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부성애
* * *
수업이 끝나고 아린이와 도서관으로 향했다.
예전의 추억을 되살릴 겸, 공부하는 남자친구의 멋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던 여자들의 커뮤니티에 올라오던 짤을 봤기에.
아린이에게도 내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도서관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다.
책을 펴고 공책을 옆으로 꺼내놓자. 아린이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길래 미소로 답하자.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조금 의아스러웠다.
사각거리는 필기하는 소리. 책을 넘기는 소리와 도서관 특유의 냄새.
의도가 어찌 되었든 도서관 데이트를 하자고 한 것은 좋은 선택 같다.
도서관 특유의 분위기는 아린이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묘하게 어우러져.
나도 모르게 책을 읽는 아린이의 모습을 관찰했다.
내 시선을 의식한 건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슬쩍 나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책을 바라보는 매력적인 모습에.
나도 헛기침을 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1학년 마지막 시험인 자격시험에서 이론은 30%의 점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론은 포기하고 메긴기요르드를 이용해 실습으로 유급만 벗어나려고 계획했었지만.
이제는 가디언즈라는 큰 목표가 정해졌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룸메이트들도 바뀐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들 놀라워했지만. 아직 아린이는 이런 내 노력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아린이를 깜짝 놀라게 하는 상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소리가 조금 컸나 싶어 고개를 드니. 아린이는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민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하는 건가 싶어 바라보자. 시선이 마주친 아린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책가지고 올게."
"응."
벌써 다 읽은 건가? 다시 공부에 집중하려 책을 읽을 때. 영화에서 보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여자주인공이 책장에 꽂힌 책을 꺼내려 하지만. 책이 높이 있어 불가능할 때. 남자주인공이 뒤에서 나타나 아무렇지 않게 책을 빼주는 장면.
여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엄청나게 설렌다고 댓글을 남긴 게 떠올라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린이를 위해 책을 뽑아줘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아린이를 찾아봤다.
사람이 별로 없는 으슥한 F 열 코너. 종교, 마신 등. 고리타분한 책이 있는 코너였기에 다른 곳에 비해 인기가 떨어지는 곳이었다.
거기서 뒷짐을 진 채 책의 제목을 천천히 읽어내리는 아린이의 모습이 한 편의 그림과 같아 기억 속에 남을 정도로 예뻐 보였다.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을 배경음 삼아 아린이에게 조용히 다가가자. 아린이는 괜찮은 책을 찾은 건지 손을 들어 꺼내 들려 하기에.
황급히 대신 책을 꺼내주려고 손을 뻗었다가 실수로 책을 잡고 있던 아린이의 손등을 잡아버리며 몸의 중심을 잃었다.
체중으로 아린이의 등을 누르듯 손등을 붙잡은 채 몸을 밀착한 자세로 그대로 굳어버리자.
고개를 숙인 아린이에게서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역, 역시…."
황급히 손을 떼고 밀착했던 몸을 풀자. 아린이는 몸을 돌려 입술을 깨물고 나를 바라봤다.
괜한 오해를 살까. 아린이가 꺼내려던 책에 손을 뻗어 꺼내 들어 아린이에게 건네주려는 데.
어째서인지 아린이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멋대로 손잡아서 화가 난 건가…?
그 행동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해. 잠시 책을 든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슬며시 눈을 뜬 아린이가 나를 보고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책 꺼내려던 거 아니야…?"
뒷머리를 긁으며 책을 건네주자. 아린이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몸을 돌려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에 아린이가 화가 난 건지, 내 행동에 감동을 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아 뒷머리를 긁으며 나도 자리로 돌아갔다.
***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 뒤. 저녁을 먹기 위해 아린이와 함께 교내 식당으로 왔다.
처음으로 식당에서 아린이와 단둘이 밥을 먹는 거라. 괜스레 기분이 묘하게 느껴졌다.
오늘 저녁 메뉴는 돈가스가 나온 메뉴였기에 만족스러워하며 먼저 자리를 잡아 아린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맞은편으로 아린이가 아닌 웬 이름 모를 여자애가 자리에 앉았다.
"안녕?"
"어? 응. 안녕."
