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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95화 (95/160)

〈 95화 〉 조각

* * *

나무 상자 안의 마석을 봤을 때 느꼈던 뒷목을 바늘로 긁는 듯한 소름 돋는 느낌.

처음 그 느낌을 받았을 때는 생소한 감각에 어리둥절하며 이해하지 못했고. 그 뒤에도 종종 뒷목을 바늘로 긁는 듯한 느낌이 들 때마다 별거 아닐 거라며. 무시해버렸는데.

이제서야 이 느낌이 내게 무얼 말해주려는지 [이해]가 되었다.

진희가 나에게 세뇌를 걸 때나. 위험한 상황에서 종종 느꼈던 감각. 짐승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한 신호.

인간의 감각인지, 마인의 감각인지는 모르나.

멋대로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것처럼. 내 본능이 위험을 간파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건 재능이라기보다는 육감과 비슷한 성질이었다.

노력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그 사람만이 타고나는 성질.

"마인은 생명력과 마력을 심장에 있는 마석으로 해결하니까. 네가 느끼는 갈증을 해결하고, 지금보다 더 성장하려면. 심장에 있는 마석을 강화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

진희의 설명에도 나는 본능이 보내는 경고에 검게 빛나는 마석이 꺼림직하게만 느껴졌다. 불안함을 감추려 입술에 침을 바르며 진희를 바라보자 말을 이어갔다.

"마족은 인간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하지만 마계에는 인간이 없는데도 그들은 생존하며 번식하고 있어. 마족이 그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이유는 강한 마족이 약한 마족을 죽이는 `동족 포식`의 형태와 자신의 종복인 마인에게서 계약으로 받아내는 힘때문이야."

"그럼 이 마석은…."

"맞아. 나랑 성현이가 어렵게 찾아낸 마인 한 명을 죽이고, 직접 심장에서 꺼낸 마석이야."

그 말에 나는 성현이를 바라보며 사실이냐는 시선을 던졌다. 내 시선을 받은 성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무상자 안에 있는 마석이 누군가의 심장 속에 있던 거라는 생각에 조금 구역질이 올라왔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마석을 이용해야 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서 갈증을 해결하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어.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면 또다시 사람을 죽이려 들거나…갈증에 빠져 죽겠지."

진희의 단호한 말에 나는 상자 안의 마석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생각하다 상자를 닫고 옆으로 치웠다. 진희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내 본능이 경고한 대로 이 마석을 이용하는 건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였다.

마석이 단순히 내 성장과 갈증을 해결해주는 마법 같은 물건만은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그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진희는 조금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마석 바로 써봐. 그래야 앞으로 어떻게 너를 도울지 계획을 세우지."

"미안, 조금 생각 좀 해볼게."

내 대답에 진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서늘한 백안의 시선으로 내 미간을 뚫어버리려는지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린아, 언제까지 애처럼 굴래?"

진희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종종 보이던 날카로운 모습. 그 모습에 내 안에 있던 경계심이 더욱 가시를 세우며 말없이 노려봤다.

"널 위해서 힘들게 마석까지 구해줬는데. 아직도 너는 아무런 노력도 안 하면서 애처럼 우리가 나서서 도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잖아. 밥상을 차려줬으면 이제 스스로 떠먹을 나이는 된 거 아니야?"

평소의 진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반응에 더욱 마석이 꺼림직하게 느껴졌다. 대화할 때 내 마음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배려해주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짜증과 분노라는 감정을 목소리에 여실히 담고 있는 모습은. 내가 김성현과 자신을 엮을 때마다 친구라는 가면이 벗어지며 보이던 진희의 본 모습이었다.

단지, 김성현과 어울릴 것 같다는 말에 나를 때려 코피를 터트리기까지 하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적인 반응. 그때와 비슷한 반응에 나는 확신을 얻으며 진희를 바라보며 비꼬듯 답했다.

"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내 일에 나서지마. 언제까지 너희 도움받을 수 없으니까, 이제부터라도 혼자 해결할게."

