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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86화 (86/160)

〈 86화 〉 스며들며 물들어간다

* * *

단지 입술을 맞대었을 뿐인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잠들어있던 열기가 올라왔다.

내 윗입술을 부드럽게 핥는 아린이의 혀에 나도 입을 벌려 혀를 내밀어 서로의 사랑을 섞었다.

무언가를 갈구하듯 깊은 키스를 하던 아린이의 손이 내 가슴을 만지며 조금씩 내려가다.

완전히 발기한 것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떼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구나."

"응?"

"아니야. 주말에 데이트할까?"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는 아린이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대로 끝인 건가…?

순식간에 타올라 재만 남은 것처럼. 달아오른 감정이 뚝 하고 끊기자. 조금 허탈한 감정이 남아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주말에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아니면 내가 좋은 곳 알아볼까?"

내 대답에 물을 마시던 아린이는 몸을 크게 움찔하더니. 잔을 내려놓고 그대로 뒤를 돌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김성현. 아니, 성현아."

"...응."

조금은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아린이의 모습에 덩달아 나도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왜 그러는 거야?"

"응?"

"바뀌기 전의 너는 이러지 않았잖아."

아린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바뀌기 전이었다면 물을 마시고 있는 아린이를 뒤에서 껴안아 억지로 가슴을 만졌을 것이니까.

내기 전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 걸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적응이 힘들었을 수 있다.

"이제는 바뀌고 싶어서. 너한테 약속했잖아. 네가 원하지 않으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겠다고."

내 말에 말없이 입술을 오물거리는 아린이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정말로 아껴주고 싶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너를 사랑하니까."

말이 끝나자. 찾아온 건 긴 침묵이었다.

불편한 침묵이 아닌 서로를 향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서 온 침묵.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내 발밑으로 시선을 내리깔던 아린이는 시선을 올려 흑요석같이 밝게 빛나는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동안 너한테 많은 핑계, 거짓말을 하면서 상황을 모면하거나 대신 해결해주기만을 원했어. 내 잘못을 너의 탓으로 돌리기도 했고. 그 탓에 너랑 싸우기도 했고 주변에 피해를 끼친적도 있어."

자책하는 표정으로 아린이는 말을 이어갔다.

"네 곁에 있을 때 계산적으로 행동한 적도 많아. 이렇게 행동하면 네가 좋아하겠지. 이 정도면 여자친구의 역할을 해 준거겠지. 너를 사랑하긴 했어도 그 감정이 온전한 사랑이었다고는 말 못 해. 나는 누구보다 이기적인 사람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 거야. 너에게 내 처음을 준 것도 너를 온전히 사랑해서만은 아니었으니까."

아린이의 말에 조금 가슴이 쓰려왔다. 그 말에 공감했으니까.

잘못된 걸 알면서도, 아린이가 내 행동에 힘들어한다는 걸 알고. 오히려 이기적으로 그 점을 이용해 아린이를 구석으로 몰아 억지로 고백을 받은 날.

우리의 처음 시작은 온전한 사랑으로 시작된 게 아니었다.

아린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 고백을 받아줬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린이를 손에 넣었다는 소유욕에 행복했다.

그 소유욕은 시간이 지날수록 집착으로 변해 아린이에게 억지로 사랑을 강요했고. 의심했으며 확인하려 들었다.

처음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언제부턴가. 이 여자를 온전히 내 것으로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변했고.

조민성에게 아린이를 빼앗길까 두려운 마음은 비골을 시켜 매일 밤 아린이를 발정 나게 했다.

아린이가 힘들어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내 앞에 무릎 꿇고 애원하는 모습을 기대했다.

내 계획대로 아린이와 첫날 밤을 갖게 된 날. 나는 그때가 돼서야 온전한 사랑을 느꼈다.

섹스가 하고 싶다. 가슴을 빨고 싶다 같은. 이런 성욕 어린 감정이 아닌.

평생 함께하고 싶다.

무엇이든지 같이하고 싶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런 온전한 감정들을 느꼈으니까.

그것이 기아스때문인지. 서로의 몸을 섞어서인지 모르나.

그동안 사랑이라고 속여왔던 감정들이 소유욕과 정복욕이 뒤섞인 추악한 감정이라는걸 깨달았을 때.

나는 그동안의 나를 후회했고 변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느낀 온전한 사랑의 감정을 혼동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는 아니지만.

이 관계의 끝은 분명.

사랑일 테니까.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린이의 말이 슬퍼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해왔던 잘못들. 아린이에게서 빼앗은 행복들에 대한 죄책감이 눈물이 되었다.

