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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87화 (87/160)

〈 87화 〉 성은

* * *

다음날. 우리의 관계가 변했다는걸 진희는 바로 눈치 챘다.

"너희 어제 무슨 일 있었구나?"

진희의 물음에 성현이에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웃음을 지었다.

어젯밤의 여운이 남아 아직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평온했고 행복했다.

"아, 간만에 수업 끝나고 진희 너도 같이 놀자. 같이 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먹게."

내 말에 진희는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바빠서 안될 것 같아. 다음에 가자."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에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 놀이공원 갈까?"

"놀이공원?"

"응. 여자친구랑 가고 싶었어."

어제의 일 때문인지. 자신이 원하는걸 부담 없이 말하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 말 들으니 나도 가고 싶네."

내 말에 환한 웃음을 짓는 성현이의 모습에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을 때.

돌연, 교실 안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웽­ 하는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경계 경보음 아니야?"

"어떻게 된 거야?"

갑작스러운 경보음에 교실뿐만이 아니라 아카데미 전체가 공황에 빠져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다들 상황을 파악하려는지 휴대폰을 꺼내 들다.

각자의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긴급 경보에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교실의 문이 열리며 달려온 건지 땀을 줄줄 흘리던 담임 선생님이 크게 소리쳤다.

"모두 강당으로 대피해! 경계 경보다. 한 번에 나가지 말고 훈련받은 대로 출석 번호순으로 움직인다. A반이 끝나면 B반과 함께 따라갈 테니. 반장이 인솔해서 강당으로 이동해. 당장!"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겁을 먹었지만. 초월 아카데미는 세상을 위협하는 적들과 싸우는 영웅 지망생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모인 곳.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끝난 상태에서 내려진 명령에. 침착함을 유지 못 하는 아카데미생은 없었다.

우리는 평소에 훈련 받은 대로 신속하게 강당 안으로 대피해. 들어온 순서대로 바닥에 앉아 다음 명령을 대기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선생님들을 보며 사태가 조금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강당에 바닥에 주저앉아 영또플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봤다. 본래대로라면 초월역 테러 이후 리치 `레이나`를 얻게 된 김성현이 건방진 레이나를 조교 하느라 몇 주를 보낸다.

그런데 왜 갑자기 긴급 경보까지 내려진 걸까. 무언가 나비효과가 일어난 걸까?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제일 앞에 있어야 할 조민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민성 어디 갔어?"

내 질문에 성현이도 주변을 둘러봐 조민성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안 보이는데…? 화장실 간 건가?"

조민성이 사라진 이유가 뭘까.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며 누군가의 외침이 강당 안을 울렸다.

"속보! 마인이 플라틴 본사를 공격했대!"

"뭐? 진짜야?"

"플라틴 본사 근처는 사람들 시체로 난리가 났데?"

"플라틴의 회장이랑 임원이 대피했던 곳이 무너졌다던데?"

"미친, 초월동이 뚫리면 안전한 곳은 없는 거 아니야?"

휴대폰을 들어 확인해보니. 속보 기사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플라틴의 본사에 가해진 마인의 테러.

영또플에는 나오지 않던 일이다. 2학년이 끝날쯤 회장이 죽고 그 자리를 후계자인 조민성이 이어받는다는 말은 있었지만.

1학년 1학기가 끝나가는 지금. 조민성이 플라틴의 주인이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변하는 거지? 이것도 큰 흐름인 걸까?

진희에게 묻고 싶었지만. 진희는 차가운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의 진동이 울리며 화면으로 김비서의 이름이 떠올랐다. 혹시, 차성에도 피해가 간 걸까.

"여보세요? 김비서. 별일 없지?"

[아가씨…그, 그게.]

"...왜 그래?"

항상 침착하던 김비서의 목소리가 떨리는 모습에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김성현씨 가족을 모신 곳에 마인이...]

그 뒤로 김비서가 무어라 말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귀에 들어온 목소리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트린 뒤.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성현이의 모습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성현이를 불렀다.

"성, 성현아."

"응.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부모님께 전화해봐…얼른."

숨이 가빠졌다. 폐가 쪼그라든 것처럼 숨 쉬는 게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제발 내 불안한 예상이 빗나가길 간절히 기도했다.

