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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91화 (91/160)

〈 91화 〉 한 달이 지난 후

* * *

붉은 피가 가득한 거대한 피의 바다 속.

나는 끝이 없는 심연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수면으로 헤엄치면 익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두려웠다.

이 어둡고 깊은 심연과 달리.

태양이 빛나고 있는 수면 위의 모습이 내 최악을 가정하고 있을까 무서웠다.

이 고통을 벗어나려면 수면을 향해 헤엄쳐야 한다.

그러기에, 나는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익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고통은 나의 잘못이고, 나의 선택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죽여야 한다.

내 안에 있는 본능이라는 짐승과 함께 이곳에서 익사해야 한다.

눈을 감고.

깊은 심연의 바닥까지 추락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수면의 빛을 떠올리며 가라앉았다.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익사의 고통을 느낄 때.

무언가 깊은 심연의 바닥 속에 잠겨 있던 나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낚시꾼의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수면을 향해 억지로 꺼내지고 있었다.

그 힘에 몸을 움직여 저항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안 돼.

깨어나고 싶지 않아.

내 격렬한 저항에 나를 끌어 올리던 힘이 적어지더니.

무언가 나를 향해 추락했다.

어떤 괴물일까. 내 본능이 나를 잡아먹으려 심연까지 찾아온 걸까.

두려움에 빛이 닿지 않는 심연에도 눈을 감았다.

추락한 무언가가 나에게 닿았다.

내 손끝에 닿은 무언가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눈을 떴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 속.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리운 온기.

그 온기에 끌려 저항을 멈추자. 다시 수면을 향해 끌려갔다.

깊은 어둠 속 심연을 벗어나자.

내 손끝에 걸려 있는 낚싯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주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실.

수면으로 끌려 나온 내 귀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

눈이 떠졌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건 어둠뿐이라.

심연에서 벗어나는 꿈을 꾼 걸까. 생각하고 있을 때.

조금씩 시야가 환해지더니 형태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몇 번 눈을 끔벅거리며 급격하게 변해가는 시야에 적응하자.

흑백으로 보이던 세계에 물감을 뿌린 듯 제 색을 찾기 시작했다.

낯선 천장과 머리 위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알 수 없는 수액 같은 것들.

누군가 내 몸을 세탁기에 넣고 탈수라도 시킨 것처럼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느낌이었다.

끊어진 기억을 더듬으며 상황을 파악할 때쯤. 내 손을 붙잡고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힘겹게 고개를 움직이자. 내 손을 잡고 잠든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데. 목구멍 깊숙이 무언가 들어와 있어서 불가능했다.

붙잡힌 손을 빼내 잠들어 있는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손길을 느낀 듯. 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이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손으로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받아내자.

성현이는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

그 목소리에 담긴 그리움에 얼마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가 느껴져 왜인지 모르게 나도 눈물이 고였다.

"보고 싶었어 아린아."

나도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말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살짝 끄덕이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현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몰래 들어온 거라. 이제 가봐야 해. 그래도 멀리 안 가고 근처에서 기다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성현이의 손을 붙잡았다.

꿈인 것 같아서. 이대로 성현이를 놓치면 안될 것 같아서. 불안했다.

내 행동에 성현이는 미소를 짓고는 내 손등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조그만 참아. 퇴원하면 계속 옆에 붙어 있을 거니까."

따뜻한 미소와 함께 내 불안을 없애주는 위로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잡은 손을 놓자.

성현이는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있는 붉은색 버튼을 눌렀다.

"곧 보자."

그렇게 말하고 성현이가 방에서 나가기 무섭게. 간호사와 의사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내 주변을 둘러싸며 무어라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정신이 드냐. 몸의 감각은 괜찮냐.

발가락을 무언가로 세게 찌르는 탓에 움찔하자. 만족했는지 다른 곳까지 몇 번이나 찔러 내가 반응하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야.

자기들끼리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하더니. 내 팔에 꽂혀 있는 튜브에 무언가를 주사했다.