내 대답을 들은 진희는 딱딱한 얼굴로 주먹을 쥐며 나를 노려보다, 김성현과 알 수 없는 시선을 주고받고는 말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성현이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내 곁으로 다가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아린아. 갑자기 진희한테 왜 그래? 진희 말대로 네 문제 해결해주려고 우리 열심히 노력했는데…."

"알아. 그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 그래도 마석과 관련된 일이면 조금 신중해도 되잖아. 난 지금 갈증도 느끼지 못하고 있고 당장 성장해야 할 이유도 없어.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저렇게 화낼 일은 아니잖아."

"진희는 네가 걱정되어 그렇게 말한 거지.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친구니까. 마석을 사용하는 게 조금 꺼려지는 거야?"

어린아이를 달래주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걱정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눈빛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게 눈빛에서 느껴졌으니까.

예전처럼 변명하거나 거짓을 둘러대며 화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저 눈빛을 본 순간, 난 그저 내가 느낀 생각과 감정들을 모조리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에 빠졌으니까.

"응, 솔직히 말해서 불안해. 마석을 사용하는 게 장점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 직감적으로 무언가 단점이 있을 거라고 느껴졌어."

내 솔직한 말에 성현이는 조금 기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무척이나 따듯해 이대로 품 안에 안겨 따뜻한 체온을 마음껏 느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대화가 끝나지 않았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석을 사용하는 게 처음이라 불안할 수 있어. 나도 처음엔 레이나의 설명을 듣고 불안해서. 혹시 몰라 직접 마인한테 테스트까지 해봤어. 마석을 사용해서 그 힘을 흡수하면 전보다 더 강해질 수 있어. 갈증도 해결될 수 있고."

마인에게 테스트까지 했다는 성현이의 말에 나는 머리가 아파져 왔다. 도대체 내가 의식을 잃은 한 달 동안 성현이는 무슨 일을 해왔던 걸까. 왜 나한테 먼저 그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내 말을 기다리는 듯한 성현이의 모습에 감정의 혼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냥 느껴져 마석을 사용하는 게 잘못된­"

성현이가 얼굴을 가까이해 입술을 맞추는 것으로 내 말을 끊었다. 내 입술을 핥는 성현이의 혀에 자연스레 입을 벌리자. 내 혀를 거칠게 휘감는 성현이의 행동에, 어젯밤 쾌락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몸이 화약에 불이라도 가져다 댄 것처럼 멋대로 반응해순식간에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거칠게 혀를 휘감아오던 성현이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키스를 한 뒤, 애원하듯 속삭였다.

"믿어줘 아린아. 사실, 내가 곁에 없을 때 누군가가 너를 노릴까 봐 걱정이 많이 돼. 마석만 있으면 너도 스스로 몸을 지킬 정도로 강해질 수 있고 그러면 나도 지금보다 조금 덜 불안할 것 같아. 그리고 갈증도 해결이 된다면 우린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하면서 살 수 있잖아."

성현이의 그 설득에 우습게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 본능이 보내는 위험 신호를 [이해]했음에도 성현이의 애원에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성현이는 내 손을 잡으며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길 바라는 사람은 없어…나는 네가 고통 받는 게 싫어. 그래서 노력 끝에 찾은 해결책이 마석이야. 아린아, 이보다 나은 방법은 없어."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는 목소리로 설득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결국, 나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을 택했다.

정말로 웃기게도 내 머릿속은 평소와는 반대의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던 이성은 성현이의 말이 맞다며 동조하고 있었고. 성은이에게 참을 수 없는 식욕을 느끼던 본능은 마석을 사용하는 것에 격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현이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침대 위에 두었던 나무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 안에 있는 마석을 꺼내든 성현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어 내 손바닥에 마석을 올려놨다.

"불안하다니까 강요하지는 않을게. 그렇지만…날 믿어줬으면 좋겠어."

심장이 아프다. 본능은 마석이 위험하다고 소리치는데. 이성은 나를 위해 고생한 성현이에게 미안하지도 않냐며 나를 탓하고 있다.

내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고 성현이를 믿어야 하는 걸까. 물론, 성현이를 믿지만….

"사랑해 아린아. 내가 너한테 안 좋은 일을 하겠어?"

