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약속
* * *
연신 내게 안겨 투덜대던 아연이는 막상 과자 앞에 서자. 어떤 걸 고를까 신중한 표정으로 검은 눈을 밝게 빛냈다.
그 모습이 워낙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머리를 쓰다듬자. 정수리를 가리며 또다시 귀여운 모습으로 나를 경계하는 모습에 사과했다.
"미안.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한 손은 정수리를 보호한 채 과자를 신중하게 고르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웃고 있자. 주변의 사람들도 아연이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연이가 고른 상품과 내가 마실 음료수를 하나 산 뒤. 근처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과자 봉투를 뜯어 앞에 두자. 작은 손으로 하나씩 집어 먹는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자. 부끄러웠는지 나를 바라보며 손을 멈추기에 시선을 돌려 모른 척 음료수를 마시자.
아연이는 다시 손을 움직여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아린이를 똑 닮은 아연이의 모습에 백진희가 아린이를 챙겨주는 이유가 아연이와 닮아서인 걸까. 추론하고 있을 때. 아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친구 있어요?"
"응? 여자친구? 있지. 너랑 닮은 예쁜 여자친구."
꼬마 여자애가 이런걸 물어볼 줄 몰랐기에 조금 당황해하며 대답하자. 아연이는 관심이 생긴 건지 검은 눈을 빛내며 손에 묻은 과자를 털어내며 나를 바라봤다.
"여자친구랑 사이좋아요?"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요즘은 조금 서로에게 적응하고 있는 기간이라…."
어린 애가 알아듣기에는 조금 어려운 말일까 싶어. 아연이를 바라보자. 무언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좁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린이와 비슷해 웃음이 나왔다.
"...왜 자꾸 웃어요?"
"아, 미안해. 네 모습이 내 여자친구랑 똑 닮았거든. 그래서 자꾸 여자친구 생각나서 웃음이 나오는 거야."
내 대답에 아린이는 조금 부끄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여자친구 생각하면 웃음이 나요?"
"응. 음, 아연이가 사랑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행복한 것처럼 나도 사랑하는 여자친구를 떠올리면 행복해서 웃음이 나오는 거야."
여동생에게 설명하듯 풀어 말해주자. 아연이는 왜인지 얼굴이 빨갛게 변했지만, 호기심을 지우지는 못했는지 계속해서 내게 물어왔다.
"얼마큼 사랑하는데요?"
"음, 여자친구가 원하면은 이런 과자로 된 집을 만들어줄 수 있을 만큼?"
"진지하게요!"
어린애의 수준에 맞춰 대답해줬더니. 아연이는 오히려 화를 냈다.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진지하게 대답해줘야겠지.
"여자친구를 위해서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거짓말."
"허,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믿음이 안 가는 얼굴인가?"
아연이의 말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변한 내 얼굴은 사실 지구는 둥글지 않다고 사기를 쳐도 믿음이 팍팍 갈 정도의 신뢰성 있는 멋있는 얼굴인데.
아이들의 시선에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머쓱해 하며 뒷머리를 긁고 있자 아연이는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었다.
"여자친구가 속이고 있던 게 있으면요?"
"글쎄, 용서해주지 않을까?"
"용서 못할 정도의 거짓말은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는데. 아연이는 내 진지한 대답을 기다리는 듯. 아까와는 다른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가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한 가지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엄마나 아빠가 바람을 피우는 걸 우연히 알게 된 걸까?
나를 바라보며 흑요석 같은 검은 눈을 밝게 빛내는 아연이의 모습에 나는 조금 진지한 태도로 아연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이에 용서 못할 건 없어."
내 대답에 조금은 멍한 표정을 짓는 아연이의 모습에 나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 아닌 실수임을 깨달으면 보통은 그것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든. 과거의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실수했어도 그 실수마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니까. 받아들일 수 있어."
조금은 조심스럽게 내 속마음을 말했다. 혹시, 아연이가 내 대답에 상처받지 않을까.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말을 꺼내었다.
"만약 누군가 실수를 했다면. 그 사람이 사과할 때까지 모른 척 기다려주면 돼. 만약, 그 사람이 그 일을 사과하지 않고 넘어가려 하면. 그 사람은 실수한 게 아니라 잘못된 선택을 한 거야. 그 차이를 기억해야 해 아연아."
실수와 선택의 차이.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을 아연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처음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는 행복에 아린이에게 했던 내 설익은 행동들.
