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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92화 (92/160)

〈 92화 〉 무게추

* * *

내일이 주말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더운 낮의 태양을 피해 선선한 밤을 즐기려는 사람들 때문일까.

밤거리의 초월동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런 많은 사람을 볼 때마다.

저마다의 감정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신기했다.

다들 어디서 나타나서 어디로 가는 걸까.

그리고 이 사람들이 모두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의 부산물들이라는 생각이

나에게는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들게 했다.

사실은 아직도 내 방에서 잠을 자고 있고.

일어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거지.

부정적인 생각을 지웠다.

이곳이 소설, 환각이어도 상관없다.

나는 이제 이 세계를 살아가는데. 온전한 진심으로 임할 테니까.

간만에 임유모에게 메이크업을 받고 더운 날씨 탓에 조금 짧은 원피스를 입고 약속 장소로 나가자.

초월역 앞에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의 남자가 보였다. 다가가니 김성현이 휴대폰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그런 걸까.

내 마지막 기억의 성현이와 무척이나 다르게 느껴졌다. 앞머리를 왁스로 올려서 그런 걸까?

그것보다는 스타일이라 해야 하나. 전에 데이트했을 때와는 다르게.

오늘은 엄청 꾸몄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로 입던 체크무늬 셔츠가 아닌. 검은 브이넥에 깔끔한 셔츠.

어디 남친짤에서나 볼법한 옷을 입은 모습이 외모 때문인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휴대폰에 집중하는 성현이를 놀라게 할 생각으로 조용히 다가가고 있는데. 웬 여자가 성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자에게 성현이가 미소를 지으며 무어라 대답하길래.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 바라봤는데. 처음 보는 여자였다.

무어라 대화하더니 성현이가 고개를 숙이자. 여자도 성현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가버렸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느리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나를 발견한 성현이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방금 뭐였냐고 물으려 했는데. 인사도 없이 대뜸 나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화장이 묻을까 어깨로 얼굴을 빼고 성현이의 허리를 양팔로 감자. 성현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아린아."

끌어안은 성현이에게서 느껴지는 체취, 체온. 그리고 심장박동까지. 그 모든 게 순식간에 내 머리를 텅 비게 했다.

"나도…보고 싶었어."

밀착한 몸을 떼어내 시선을 마주하자. 확실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게 느껴졌다.

잠들어있었을 때의 기억이 없어. 내게는 한 달 전의 성현이가 바로 어제의 성현이처럼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변한 성현이의 모습이 크게 와닿아 낯설게 느껴졌다.

한 달 전의 성현이도 확실히 잘생기고 멋있고 사랑스러웠지만.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느낌처럼 조금 원초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의 성현이는 누군가 원석을 세밀하게 세공하여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낸 보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곳 알아놨어. 가자."

자연스레 내 손을 잡는 모습에 조금 부끄러움이 밀려 들어왔지만. 모른 척 손을 잡고 성현이를 따라갔다.

와본 적이 없는 거리로 들어간 성현이는 익숙한 듯 걸음을 옮겨. 멋있어 보이는 음식점 앞에 섰다.

"여기 어때."

"좋은 것 같은데?"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커플들도 많았고 내부의 디자인도 예뻐 보여 데이트하기 좋아 보였다.

내가 마음에 들어 하자. 성현이는 고민 없이 나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 내가 들어갈 때까지 잡아주는 모습에 성현이가 데이트 연습을 한 걸까. 생각하며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메뉴판을 든 여직원이 밝은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어서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네."

"그럼 이쪽으로. 앉으시면­"

"아, 여기 말고 저쪽으로 갈게요. 저기가 더 좋아 보여서."

직원이 말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성현이가 내 손을 끌어당기고는 다른 곳에 앉겠다고 말했다.

"아, 그러면 저기로 준비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여직원을 보며 감사의 미소를 짓는 성현이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내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새로웠달까. 자리로 향하는 동안 성현이가 한 달 동안 무엇이 바뀌었나 고민했다.

"아."

[이해]가 되었다. 성현이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

"왜?

의아해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네가 뭐가 바뀐 건지 알 것 같아서."

내 말에 성현이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흥미로운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바뀐 것 같은데?"