뿌옇게 변한 시야로 아린이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에 대한 죄책감일까. 이렇게 돼버린 우리에 대한 슬픔일까.

아린이는 흐르는 눈물을 목욕 가운의 소매로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변할 거야. 네 앞에서 계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거야. 네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하려고 잠을 설치지도 않을 거야. 네가 사랑한다고 하면은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야. 이제 내 모든 행동은 네 앞에서 진심일 테니까. 너도 나와 같이 진심일 거라고 의심하지 않고 믿을 거야."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런데도 심장이 크게 뛰는 소리는 아린이의 말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다.

아린이는 스스로 가운의 끈을 풀어 가운을 벗은 뒤. 아름다운 나신을 드러냈다.

"나는 가끔 네가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지, 내 행동에 잘못된 해석을 하는지. 불만일 때가 많았어. 이유는 알아. 내가 원하는 걸 너에게 표현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변하기로 했으니까 말하는 거야. 나는 너를 원해. 매일 같이 너랑 함께 있고 싶고. 매일 같이 너와 사랑하고 싶어. 뜨겁게 키스를 하며 사랑을 확인하고 싶고. 너와 하나가 되어 사랑을 나누고 싶어. 그러니까 너도 나와 같다면…내가 알 수 있게 말해줄래?"

아린이의 말에 심장을 망치로 후려친 것 같은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표현하지 않았다. 바뀐 나로 인해 부담이 될까 봐.

또다시 섣부른 내 행동에 상처를 줄까 봐.

아린이가 나를 거절할까 봐.

결국은 내가 상처 입을까 아린이에게 다가가지 못한 거면서.

사랑하고 아껴준다는 말로 변명하며 마음의 가시에 닿지 않게 거리를 벌린 것이다.

그런데도 아린이는.

가시에 찔려 상처 날 마음이 두렵지도 않은지. 온전한 진심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내가 내딛지 못한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아린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수라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평생을 기다릴 수 있다. 지껄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할까 두려워 다가가지도 못한 멍청한 놈이 부린 허세.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뿌옇게 변한 시야로 아린이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내 머리를 끌어안아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나는 더욱 눈물을 흘렸다.

억지로 입술을 깨물어 흘러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뿌옇게 변한 시야로 아린이를 올려다보았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다. 그동안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었고. 내가 느낀 행복과 사랑의 감정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너무 많은 말과 감정이 섞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린이를 바라보자. 아린이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성현아. 너도 나 사랑해?"

그 말에 나는 언젠가 아린이가 나에게 써주었던 글이 떠올랐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보라색 히야신스를 꺾어주던 날.

벌을 받는 도중 아린이에게 보낸 쪽지에.

아린이가 답한 한 줄의 글로 담은 마음.

그 글이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지금에서야 아린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한 건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손을 들어 나를 내려다보는 아린이의 뺨을 쓰다듬으며 조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일도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 말이 아린이의 물음에 정답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린이는 내 대답에 눈물과 함께 환한 웃음을 지었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물과 함께 사랑을 속삭였다.

밤은 길었고.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기에는 좋은 밤이었기에.

감정에 스며들었고.

사랑에 물들어갔다.

***

"아버지."

플라틴의 회장 조민종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에 조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본래 후계자였던 자식들이 병과 사고로 하나둘 죽고. 마지막 남은 제 아들이자. 플라틴의 후계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본 조민종은 조민성에게서 느껴지는 본능적인 불안스러움을 항상 경계했다.

"무슨 일이냐. 늦은 시간인데."

탁자 위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4시가 지난 늦은 시간이었다.

"그냥…아직 주무시지 않은 것 같아서요."

"일이 많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구나. 얼른 가서 자거라."

평소 같았으면 그 말에 복종하듯 곧장 방으로 돌아갔을 조민성이었지만. 그 자리에 서서 마치 조민종을 관찰하는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마음속 깊은 곳을 멋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소름 돋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 있는 거냐."

"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맥락 없는 질문에 의아할 때쯤 조민종의 주변으로 푸른 선이 나타나 몸을 속박했다. 그 맹렬한 기세에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너, 너 이게 무슨 짓…."

"신재호와의 거래. 제가 이어가겠습니다."

조민성의 말에 심장이 얼어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신재호와 거래한 걸 조민성이 알고 있는 걸까.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일일 텐데.

"너, 그걸 어떻게 알고…미친 소리하지 마라. 신재호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면…."

조민종의 말이 끝나기 전에 조민성의 뒤에서 나타난 백진희의 희고 긴 손가락 하나가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버지."

조민성의 뱀 같은 미소와 함께 조민종의 의식은 깊은 곳으로 추락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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