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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88화 (88/160)

〈 88화 〉 절망

* * *

죄책감이라는 것은 갑자기 내린 소나기처럼 예고도 없이 사람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든다.

백진희에게 세뇌당하고 있었다는 변명거리가 있지만. 성현이의 가족이 살던 곳을 옮긴 건 결국, 내 행동의 결과.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깊은 죄책감과 그에 따른 책임감이 나를 옥죄어왔다

"여주인…어떻게 해?"

아레아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조민성이 무엇을 꾸미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함정을 놓고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성현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바쁜지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진희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황급히, 진희의 방으로 달려갔지만. 그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진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초월역 테러 사건에서 조민성을 막은 진희라면 반드시 도움이 될 텐데….

조민성이 약속한 1시간이라는 시간 때문에. 더는 진희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동하면서 조민성에게 대항할 계획을 세워야 했다.

황급히, 정령화를 한 아레아와 함께 택시를 타고 뺨에 적혀 있던 주소로 향했다.

계속해서 성현이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성현이의 휴대폰 전원은 계속해서 꺼져있었다.

뉴스를 확인하느라 계속 휴대폰을 하고 있어서 전원이 나간 걸까.

너무나도 얄궂은 상황에 나도 모르게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을 생각할 때.

정령화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아레아의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대충 감을 잡았다.

차성에 연락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것을 눈치챈 조민성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아니, 오히려 조민성은 차성이 개입하는 걸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조민성이 내게 혼자만 오라고 말한 이유.

나를 죽이려 기보다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을 믿어보기로 했다.

택시가 도착한 곳은 깊은 산 속 안에 있는 공장이었다. 택시 기사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이 밤에 여기에 온 게 맞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 없이 계산을 한 후. 택시에 내렸다.

기억이 난다. 이곳은…. 내가 갈증을 해결하러 온 차성의 `공장`.

외벽에 보이는 녹슨 자국까지 아직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조민성이 어떻게 여기를 알고 있는지.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성은이의 안전이 제일 중요했다.

그리고 여차하면…마인화를 사용하면 된다.

10초 정도밖에 유지하지 못하지만.

내가 깨달은 `권능`을 이용하면 조민성을 죽일 수도 있다.

"여주인.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주변을 둘러봐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근처의 기둥 뒤에 내 휴대폰을 내려놨다.

"잘 들어. 여기 휴대폰을 둘게. 나랑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내가 위험하다 싶으면 이곳으로 와서 다른 사람에게 구조신호를 보내야 해."

"응. 알았어."

"성현이, 진희. 그리고 김비서에게 연락하면 돼."

만약 내가 잘못된다고 해도 아레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성은이를 구할 수 있다.

아레아는 불안한지 연신 몸을 출렁거렸기에 부드럽게 몸을 쓰다듬어주며 어깨 위로 올렸다.

"가자."

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아레아를 어깨에 올린 채 공장의 문을 열었다.

끼끼기긱­

문이 열리는 쇳소리가 무척이나 불안하게 느껴졌다.

***

차성에서 제공해준 호텔에 대피해있는 가족과 만났다. 처음 복도에서 엄마를 봤을 때 나를 모른 척 지나가기에 충격이 심한 건가 싶어. 엄마의 팔을 붙잡자.

타인을 보듯 경계하는 엄마의 모습에 바뀐 내 모습을 가족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

"엄마, 나야 성현이."

"네? 무슨 소리를…."

"엄마 아들 성현이라고."

키도 커졌고 얼굴도 완전히 달라졌으니. 엄마가 나를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 말에 당황스러워하는 엄마와 경계하는 표정으로 나를 엄마에게서 떼어놓으려고 다가오는 아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새로 발급한 신분증을 보여줬다.

"나 김성현 맞아. 각성해서 변한 거야."

신분증과 초월 아카데미 학생증까지 내밀자. 그제야 조금은 믿음이 갔는지.

나에 관한 몇 가지 질문들을 해왔다.

나만 알 수 있는 것들을 대답하자. 그제야 아들임을 확신한 엄마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우리 아들 잘생겼네…흑흑…성은이가 좋아하겠다."

"...성은이는 아직 못 찾았어?"

내 물음에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눈물만 흘렸다.