그 물음에 나는 확신을 갖고 대답했다.

"자신감."

평소 성현이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신감이었다.

바뀌기 전 성현이는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나서기를 꺼렸고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어했다.

카페에서 음료가 잘못 나와도 알바생에게 얘기하지를 못해. 내가 대신 얘기한 적도 있었을 정도.

그래서 데이트를 할 때 남들의 눈치를 보는듯한 모습 때문에 몇 번 자신감을 살려주려 노력했지만.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남들 앞에서 음흉한 짓을 할 때만 자신감이 생겨버려 그만두었다.

각성하고 나서도 전과 같은 모습이어서 그냥 원래 성격인가 싶었는데.

지금의 성현이는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행동과 눈빛에 자신감이 넘쳤다.

조금 오만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

그래도, 예전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더 좋았다.

"자신감 있어 보여?"

"응. 그래서 좀 더 멋있어 보여."

확실히 자신감에 찬 눈빛이 늑대 같은 인상에 더 어울렸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늑대 같은 느낌.

"다행이네. 멋있어 보여서."

그리 말하며 미소 짓는 모습에 조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조명 때문인가. 왠지 더 잘생겨 보이는 탓에 괜히 시선을 피했다.

"주문하시겠어요?"

메뉴판을 들고 따라온 여직원의 말에 성현이가 메뉴판을 보여주며 내가 먹을 것을 정해주고 주문을 했다.

"한 달 만에 너랑 밥 먹으니까. 좋다."

"나도 좋아."

그렇게 답하며 성현이에게 조민성과 있었던 일에 대해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지금 말해야겠지.

성현이에게 진심으로 대하겠다고 말한 게 나인데. 이제 와서 두렵다고 피할 수는 없었다.

"음, 성현아."

조금은 어렵게 입을 떼자. 성현이는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봤다.

"성은이 일 말이야…."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조민성 죽일 테니까."

내 손을 붙잡고 그리 말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물론, 조민성을 죽이고 싶긴 하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엊그제. 아니, 한 달 전에 말이야. 너한테 거짓말 안 하겠다고 약속 한 거 기억나?"

"기억하지."

"그래서 너한테 이제 거짓말 안 하려고. 내가 숨겨왔던 비밀들 너한테 말해도 될까?"

불안했다. 내가 마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성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성은이에게 식욕을 느껴서 죽일 뻔했다는 것을 말하면 나를 혐오하지는 않을까?

그렇지만 더는 성현이를 속이고 싶지 않다. 나를 욕하고 떠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건 나였으니까.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나를 걱정하듯 말해주는 성현이의 모습에 내 결심이 더 강해졌다.

"말했잖아. 더는 너한테 거짓말하기도 싫고, 계산적으로 행동하기도 싫다고. 그러니까 말할게."

주변을 둘러보며 혹시, 누가 내 말을 들을까 확인한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 사실...마인이야. 돌아가신 어머니가 마족이었나 봐. 그걸 알게 된 건 얼마 안 됐어 진희의 도움이 없었다면 몰랐을 거야. 어떻게 알았는지. 조민성이 내가 마인인걸 알아내고 나를 함정에 빠트린거야."

내 말에 성현이가 충격을 받았을까 살펴봤지만,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마인은 사람을 잡아먹으니까. 조민성은 내가 성은이를 잡아먹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실제로…조민성의 생각대로 성은이에게 식욕을 느꼈어. 본능이라 제어할 수가 없더라."

조금 목이 메 말을 멈추자. 성현이는 지나가는 직원에게 얼음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고 성현이에게 고맙다고 하자. 성현이는 내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응?"

"그 뒤에는 어떻게 된 건데?"

나를 바라보는 갈색 눈에는 경멸이나 혐오 같은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나를 위로하든 따뜻한 눈빛이 내 감정을 어지럽게 했다.

내 말을 농담이나 거짓말로 생각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조금 걱정이 들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야. `갈증`이라는 마인의 생존 본능이 성은이를 죽이려고 했어. 조민성이 일부러 나를 고문해 생명력을 떨어트려 생존 본능을 끄집어낸 거니까. 그 본능을 더는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이성을 잃기 전에 내 팔다리를 잘랐어. 성은이를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 말에 성현이는 손등을 쓰다듬던 손을 끌어당겨 자기 볼에 비비며 물었다.