"...하면 삽관 제거하면 될 것 같습니다."

"환자분. 푹 주무시고 일어­"

말들이 멀어지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나 언제 퇴원해."

팔짱을 끼고 김비서를 노려봤다. 깨어나니 목구멍에 들어있던 것도 팔에 꽂혀 있던 것도 제거된 상태였기에. 금방 퇴원할 줄 알았더니 벌써 10시간이 넘게 계속해서 검사하느라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직, 의사 선생님이 허락을 않으셔서."

"나 괜찮아."

"에이, 그래도 한 달이나 의식이 없으셨으니까…전문가의 말을 따라야죠."

김비서의 말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깨어나자마자 보이는 게 김비서라 설마 성은이를 잡아먹고 살아난 건가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자.

또 의사들이 몰려와 `정신적인 충격` 어쩌고 검사를 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길래 짜증을 내며 내보냈다.

성은이는 어떻게 됐냐는 내 물음에 김비서는.

다행히 성은이는 아무런 상처 없이 부모님 품으로 돌아갔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다는 말에는. 솔직히 장난치는 건가 싶어 의심하니.

김비서는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며 의심을 지웠다.

정말로 한 달 동안 병실에 누워있던 걸까.

얼른 성현이를 만나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내가 걷기라도 하면 죽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침대를 벗어나지를 못하게 했다.

심지어 정신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휴대폰과 TV도 오늘까지는 금지라며 보여주질 않았다.

한참을 투덜거리며 의사에게 퇴원하고 싶다고 말하자.

결국, 내일 아침에 퇴원하는 걸로 결정되었다.

간이 돼 있지 않은 맛 없는 밥을 억지로 씹어먹고 있을 때.

누군가 노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린아~"

내 이름을 이렇게 밝게 불러주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백진희.

고개를 드니. 확실히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는지. 조금은 달라진 것 같은 진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일 퇴원하는데 그냥 병문안 오기 그랬는지 마실 것을 사 온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나 내일 퇴원인데."

"그럼 오늘 안에 다 마셔야겠네."

"내일 아침에 검사 받기 전까진 음료수 못 먹어."

내 말에 고민하던 진희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자기가 사 온 음료수를 뜯어 마셨다.

"그럼 그냥 내가 마셔야겠다."

"그래, 한 달 동안 별일 없었어?"

내 말에 진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성현이가 엄청나게 성장했지. 너무 변해서 적응하기 힘들지도 몰라."

장난기 섞인 목소리 때문에 농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진희를 바라보며 정말로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조민성은?"

"조민성?"

내 말에 살짝 미간을 좁히며 자기 입술을 만지던 진희는 의자를 끌어당기며 내게 다가왔다.

"요즘 조민성 인기 엄청난 거 알아?"

"...뭐?"

그 미친 새끼가 인기가 많다니 무슨 소리일까. 어이없어하며 진희를 바라보자. 진희는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내게 보여주었다.

"플라틴이랑 차성이랑 손잡은 건 알아?"

진희의 말에 누가 머리를 망치로 내려친 듯한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조민성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데. 플라틴이랑 아버지가 손을 잡았다고?

진희가 보여준 휴대폰에는 내 아버지와 조민성이 손을 잡는 사진이 있었다.

[플라틴&차성 전략적 업무 협약!]

사진을 보고 있으면서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를 소중한 달처럼 아끼듯 말해주던 그 모습은 거짓이었던 걸까?

"플라틴이 습격당하고 시민들이 불안에 떨었어. 플라틴마저 습격당했으니 안전한 곳은 없다고. 그런데 조민성이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어. 초월동을 중심으로 마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거대한 결계를 만들자고.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플라틴에서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기억을 헤집어봤지만, 조민성이 이런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이것도 연중되고 나서의 이야기인 걸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반대했었어. 그 결계 때문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또다시 마인이 습격해왔고 결국, 결계를 이용해 마인을 가둔 뒤. 조민성이 직접 마인을 죽였어. 그 뒤로는 너도나도 자신의 사는 곳도 결계를 쳐야 한다며 난리를 치고 있고."