"회사에서 집으로 수색조를 보냈다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아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을 흘리던 엄마는 애써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지.

눈물을 닦으며 아카데미 생활에 대해 물었다.

부모님이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카데미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좋은 소식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나에게 일어난 기적처럼.

성은이에게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기도를 했다.

***

공장 내부에는 자칭 `파티`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공장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큰 컨테이너들 앞에는.

삐딱한 자세로 서있는 조민성밖에 보이지 않았다.

"안녕. 파트너. 정말 혼자 왔어?"

나를 발견한 조민성이 뱀 같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당장에라도 마인화로 변해 조민성의 목을 치고 싶었지만 성은이의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참아냈다.

"성은이 어딨어."

"안 좋은 말버릇이네. 내 질문엔 답안하고 자기가 궁금한 거 물어보는 거. 저번에도 그러더니."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조민성은 내게 다가왔다.

"내가 성현이 동생을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말이야."

"구했다고…?"

"그럼, 내가 안 구했으면 그대로 마인의 공격에 죽었을 텐데?"

조민성의 말은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었다. 당시 순현동에 있던 사람들은 현재까지 대부분 실종상태가 되었으니까. 고온에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민성의 말에 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플라틴의 본사가 공격당하고 있는데 순현동으로가 성은이를 구했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

"마인이 순현동을 공격할 걸 알고 있었어?"

내 질문에 조민성은 길게 입꼬리를 늘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요점을 잘 짚네. 알고 있었지."

"어떻게?"

"비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댄 조민성은 그대로 손을 허공에 들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로 푸른 구체가 떠올라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조민성과 거리를 벌리자.

조민성은 내 행동을 비웃으며 푸른 구체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마실 게 있어야지."

푸른 구체에서 와인병을 꺼내든 조민성이 손짓으로 코르크 마개를 벗기고는 내게 내밀었다.

"마실래?"

"아니, 네가 그 안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데 내가 마실 것 같아?"

"조금 현명해졌네."

조민성은 웃으면서 그대로 병을 들어 와인을 마셨다.

"내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보네. 계속 차고 있는 거 보면."

조민성의 시선이 왼 손목에 찬 요정왕의 팔찌에 닿아있었다.

"응. 잘 쓰고 있어."

"잘 쓰고 있다라…그런가."

무언가 비웃는듯한 미소를 짓고는 조민성은 와인병을 벽에 던져 터트리고는 와인이 묻어 붉게 변한 입술을 핥으며 나를 노려봤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조민성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 앞에 푸른 선이 나타나 나선을 그리더니 울고 있는 성은이가 푸른 선의 안으로 보였다.

"성은아!"

"언, 언니!"

당장에라도 성은이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조민성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푸른 선이 내 접근을 막고 있었다.

"파트너. 아니, 신아린. 네가 마인인거는 이미 알고 있어."

"뭐…?"

그걸 어떻게 조민성이 알아낸 걸까. 그 사실을 아는 건 진희와 차성밖에 없을 텐데.

"마인이면 마인답게 살아야지. 왜 사람인 척 구는 거야?"

"난…사람이야."

"여기서 사람을 잡아먹어 놓고? 7명이었나?"

조민성의 말에 망치로 심장을 후려친 것처럼 둔중한 충격이 몸 전체로 퍼졌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진실.

나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것.

"네 본능을 일깨워. 사람인 척 그만두고. 마인으로 살아."

"닥쳐…."

내 대답에 조민성은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네가 싫다면 내가 끌어내 줄게. 네 본능을."

허공에 떠 있던 푸른 선들이 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황급히 몸을 피하며 어깨에 있는 아레아를 문 쪽을 향해 내던졌다.

쿠콰쾅­!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굉음이 터져나가며 뿌연 먼지에 시야가 가려졌다. 나는 곧장 마음속에 있던 분노를 의념(??)으로 현상화 했다.

조민성을 죽인다.

그 생각과 함께 오른손이 검의 무게로 묵직해졌다. 나를 향해 쇄도하는 푸른 선이 점점 속력을 잃고 이내, 멈춰버린 것처럼 그 움직임이 느려졌다.

푸른 선만이 아니라 허공을 떠도는 먼지조차 느려졌다. 내가 느끼는 세계가 느려졌다.

