 동정을 잃는 것부터 시작이라서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막으러 간 거고."
"...장난치는 거야?"
조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조금 어이없는 눈빛을 보내니, 아린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끝까지 들어줘 성현아."
아린이의 진지한 태도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빙의자야. 원래 신아린이 아니라 남자였어. 그것도 26살 먹은 병장 만기 제대에 공대다니던 남자.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소설 속 히로인에 빙의가 된 거야. 그것도 여자인 `신아린`에게."
자신이 원래 남자라고 말하는 아린이의 모습에 나는 뒷머리를 긁었다. 당장에라도 손을 뻗으면 움켜쥘 수 있는 부드럽고 탱글탱글한 아린이의 가슴이 눈 앞에 있는데. 사실은 남자라고 말해봤자. 솔직히 전혀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제의 일이 조금 충격이었던 걸까.
"동정을 잃으면 네가 [공략 플래그의 달인] 능력을 각성하고. 그걸로 초월 아카데미의 히로인들을 육변기로 만드는걸"
"잠깐, 잠깐. 그…그건 어떻게 알았어?"
"뭘…?"
"내가 [공략 플래그의 달인] 능력을 얻은 거 말이야."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는 비밀이었는데. 당황스러운 내 물음에 아린이도 당황하며 대답했다.
"소설에서 봤다니까…?"
아린이의 대답에 나는 누군가 머리를 세게 내리쳐 뇌진탕에 걸린 듯한 멍한 상태가 되었다.
이거…진짜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