"그래서…?"

"초월동을 중심으로 서울 외곽 전체에 지하터널을 만들어 거대한 술식을 그리는 공사가 진행 중이야. 영웅협회, 가디언즈. 그리고 차성까지 손을 잡았지. 그것 때문에 수도 중심의 행정이다 뭐다. 말이 많기도 하지만. 지금 가장 사람들이 많이 얘기하는 게 조민성이야. 17살의 천재. 플라틴의 새 회장. 얘깃거리가 되니까. 요즘에는 인류의 희망이라는 소리도 듣더라."

나를 고문하고 성은이를 잡아먹으라고 방안에 가두던 그 미친놈이. 희망이라니.

"그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 아닐까? 예를 들어 막 만화에서처럼 알고 보니 재물을 바치는 술식이라던가."

"그건 아니야. 그런 논란 때문에 영웅협회와 가디언즈가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조민성이라면 믿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미친놈이니까.

"뭐, 그것 때문에 바쁜 모양인지 아카데미에는 잘 안 나와. 마주칠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다음에 만나면 꼭 죽여버릴 거야."

이를 갈자. 진희는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 만지지 마. 더러워."

"괜찮아 아린아. 얼른 돌아오기나 해. 그리고,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쓸쓸한 표정을 짓는 진희의 모습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하지 마. 조민성이 미친 새끼였던 거지. 네 잘못은 아니니까."

"응. 아, 성현이 요즘 여자들한테 인기 많은 거 알아?"

진희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뭐라고?"

"그러니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남자친구 챙겨~"

웃음과 함께 의자에서 일어난 진희는 인사와 함께 뒤를 돌며 말을 덧붙였다.

"안 그러면 뺏길지 몰라."

병실을 빠져나가는 진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 동안 얼마나 많은 게 변한 걸까.

김성현은 한 달 동안 뭘 했을까. 궁금했다.

***

마침내 퇴원했다. 곧장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오늘까지 푹 쉬고 싶었다.

기숙사로 돌아가지는 않고.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오니. 임유모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껴안아 줬다.

나를 보고 뼈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식탁 위를 가득 채울 정도로 온갖 음식을 차려놓은 임유모의 정성에.

배가 터지도록 억지로 먹자. 또다시 후식이라며 과일을 들이미는 탓에 방으로 도망쳐야 했다.

움직일 때마다 위안 가득 찬 음식물이 출렁거리는듯한 느낌에 느린 걸음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 수업 시간이었기에 일부러 성현이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내게 보낸 메시지가 몇 개 도착해 있었다.

[퇴원 축하해. 끝나면 연락할게.]

[점심 맛없다. 저녁은 맛있는 거 먹자.]

[배부르면 무리하지 말고 조금만 먹어.]

[밥 먹고 바로 과일 먹으면 살찐대.]

[살쪄도 이쁘고 귀여울 것 같은데 살찔래?]

마치 나를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메시지를 보냈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각성하고 나서는 메시지를 보낼 때 붙이던 ㅇㅅㅇ /ㅎ_ㅎ 같은 이모티콘이 사라졌었다.

그게 김성현의 트레이드 마크였는데. 왜인지 모를 조금 아쉬움이 느껴졌다. 메시지를 올려보니 각성 전과 각성 후의 메시지는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달랐다.

"나라도 써야 하나?"

ㅇㅁㅇ 같은 이모티콘을 쓰며 답장을 보내려다 부끄러움에 지우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랑해 ㅇㅅㅇ♥]

내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타이밍 좋게 도착한 메시지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우연인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건 아닐까. 조금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답장할까 고민하다. 조금 부끄러워져 짧게 답장을 보냈다.

[나도 사랑해.]

휴대폰을 휙 침대 위로 던지고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성현이를 만나 할 얘기가 많았으니.

지금부터 준비해야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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