앞으로 달려 나가며 길을 막는 푸른 선들을 쳐냈다. 무엇이든 [파훼] 시키는 것이 내 `권능`

마나로 이루어진 푸른 선이 권능을 둘러싼 검은 검에 바스러지며 파훼 되었다. 자신의 마법이 파훼 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더욱 많은 푸른 선들이 앞을 막아섰다.

조민성과 나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파훼하며 조민성의 앞으로 다가와. 목을 치려고 할 때. 성은이를 향해 움직이는 푸른 선이 눈에 들어왔다.

다급히 몸을 틀어 성은이의 몸을 꿰뚫으려는 푸른 선들을 파훼하자. 조금씩 느려졌던 세계가 원래의 속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마인화의 지속시간이 끝나가는 증거.

이대로 도망칠 생각으로 성은이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 순간, 내 품에 안긴 성은이의 모습이 푸른 마나로 변하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그 충격에 몸이 날아가 어디엔가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몸을 불로 지진 듯한 격통과 함께 시야가 낮아졌다.

작아진 손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마인화의 반동으로 몸이 작아진 것이다.

몸을 일으키려 해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뭐야. 귀엽게 변했네."

내게 다가온 조민성을 올려다보며 죽일 듯 노려봤다.

"너…성은이를…."

"걱정 마. 방금 그건 마법으로 만든 환영이었어. 성은이는 무사해."

그 말과 함께 조민성이 발로 내 얼굴을 걷어찼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얼굴을 얼얼하게 만드는 통증에 잠시 정신을 놓자. 내 몸 곳곳을 푸른 선이 뚫고 들어왔다.

"아아아악!!!"

가뜩이나 약해진 몸 상태에 가해진 공격에 참지 못하고 비명이 흘러나왔다. 작아진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푸른 선에 정신을 잃기 직전.

조민성은 내 몸에 포션을 부어댔다.

"파트너. `갈증`은 말이야. 마족의 본능이야. 살고자 하는 마족의 본능."

포션으로 새 살이 돋아나는 몸으로 또다시 푸른 선이 뚫고 들어와 상처를 헤집었다.

몇 번이나 그 행동을 반복해 내 몸에 끊임없이 포션을 들이붓는 조민성의 행동에 의지가 꺾여 공포를 느낄 때. 조민성은 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속삭였다.

"계속해서 몸을 치유하느라 생명력을 끌어 쓴다면. 네 몸은 버티지 못할 거야. 아무리 비싼 포션이라해도 만능은 아니니까. `갈증`이 찾아온 상태에서 너와 성은이를 한 방에 놔두면 어떻게 될까?"

조민성의 서늘한 목소리에 나는 조민성의 바지를 붙잡고 애원했다.

"하, 하지마…부탁이야."

"싫어."

내 머리칼을 붙잡은 채 바닥에 쓰러진 나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화장실 같은 하얀 타일이 깔린 방. 그 안에는 성은이가 의자에 앉은 채 울고 있었다.

"으에엥…엄마…엄마…."

피투성이가 된 나를 보고 공포를 느낀 건지 더욱 크게 우는 성은이의 모습에 무어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피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에게 걸린 목줄을 풀어줄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피에 젖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조민성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콧속을 가득 채우며 흘러나오는 뜨거운 액체에 입을 벌려 겨우 숨을 쉬었다. 내 몸 곳곳에서 찢어져 흘러나온 피는 하얀 타일을 적시며 붉은 웅덩이가 되었다.

"괜, 괜찮아?"

내 모습을 걱정하는지.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는 성은이에게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다가오지마!"

내 말에 놀라 몸을 움찔하며 다시 눈물을 흘리며 의자로 돌아가는 성은이의 모습에 조금 안도감을 느낄 때.

내 안에서 심장박동이 아닌 무언가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멋대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는 성은이에게 돌아가는 고개를 억지로 붙잡으며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 누군가가 작은 속삭임을 건넨다.

아프지. 이제 내게 맡겨.

참아봤자 아플 뿐이야.

본능을 참지마.

내 의지를 녹이려는 달콤함 속삭임에 내 머리는 멋대로 [이해]해버렸다.

최악의 순간에.

또다시 찾아온 갈증에 나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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