그건 실수라고 부를 수 없는 명백한 나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아린이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함이 마음 한편에 항상 남아 있다.
내가 조금 더 여자에 대해 알았다면, 조금 더 성욕이 아닌 이성으로써 아린이에게 다가갔다면 아린이에게 더 좋은 남자친구였을 거라는 후회.
그 후회들은 지금. 아린이를 소중하게 아껴주고 사랑하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연이를 돌아보자.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으앗! 미안, 미안해!"
황급히 의자를 박차고 아연이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여주자. 아연이는 내 행동에 더욱 서러운지 내 목에 팔을 감고 울기 시작했다.
예쁜 아이가 서럽게 울자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몰려드는 게 느껴져 황급히 등을 토닥여주자. 내 쇄골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로 축축하게 젖혀가던 아연이가 울먹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빠, 나빠…."
"맞아. 오빠 나빠. 미안해 뚝. 울지마 아연아…."
성은이도 울기 시작하면 몇십 분을 뚝뚝 굵은 눈물을 흘려댔기에. 아연이가 더 울기 전에 열심히 다리를 움직여 스탭을 밟으면서 등을 쓸어내려 주자.
조금씩 울음이 줄어드는 게 진정하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흘리려할때.
아연이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여자친구가…훌쩍…사랑하…지…킁…않는다고 하면…요?"
아연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달래주려 좌우로 스탭을 밟던 것을 멈추고 내게 안겨 눈물이 고인 채 나를 올려다보는 아연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이혼할까 무서운 걸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부모님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서로를 사랑해주셨기에. 어렸을 적 이런 불안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연이의 울먹거리는 얼굴 뒤로 숨어있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언뜻 보이는 듯 했다.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까. 아연이를 위한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아니면, 진지한 내 속마음을 얘기해줘야 하는 걸까.
"나는…. 그러니까 온전히 내 생각인 거야. 알았지? 그냥 이 오빠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알아두기만 해."
아연이가 내 섣부른 말에 상처받지 않게 내 생각일 뿐이라고 몇 번을 확인하자. 아연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분홍빛으로 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괜찮아.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려주고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사람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열심히 노력할 거야. 내가 느꼈던 감정들 내가 느꼈던 행복을 그 사람도 알 수 있게. 그래도 안 된다면 기다려야지. 언제가 되었든 내게 돌아올 거라고 믿으니까."
내 말에 한참을 입술을 우물거리던 아연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이…. 평생 안 돌아오면요?"
아연이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봤다. 지금 나를 타인처럼 대하는 아린이가 결국에 과거의 나를 못 잊어 나와 헤어지게 된다면….
"평생을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겠지. 그 사람이 내게 오지 않는 동안 행복했으면. 내가 주지 못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받았다면….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연이를 바라보며 내 진심을 말했다.
가끔 아린이를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난 너라면.
어떤 웃음을 짓고 있을지.
어떤 예쁜 말로 상대방과 사랑을 나눌지.
네가 받아야 할 온전한 사랑을 나로 인해 받지 못하는 건 아닌지.
그때의 나는 열등감 덩어리라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억지로 아린이의 사랑을 확인하고는 했다.
지금에서야 그 행동이 얼마나 아린이에게 무례하고 믿음이 떨어지는 행동이었는지 깨달았다.
아린이에게 과거의 내 잘못을 떠올리지 못하게.
지금의 내가 그 위로 새롭게 사랑을 덧씌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나를 보며 슬퍼하고 후회하는 아린이를 보는 건.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일 것 같으니까.
내 말을 듣고 눈물을 참듯 윗입술을 깨물고 굵은 눈물을 긴 속눈썹에 달고 있는 아연이의 모습에 또다시 황급히 스탭을 밟으며 등을 쓸어내렸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아연이는 서럽게 울며 내게 `바보!`라고 소리쳤다.
한참을 달랜 후 예쁜 보석 사탕을 물려주고 나서야 울음이 멈춘 아연이는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상대방이 알 수 있게 사랑한다고 표현해요."
"응? 조언해주는 거야? 알았어. 꼭 그럴게."
"...약속해요."
퉁퉁 부은 눈으로 작은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아연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꼭 안아준 다음. 그 작은 새끼손가락에 내 새끼손가락을 겹쳤다.
"약속할게."
내 말에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보이는 아연이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 모습에 이상하게도 내 눈에도 아주 조금.
눈물이 고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