그 말을 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는 비겁함을 느꼈다.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손을 쥐어 마석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마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누군가에게 배운 것도 아닌데 알 것 같았다.

마인화를 하듯, 손바닥에 의념을 모으자. 그 즉시 마석은 사탕처럼 녹아내려 손바닥을 통해 내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무언가 심장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조금 부서지더니 내 안으로 들어온 무언가와 섞여들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 무언가가 거대한 울림을 자아냈다. 먹이에 만족한 듯한 짐승의 포효.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몸속 깊은 곳에 있던 피로까지 말끔히 사라진 듯한 청량감이 들었다.

눈을 뜨자. 묘한 만족감이 서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현이의 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싸늘하게 느껴졌다.

♥♡♥

"괜찮아? 아픈 건 아니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린이에게 걱정하며 묻자. 아린이는 표정을 지우고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응. 하나도 안 아파…오히려, 평소보다 힘이 넘쳐."

양팔을 쭉 뻗으며 만세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길이 기분 좋은지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는 아린이의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다행이야 아린아. 믿어줘서 고마워."

"당연히 널 믿지. 그리고, 고마워 성현아. 날 위해서 노력해줘서."

그렇게 말하며 내게 안기는 아린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또다시 정복욕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침대에 눕히고 목덜미에 이빨 자국을 남기고 싶다.

내 것이라는 표시를 온몸에 남겨 다른 놈들이 넘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어젯밤처럼 내게 울며 매달리는 것을 보고 싶다는 충동에 팔에 힘이 들어갔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아린이는 다른 여자들처럼 감정 없는 오나홀처럼 대하면 안 됐다. 세심하게, 언제든지 힘을 주면 깨질지 모르는 유리로 조각된 예술품처럼 소중히 다뤄야 했다.

내 품에 안겨 나를 올려다보는 아린이의 모습에 곁눈질로 미리 띄워놓은 상태창의 욕구를 확인한 뒤, 모른 척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널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한 거야. 네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렇게 말하자, 예상했던대로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린이의 모습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아린이의 욕구대로 부드러운 키스를 나눴다.

눈을 감은 채 혀를 휘감는데 집중하는 아린이를 빤히 바라보다. 슬쩍, 가슴에 손을 올리자. 흑요석같이 밝게 빛나는 검은 눈에 음흉한 미소를 짓는 내 모습이 반사돼 보였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했어."

"응…?"

내 음흉한 미소를 읽은 건지. 가슴을 만지는 내 손길에 어젯밤이 떠오른 건지 정답을 알 수 없지만. 아린이는 내 의도를 파악하고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진희가 제일 좋다고? 내가 아니라?"

"그야! 너는 사랑하니…."

아린이의 다급한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가슴을 만지던 손으로 어깨를 뒤로 밀어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질투 나네. 나는 아린이가 제일 좋은데."

내 말에 몸을 움찔하며, 겁먹은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자지가 딱딱하게 발기해 조금 통증을 느꼈다.

아린이를 만나기 전에 레이나의 질에 몇 번이고 정액을 쏟아부은 탓에 아직 회복되지 않은 자지에서 조금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내 밑에 깔려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랑스러운 아린이를 애무만으로도 가게 할 자신도 있었고, 조금만 지나면 자지가 완전히 회복될 거라 큰 걱정은 없었다.

이번에는 어떤 성감대를 공략할까. 잠시 아린이의 상태창을 들여다보며 계획을 세울 때.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린이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미안, 잘못했어…나도 성현이가 제일 좋아."

"늦었어. 힘도 넘친다니까. 잘못한 만큼 마음껏 혼낼 거야."

내 말에 조금 겁을 먹은 듯한 눈빛 밑으로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깃들어 있는 게 보였다.

슬쩍, 곁눈질로 음란도를 확인하니 어제보다 1% 오른 94%였기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었다.

내가 계획했던 대로 나에게 공략당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아린이의 모습에 더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웃자, 이유도 모른 체 따라 미소를 짓는 아린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멍청하고 사랑스러워 보여.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고, 웃음을 멈춘 채 정복욕이 가득 찬 낮은 목소리로 아린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이제 곧 완전히 내 것이 될 아린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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