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신아린
* * *
서로의 생각을 읽어보려는 듯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던 우리는 레이나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시선을 돌렸다.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주인님이 말했잖아. 널 위해서라고."
"...끼어들지 마."
내 대답에 레이나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고는 자신 몸에 묻은 것들을 마법으로 닦아내고 다시 옷을 입었다.
"난 오나홀로도 만족하니까. 너무 질투하진 마~"
얄미운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레이나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단둘이 남게 된 방안에는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온기와 야한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화장실에서 수건을 가져와 성현이에게 건네주었다.
"닦아."
정액과 애액이 묻은 자지를 말끔히 닦아낸 성현이는 한숨을 쉬고 내 어깨를 붙잡아 억지로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사랑해 아린아."
"...그래."
"못 믿겠다는 거야?"
또다시 눈빛에 위험한 기운이 깃드는 것을 보고, 나는 울컥해 성현이의 가슴을 세게 내리쳤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내리쳤지만 성현이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방금 행동의 이유를 묻는 듯한 눈빛만 보냈다.
"날 위해서 다른 사람을 헤치는걸,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건 아니지만, 널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어."
그 말에 담긴 진심에 나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성현이를 노려보며 물었다.
"왜…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으니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평소처럼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다들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서 안달인 걸까.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내가 바란 것도 아닌데. 백진희는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이유로 나를 세뇌하고 고문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내 아버지도 행복이라는 이유로 어디선가 사람들을 납치해와 죽이는 걸 돕고 있다.
거기에 온전히 내 편인 줄 알았던 성현이까지, 이런 미친 짓을 할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기에 내가 느낀 배신감은 분노가 되어, 의념을 떠오르지 않아도 마인화를 할 수 있을 만큼, 격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나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려는 성현이의 행동을 막아 세우며, 이를 갈며 말했다.
"날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려면…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굴면 안돼? 나는 그냥 네가 있는 그대로 좋아. 영웅 등급 A? 필요 없어. D일 때도 나는 그냥 네가 좋았으니까."
내 말에 성현이도 화가 났는지. 미간을 좁히며 나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도 네가 좋아. 미친놈처럼 매일 매시간 매 순간 너를 떠올려. 일어나자 드는 생각이 너고, 자기 전에 드는 생각도 너야. 그만큼 소중한 사람을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잃고 나서 후회하고 싶지 않아."
"...너한테 날 지켜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내 말에 성현이는 입술을 깨물더니, 어깨에서 손을 떼고 바닥에 놓인 옷을 입었다.
"레이나도 한서아도…네가 날 좋아하는 것처럼 널 좋아하고 있어. 그러면, 최소한 아껴줄 생각은 해야지."
"그래, 네가 신경 쓰인다면 그럴게."
성현이의 모습에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왜 바람피운 남자친구의 여자들까지 신경 쓰게 되는 걸까.
"내가 원하는 건 그냥 평범한 연인들처럼"
"넌 마인이잖아."
차가운 목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나를 바라보는 갈색의 눈동자도 그 온기가 식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성현이의 말에 나는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의미야."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할 수는 없다는 거야."
성현이의 그 말에 고여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괜스레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 곧장 손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내게는 그렇게 들리는데?"
화가나 비꼬듯 대답하자. 성현이도 화가 났는지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네가 마인인게 밝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그래? 사람들은 널 마인이라는 이유로 죽이려 들 거고, 칠격은 소니아를 죽였을 때처럼 널 사냥하려 할 거야. 소니아처럼 네 얼굴을 씹어먹을 거라고."
"알아, 하지만"
"넌 몰라!!!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얼마나 조급한지!!!"
방안을 크게 울리며 소리치는 성현이의 모습에 몸을 움찔하며 나도 모르게 한걸음 뒷걸음질 치자. 성현이는 나를 벽으로 밀어붙여, 도망가지 못하게 팔로 벽을 붙잡고 나를 매서운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나는 그 모습에 두려움이 느껴져 시선을 내리깔았다. 또 억지를 부리며 나를 설득할까, 강제로 내 몸을 탐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성현이는 내 몸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손대지 않는다고 약속했잖아."
내 생각이라도 읽은 걸까. 아니면 두려워하는 내 표정을 읽은 걸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리깔았던 시선을 올리자….
성현이는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머릿속의 생각들이 모두 지워지며. 성현이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미안해, 울지마 성현아…."
나도 울먹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성현이는 내 손을 꼭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잖아. 사람이든 마인이든 나는 지금 그대로의 네가 좋다고. 평생 사랑한다고 약속했잖아 아린아."
"알아. 어떻게 잊겠어…."
내게 그 말을 해주던 그 따스한 눈빛을 어떻게 잊을까. 아직도 그때 내게 전해준 진심이 내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데.
"네가 마인인걸 알고 나서부터, 나는 매일 같이 악몽을 꿔. 소니아를 잡아먹던 그 남자가 네 얼굴을 뜯어먹는 악몽을….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무기력하게 그걸 바라만 보고 있어. 너를 지켜주고 싶은데 힘이 없어서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바라만 보고 있어."
성현이의 말에 내 머리는 자연스레 성현이의 광기를 [이해]해버렸다. 소중한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나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이 만들어낸 광기.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한 광기.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 너와 있을 때마다 행복하면서도 불안해. 언제 이 행복이 깨질까. 내가 이 행복을 지킬 힘이 있을까. 조급하고, 나를 미치게 만들어. 얼마나 나를 고통스럽게 하려고 이렇게 행복하게 만드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들어."
성현이는 애원하듯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널 죽이려고 했던 조민성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어. 그래서 네 아버지한테 따졌더니, 뭐라 했는지 알아? 네가 살아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더라. 그러고선, 네 아버지는 그런 조민성과 손을 잡았어. 자기 딸이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누워있는데 말이야. 그때 깨달았어. 널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현이의 모습에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생각하니,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져 왔다.