성현이는 내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건지. 황급히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성현이가 조금 안도하는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응. 엄마. 아니 갑자기 경보가 울려서 걱정되서. 응, 응. 아빠는 옆에 있어? 아니야 뭘 바꿔줘."

성현이의 말에 그제야 긴장되었던 몸이 풀렸다.

다행이야. 내 섣부른 오해였­

머릿속에서 김비서가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최악의 가설을 멋대로 [이해]했다.

"성은이는…?"

"응. 뭐?"

"성은이는!!"

내 외침에 당황한 성현이가 어깨를 움츠리고는 물어봤다.

"엄마. 성은이는? 아, 집에 이모랑 같이 있어? 응. 그러­"

성현이의 말을 끊으며 강당 안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휴대폰이 일제히 경보를 울려댔다.

웨엥­ 웨엥­

그 소리만으로도 불안감이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강당 안은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소란스럽게변했다.

휴대폰 화면 속에는 [순현 1동,2동 마인의 공격으로 붕괴. 절대 접근 금지. 가디언즈 출동. 주변 시민들은 근처 영웅협회가 있는 곳으로 대피 바람]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내 휴대폰 화면을 본 성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엄, 엄마…. 우리 이사 간 곳…순현동 아니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성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

몇 시간이 지나 경계 경보가 해제된 이후. 1학년을 제외한 2학년, 3학년은 플라틴을 습격한 마인의 뒷수습을 하기 위해 선생님의 통솔하에 아카데미를 빠져나갔다.

순현동이 마인의 공격으로 붕괴되었기에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뉴스에서는 연신 가족을 잃어 슬퍼하는 사람들을 내보내었고.

거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재가 돼버린 순현동의 모습이 끊임없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성현이는 말없이 휴대폰으로 그것들을 지켜보다. 경계 경보가 끝나기 무섭게 순현동으로 향했다.

같이 가자는 내 말에도 고개를 저으며. 나중에 연락할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가버렸다.

성현이의 뒤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상황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알아가는게 더 중요했다.

나는 황급히 진희를 만나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관해 물어봤다.

"영또플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잖아. 원래대로라면 레이나를 조교 하며 보낼 일상인데. 왜 갑자기 마인이 등장하는 거야? 그것도 2명이나."

마인이 동시에 플라틴과 순현동을 습격했다. 이런 일은 내가 아는 영또플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영또플에서 김성현의 가족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나비효과야."

"...나비효과? 하지만 크게 바뀐 일이 없잖아. 너랑 네가 다 통제하고 있던 거 아니­"

"네가 가장 큰 나비효과잖아 아린아."

"뭐…?"

진희의 말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봤다.

"본래 너는 내가 공략당하고 몇 개월 뒤에 공략당하는 운명. 정확히는 3학년 1학기 후반에 공략당하지."

3학년이 되기 전에 연중 해서 모르지만. 시간의 흐름을 보면 백진희가 스스로 김성현을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였을 때가 2학년의 마지막이었으니. 그쯤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1학년 1학기 후반에 네가 공략당했어. 즉, 2년 뒤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 앞당겨지면서. 큰 흐름이 변한 거야."

진희의 설명이 [이해]가 되었다.

운명대로라면 2년 뒤에나 공략당해야 할 내가. 어젯밤의 일로 김성현에게 공략당한 게 돼버린 것이다.

내가 공략당하기 전 김성현이 공략하는 히로인들과 가졌던 초월 아카데미에서의 2년이라는 시간은 [작은 흐름]이 되어 사라진 것이다.

"그럼...마인의 습격은."

"맞아. 원래는 2년 뒤 일어나는 일이야."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진희의 태도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너…. 알고 있었어?"

"대충은."

나도 모르게 화가 나. 진희의 멱살을 붙잡았다.

"왜 말 안 했어."

"네가 선택한 거잖아 아린아. 김성현에게 처녀를 주겠다고 한 건 온전히 네 선택인걸? 나는 졸업전까지 김성현의 동정을 유지하자고 말했어."

진희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애초에 김성현의 동정을 졸업식까지 유지하자고 했던 것도 사실이고. 김성현과 첫날밤을 보내는 것을 정하는 것도 온전히 내 선택이다. 여기서 진희에게 화내는건 억지나 다름 없었다.