생긴건 늑대 같은데 하는 행동은 고양이였다.

"...왜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당연하잖아. 네 가족인데…."

"됐어 그럼."

내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성현이의 모습에 황당함을 느껴 볼을 비비던 손을 빼냈다.

당연히 화를 내거나. 내게 무어라 따질 줄 알았는데. 성현이는 데이트하자는 약속이라도 잡는 것처럼 `알았어`라는 표정으로 수긍하는 모습이 이해가 안 되었다.

"이해한 거 맞아?"

"뭘?"

"내가 한 말 이해한 거 맞냐고. 장난치는 거 아니고 진짜야. 나 마인이고 사람도 여럿 죽였어."

"알아들었어. 네가 말한거 이해했고, 진지하게 괜찮다고 생각했어."

성현이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보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성현이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마인이든, 마족이든 상관없어. 나는 너의 모든 걸 사랑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은 거니까. 내 마음은 변함없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입 밖으로 감정이 말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참아야 했다.

"성은이에게 식욕을 느낀 건 네가 마인이라서 느낀 생존 본능이었다며. 그리고 그건 조민성이 억지로 끌어낸 일이잖아. 네 탓이 아니야. 결과적으로 성은이는 상처 하나 없이 가족 품으로 돌아왔으니까. 나는 너에게 오히려 고마워. 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선택을 했으니까…. 우리 가족은 너에게 큰 빚을 진 거야."

참으려 했는데. 눈물이 흘러나왔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깨어났을 때는 혹시, 내가 성은이를 죽였을까 무서웠고.

성은이에게 식욕을 느꼈다는 것에 성현이가 나를 혐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까 두려웠다.

이대로 성현이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진실을 말해야 할지 또다시 성현이를 속여야 할지 끝없이 고민했다.

사랑하는 성현이에게 상처 주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상처로 돌아올 것을 알기에.

나에 대한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성현이가 나를 떠나야 할 이유를 말해줬다.

그런데도 성현이는 나를 이해해줬고 오히려 위로해줬다.

"왜 울어. 한 달만의 데이트인데."

내 옆자리로 다가온 성현이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 따듯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걸 모르는 걸까.

내가 더 많이 눈물을 만들어내자. 당황한 성현이가 티슈로 내 눈물을 닦아내고는 나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사랑해 아린아."

"왜, 왜 사랑해…사랑하지 마."

내가 비밀을 말하면 떠날 줄 알았다. 내 잘못이니까. 내 문제니까.

그런데도 성현이는 내 곁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어째서일까.

"평생 사랑한다고 약속했잖아."

그 말에 나는 내 안에 있던 이기심을 깨달았다.

성현이의 곁에 있으면 피해를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곁을 떠나기 싫어 이렇게 매달리듯 진실을 말하고는.

`네가 떠나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지`라는 자기 위로.

한편으로는 성현이가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잘못해놓고 선택의 책임을 성현이에게 떠넘긴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건 성현이만이 아닌데

책임지기 싫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나는 이렇게 추한 사람이구나.

사랑한다면서. 계산하지 않는다면서.

또 자신을 속였다.

나에 대한 역겨움과 자괴감에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성현이의 품 안에 얼굴을 묻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성현아. 우리…."

"싫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걸까. 내 말을 자르며 성현이는 낮은 목소리로 답하고는 내 얼굴을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 성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나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만 울고 밥부터 먹자. 밥 먹고 그다음에 얘기하자."

성현이의 말에 결심이 흔들렸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

마지막인데 같이 밥 먹는 것 정도 는 괜찮지 않을까….

그 달콤한 유혹에 고민하자.

흔들리는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성현이는 나를 내려다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해줄 말이 많았단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짧게 입술을 맞춘 뒤. 소중한 걸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감정이 잠재워진다. 마음속을 범람하던 후회와 자책들이 순식간에 소멸하고.

성현이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감정이 내 마음을 채웠다.

이기적인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감정에 중독되어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 내일은 안 그럴 테니까.

오늘까지만.

그 욕심이 이성과 타협한다.

흔들리던 내 마음의 무게추가 성현이에게로 넘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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