식당 안에 정해진 자리가 없긴 하지만. 빈자리가 많을 텐데 굳이 내 앞자리에 앉는 이유는 뭘까.
굳이 맞은편이 아니어도 옆자리가 비어있으니 상관은 없다만….
"옆자리 비었네? 앉아도 돼?"
또다시 내 양옆으로 이름 모를 여자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미 자리에 앉아 놓고 앉아도 되냐는 질문은 왜 하는 걸까?
"성현아. 너 엄청나게 잘생겨졌다. 멀리서 보는데 후광이 엄청나더라!"
"그니까. 식당에서 혼자 빛나고 있어서 눈에 확 뛰더라."
"이렇게 잘생기게 변할 줄 진짜 아무도 예상 못했을걸?"
나를 사이에 두고 자기들끼리 하이톤으로 떠들어대는 게 여간 귀가 아픈 게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헛웃음을 짓고 있을 때. 식판을 들고 오던 아린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레아의 허리를 만지다 오해를 받았을 때 보았던 싸늘한 표정. 아무 말 없이 근처 비어있는 자리에 앉는 아린이의 모습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밥 안 먹어?"
"우리가 시끄러웠어?"
이름 모를 여자들의 말을 무시하고 식판을 들고 아린이의 맞은편에 앉자. 뒤에서 무어라 여자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아린이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좋아 보이던데 그냥 계속 있지."
"안 좋았는데."
정말로 짜증 났고 귀찮았는데. 아린이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매를 치켜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좋아서 웃기까지 해놓고."
그 작은 중얼거림에 아린이가 질투를 하는 건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아니야."
내 웃으면서 한 대답이 아린이를 더 자극한 건지. 아린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화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질투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응?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질투 아니야. 질투 안 해!"
그 모습이 어제 보았던 아린이를 닮은 귀여운 백진희의 친척이 심술부리는 모습과 겹쳐 보여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알았어. 아린이는 질투 안 해. 자, 이거 먹어."
그렇게 말하고 돈가스를 썬 다음. 아린이의 식판과 내 식판을 바꿔줬다. 이게 돈가스 먹을 때 남자친구가 해줘야 하는 매너 행동이라는 걸 어디서 본 기억이 나서 해줬다.
다시 돈가스를 썰고 있자. 아린이는 내 모습을 지켜보다 살짝 삐져나온 입술로 내게 물었다.
"밥 먹고 뭐할 거야?"
"아. 나는 훈련 예약해놨어. 훈련 카드 써야 할게 있어서 오늘 쓸려고."
약속했던 도서관 데이트도 했고 아린이도 자기 시간을 갖기도 해야 하니까.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변하기로 결심한 이상 열심히 해야지.
"...그래."
아린이의 반응에 혹시 데이트가 끝나서 아쉬워하는 건가 싶어. 넌지시 물어봤다.
"아니, 나도 백진희랑 훈련하기로 했어."
"그래? 잘됐네."
역시 백진희. 아린이 옆에서 지켜달라는 부탁에 바쁘다고 말해놓고서는 아린이와 훈련을 한다니. 역시 백진희는 아린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
믿음직한 친구. 백진희라면…. 조금은 안심이 됐다.
"뭐가 잘돼?"
"응?"
조금은 서늘한 목소리에 수프를 마시다 고개를 들어 의아한 눈으로 아린이를 바라보자. 아린이는 입술을 깨물고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역시 데이트가 끝나는 게 아쉬운 걸까? 내일은 미리 물어보고 훈련을 예약해야겠다.
이런 점에서 내가 여자 경험이 부족한 게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
"7초. 어제보다 3초나 늘었어 아린아. 축하해."
또다시 작아진 몸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겨우 7초밖에 마인화를 유지하지 못했는데. 백진희는 잘했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개를 올려 백진희를 바라보자. 내 양 볼을 붙잡고 길게 늘이는 행동에 도망치려다 늘어난 옷에 걸려 바닥에 넘어졌다.
"아린아~ 몸이 작아졌으면 조심해야지."
쓰러진 내 몸에 붙은 먼지를 털어주고 아이를 안듯 나를 안아 든 백진희는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내 등을 토닥여줬다.
"뭐야. 애 취급하지 마."