"널 잃고 싶지 않아. 더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아. 내가 노력하면 아무도 잃지 않을 수 있어, 널 지킬 수 있어. 그냥 너는, 지금처럼 날 사랑해주면 돼. 내가,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
그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말했잖아. 도망치지 말자고, 무엇이든 같이 맞서 싸우자고."
"아니, 이제 너는 내 뒤에만 있으면 돼. 내가 가디언즈에 들어가면, 모두 해결할 수 있어."
단호한 성현이의 목소리에 나도 성현이에게 애원하며 말했다.
"나도 너를 잃기 싫어. 착하고 사랑스러운 네가 다르게 변하는걸 보고 싶지 않아."
"변해야지만 너를 지킬 수 있는데도?"
나를 바라보는 눈물에 젖은 갈색의 눈에 나는 꾸역꾸역 감정을 누른 채 대답했다.
"내가 더 노력할게. 네가 불안하지 않게 더 열심히 노력해볼게."
말없이 시선을 마주하던 성현이는 얼굴을 가까이해 내게 따뜻한 입맞춤을 건넸다. 무척이나 짧게 느껴진 입맞춤에서 전해지는 감정이 내 눈에서 눈물을 더욱 흐르게 했다.
"...날 원망해도 좋아. 비겁하다고 나쁘다고 욕해도 좋아. 이 세상 사람들을 다 적으로 돌리더라도, 널 위해서라면 그럴 거야."
스스로 다짐하듯 그렇게 말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성현이의 품속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던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잃을까 걱정하는 성현이를 보고 결심했다.
성현이의 광기를
내게 물들이기로.
***
예전 백진희가 나를 설명한 적이 있다. 아니, 내가 아닌 `신아린`의 설정에 대해.
차성이라는 세계 3위의 기업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기르던 마족이자. 영또플의 최종보스, 마지막 히로인.
나를 공략함으로써 성현이가 세상을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말.
결국, 세상을 구하려면 나는 최종보스가 되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게 `신아린`의 설정이고, 큰 흐름이었으니까.
그 흐름대로 나는 차성을 이용해 내 힘을 기르기로 했다.
내 힘을 성장하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나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는 것을 본능이 무수히 경고했지만.
상관없었다. 날 위해 괴물이 된 성현이처럼, 나도 성현이를 위해 괴물이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김비서에게 연락해 마석을 최대한 모으라고 말하자.
마치,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수 백 개의 마석을 모아놓고 있다는 답을 했다.
역시, 이게 큰 흐름인 걸까. 원작의 영또플에서도 신아린은 이렇게 성장했던 걸까.
아카데미의 수업이 끝나고, 성현이는 짧은 입맞춤과 함께 가디언즈 입단 시험을 보러 갔다.
나는 원래 살던 초월동의 집으로 돌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김비서를 만났다.
"오랜만이야. 김비서."
"네, 준비 다 끝났습니다."
김비서의 안내에 따라 내 방으로 들어가니. 책상 위에 커다란 검은 색의 철제 상자가 놓여 있었다.
"회장님께서 공장에서 채취한 마석들중 일부를 아가씨의 소유로 미리 빼놓으셨습니다."
공장. 내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 어제의 나였다면 공장이 무엇인지,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물었을 테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내게 마석이라는 이득을 주는 공장의 실체에 대해 궁금증이 들지 않았다.
책상으로 다가가 철제 상자의 봉인을 풀고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검은빛을 내뿜는 불길한 마석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서 유난히 크기가 크고 가장 짙은 `어둠`을 가진 마석이 하나 있었다.
"이건 뭐야?"
내 질문에 내 뒤에 서 있던 김비서가 다가와 손가락으로 가리킨 마석을 확인하고는 답했다.
"아, 그건 플라틴에서 특수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마석입니다. 고독(??)의 방법으로 만들어내어 다른 마석보다 그 효율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플라틴이라는 말에 머릿속에 조민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계관 내 최강 마법사의 잠재력을 가진 `푸른 마나 살인귀`.
조민성이 만들어낸 마석은 그 어떤 마석보다 불길했으며 어두웠다.
마석이 가득 담긴 상자를 내려보자, 연신 뒷목이 찌릿찌릿하며 내게 경고를 보내왔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알았으니, 이제 나가봐."
내 말에 곧장 방을 나가는 김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자갈 사이에 손을 집어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안에 있던 의념(??)을 형상화했다. 그것에 맞춰 내 팔에 닿았던 마석들이 녹아내리며 내 안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거침없이 심장을 향해 들어오는 마석의 기운에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상쾌하다. 내 몸 구석구석 청량감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며, 내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부수기 시작한다.
상자 속으로 손을 휘저어 안에 있던 마석들을 모조리 흡수했다. 남은 건 조민성이 만들었다는 가장 불길해 보이는 마석 하나.
일부러 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 하나를 마지막으로 먹기 위해 남기듯. 가장 크고 불길해 보이는 마석을 마지막으로 흡수했다.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느낌.
혈관을 찢어내며 거대한 악의(??)가 내 심장으로 들어왔다. 온몸의 혈관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심장을 드러낸 듯한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설마 조민성이 나를 죽이려 일부러 이 마석을 만들어 낸 것일까.
온몸이 부서져, 모래처럼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고통 속에서 껍질을 벗어난 것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머릿속을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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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 바닥을 구르며 내 몸을 확인하니, 온몸이 썩은 것처럼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을 것 같다.
내 안에 있던 갈증이라는 본능이 또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진
머릿속의 무언가가 부서지며 내 안을 울리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한성진
그 소리는 내 이름을 부르는 신아린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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