"미안해…. 괜히 탓해서."

멱살을 풀고 사과했다. 나는 또다시 마음 한편으로 진희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것이 아닌가 의심한것이다.

"아니야. 나도 오늘 당장 마인이 습격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으니까. 알았다면 초월역 때처럼 막았을 텐데."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진희의 모습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희도 이 세계를 구하고 싶었을 텐데. 세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던 백진희는 김성현에게 배신당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며. 긴 입맞춤까지 해놓고 백진희의 뒤에서 검을 휘둘러 사지를 절단시켰다.

도대체 왜 김성현은 백진희를 배신한 걸까. 내게 보여준 사랑에 진심인 모습은 기아스로 인해 변한 모습인걸까.

아니면, 마지막에 도달해야 김성현이 본모습을 드러내는걸까?

그 문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하다. 도저히 기억속의 김성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일단 상황 파악이 우선이니까. 나는 좀 더 알아볼게. 아무래도 이 이후의 이야기는 나도 모르니까."

하긴. 내가 공략당하고 난 이후의 일은 백진희가 모를 수밖에 없다.

내가 공략당하기 전에 백진희가 공략당하는 게 순서니까. 김성현이 공략하는 2학년 2학기때마다 자살을 해왔다면 그 이후 3학년에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건 당연한 일.

"그래. 뭐든지 알아내면 알려줘. 나도 도울게."

"응. 아린아."

나는 백진희의 방에서 나와 내 방으로 돌아갔다.

성현이가 급히 순현동으로 떠나자. 혼자남은 아레아가 내 방으로 놀러 와 여자의 모습으로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여주인! 주인한테 연락 없었어?"

"응…. 곧 연락이 올 거야 기다려보자."

성현이를 걱정했는지 나를 보자마자 곧장 성현이부터 찾는 모습에 아레아가 성현이를 무척이나 아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나 휴대폰 좀 해도 돼?"

"응. 그러고 보니 아레아도 휴대폰 필요하지 않아?"

"헉! 필요해! 완전 필요해요!!"

순식간에 눈이 동그래져 내게 달라붙는 아레아의 모습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성현이 돌아오면은 같이 휴대폰사러가자."

"진짜지! 역시 여주인밖에 없어. 주인은 좀생이에게다가 맨날 나 때리려고만 해!"

"성현이가 너 때렸어?"

아레아의 말에 놀라 묻자. 아레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니, 진짜 때리지는 못하는데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레아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혹시, 기아스때문에 나한테만 잘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함부로 구는 거 아닐까 봐 조금 의심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너무 비약인가 보다.

교복을 갈아입고 물을 마시는데 아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주인~ 전화왔어!"

성현이가 전화한 건가 싶어 급히 달려가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처음 보는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안녕. 파트너.]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민성…."

[에이, 파트너라고 부르라니까.]

"바쁠 텐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마인이 플라틴 본사를 습격해서 정신이 없을텐데. 중간에 강당에서 사라진 조민성이 갑자기 내게 연락을 하다니.

조민성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나 이제 플라틴 회장이야. 회장님이랑 임원들이 모조리 죽었거든. 파트너인데 축하 안 해줄 거야?]

"축하해."

[응. 그래서 말인데 파티를 하려고.]

조민성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레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파티…? 방금 네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파티를 하는 거지. 파트너니까 너도 와.]

역시 조민성은 미친놈이다. 정말로 마인이 조민성의 아버지를 죽인 걸까? 마인의 습격을 틈타 강당에서 사라진 조민성이 아버지를 죽였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다.

성현이가 없는 상황에서 조민성과 만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바쁘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장난기 섞인 조민성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그 장난스러운 말속. '성은'이라는 말에 나는 바늘에 찔린 것처럼 몸을 움찔하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알아들었으면 주소 보낼 테니 1시간 안에 혼자와.]

통화가 끝나고 조민성에게 온 메시지에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 사진을 확인한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에 이성을 잃을 뻔했다.

사진 속.

두려운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은이의 뺨에는.

조민성이 검은 펜으로 적은듯한 주소가 적혀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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