"누가 봐도 애인데~? 오늘은 아린이를 위해 옷까지 준비했는걸?"
"무슨 옷을 준"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할까 따지려 드는데. 레이나가 들고 오는 옷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레이나의 손에는 어린애들이나 입을 법한 핑크색 공주님 옷이 들려 있었다.
"주인님. 준비됐습니다."
"그래, 얼른 갈아입히자."
"싫어!!!"
백진희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몸뿐만 아니라 힘까지 약해졌기에.
다가오는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
훈련을 끝내고 샤워를 한 뒤. 아직 젖은 머리 위로 수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백진희가 다가왔다.
"어? 안녕. 또 보네."
백진희의 뒤에서 귀여운 분홍색 공주님 옷을 입고 다리에 탁 달라붙어 몸을 숨기고 있는 꼬마가 보여 인사를 건넸지만. 아직도 낯을 가리는지 내 인사에도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성현아. 미안한데 잠깐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응? 뭔데? 당연히 들어주지."
백진희가 나에게 도와달라 하다니.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신기했다. 그동안에 쌓아놨던 빛을 지울 겸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어 내 쪽으로 밀었다.
아이는 떨어지지 않으려는지 작은 손으로 끝까지 백진희의 옷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백진희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는지 결국, 내 앞으로 와 고개를 푹 숙였다.
"나 일이 있어서 그런데. 1시간 정도만 애 좀 맡아줄 수 있어? 부탁할게."
"당연하지. 근데…. 안녕? 이름이 뭐야? 나는 김성현인데."
무릎을 꿇어 눈 높이를 맞춰 시선을 마주하자. 얼굴이 빨개진 아이는 입술을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미안. 낯을 많이 가려서 이름은…. 아연이야. 백아연."
"아연이구나. 아연아 오빠랑 1시간만 같이 있을까?"
아연이의 모습을 보니 여동생 성은이가 떠올랐다. 성은이랑 1~2살 차이밖에 안 나는 것 같은데. 성은이보다 더 타인을 낯설어하는 것 같다.
뭐, 그건 기본 성격의 차이니까.
"대답해야지 아연아~ 오빠가 묻잖아."
진희가 웃으면서 말하자. 아연이는 몸을 돌려 퍽퍽 소리가 나게 백진희의 허벅지를 때려댔다.
자기를 놓고 간다고 생각해서 저러는 건가? 아이들이 하는 행동은 참 귀엽다.
"쓰읍. 자꾸 이러면 진짜로 혼낼 거야."
백진희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자. 몸을 크게 움찔한 아연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게 몸을 돌렸다.
기죽은 모습에 당장에라도 안아들어 오구오구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1시간 뒤에 연락할게. 잘 부탁해 성현아."
"응. 알았어."
다행히 식당 건물 안에 편의시설이 많았기에 그곳으로 가면 과자나 사탕 같은 걸 사줄 수 있으니. 아연이를 달래줄 수 있을 것이다.
멀어져가는 백진희를 원망스레 바라보는 아연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자. 화들짝 놀라 하며 자기 정수리를 가리는 모습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진짜 귀엽다. 오빠도 아연이랑 비슷한 나이의 여동생이 있거든. 아, 아연이는 몇 살이야?"
"...7살."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중얼거리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지만. 낯설어하는 아이에게 그런 행동은 부담이 될 수 있어서 참았다.
"아연이 사탕 먹으러 갈까? 저기에 맛있는 거 파는 곳 있는데."
"나 애 아니야."
누가 봐도 귀여운 7살인데. 자신은 애가 아니라는 아이의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알았어. 그럼 과자 먹으러 가자. 여기는 쉴 곳이 없거든."
손을 내밀자. 아연이는 망설이다 작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서질 것만 같은 아주 작고 여린 손에 자연스럽게 긴장하게 되었다.
보폭의 차이라는 게 있어서 내 한걸음이 아연이에게는 4걸음이라. 최대한 보폭을 맞추며 걷다가 조금 경사진 언덕길이 나와 별수 없이 아연이의 허락을 받아 안아 들었다.
"으헤잇!"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아연이의 모습에 웃음을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부성애라는 게 마음을 간지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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