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아레아의 다짐
* * *
김성현이 멀어지자 나는 백진희의 등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작게 속삭였다.
"눈치 못 챘겠지?"
"글쎄~"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작아진 모습으로 변한 이유는... 마인화의 대가였다.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마인화를 한 반동이라며 레이나가 무어라 설명해줬지만, 몸이 작아졌다는 충격에 기억나는 말은 `시간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밖에 없었다.
몸이 작아져 버렸기에 교복이 다 흘러내려 대충 옷핀으로 고정한 채 백진희의 등에 매달려 몸이 돌아올 때까지 비밀의 방에 숨어 있으려 했는데.
하필이면 김성현이 훈련장에 와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꼴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김성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귀여운 동물이라도 보는듯한 시선을 보내며 따듯한 미소를 지었기에 괜스레 부끄러워져 백진희에게 얼른 가자고 속삭이자.
오히려 백진희는 나를 놀리려고 장난을 쳤다. 그것 때문에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백진희를 말리느라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성현이는 아린이 귀엽게 보는 것 같은데."
"몰라…."
"내가 봐도 아린이 지금 무척이나 귀여워."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백진희의 말을 무시하고 등에 얼굴을 파묻자. 백진희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무척이 향기로워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음이 편안해져서인지. 백진희의 등이 따뜻해서 그런지. 점점 피곤함이 몰려와 결국, 백진희의 등에 안긴 채 잠에 빠졌다.
***
다음날.
다행히도 내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계속해서 어린애 몸으로 있으면 어쩌나 불안해하며 잠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원래대로 돌아와서 무척이나 안심이었다.
"어제 내 친척 알지? 걔 잘 때 몰래 찍은 사진인데…."
"그걸 왜 김성현을 보여줘!!!"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김성현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기에 화들짝 놀라며 백진희의 휴대폰을 뺏었다.
휴대폰 화면을 보니 세상모르고 잠든 어제의 내 모습이 보였다. 이런 사진은 없애야….
삭제키를 누르려는 순간, 내 손에서 빠져나간 휴대폰이 백진희의 손으로 돌아갔다.
"지우면 안 돼. 소장용이야."
"잘 때 몰래 찍은 거잖아. 소장하지 마."
"친척이 괜찮다는데 왜 아린이가 화내~?"
백진희의 미소에 시선을 피하자. 김성현이 코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린이 닮아서 아린이 친척인줄 알았는데. 백진희였구나."
"어제 걔 어땠어? 이뻤지?"
백진희의 질문에 김성현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 딸 있었으면 행복할 것 같긴 해. 사랑스럽잖아."
김성현의 그 말에 괜히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아, 아린아. 오늘은 수업 끝나고 나랑 데이트할 거지?"
"...왜."
"증명할 시간 준다 했잖아. 기회를 줘야지."
김성현의 말에 한숨이 나왔다. 김성현이 확실히 전보다 더 좋게 변했다는 걸 알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타인처럼 느껴졌다.
내게 잘해주다가 갑자기 돌변해 백진희를 배신했을 때처럼 뒤에서 내 팔다리를 자르려 들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다.
그렇다고 김성현이 무섭다고 피할 수도 없다. 회귀라는 탈출 카드도 사라진 이상. 각성한 김성현과는 최대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니까.
"...알았어."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기분 좋은지 미소를 짓는 김성현의 모습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날씨가 더워졌기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다. 초월역에서 보자고 약속했기에 시간에 맞춰 차기사님을 불러 초월역으로 향하자. 초월역 앞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달리 모델 같이 멋있어 보이는 사람 한 명이 이목을 끌고 있는 게 보였다.
차에서 내려 다가가자. 주변 여자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무표정하게 휴대폰을 하는 김성현의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변한 김성현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 정도의 외모를 가졌다.
김성현에게 다가가자. 김성현을 훔쳐보던 여자들이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김성현."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따뜻해 보이는 갈색의 눈동자가 나를 확인하고는 예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데이트하기로 약속한 신아린씨 맞으시죠?"
"...뭐야?"
갑자기 웬 존댓말을 하는 거지.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걸까 경계하며 바라보자 김성현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변하고 처음 데이트하는 거니까. 첫 만남인 것처럼 해보려고."
"흥, 바보 같아."
오히려 이게 더 어색할 것 같은데. 갑자기 김성현에게 존댓말을 들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바보짓에 어울려줘. 영화 예매했으니까 가실까요?"
"계속 존댓말 할 거야?"
내 물음에 김성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는 그럴게요."
"그래요 그럼."
자꾸 이상한 컨셉을 지키려 하기에 나도 따라 존댓말을 하자. 기쁜 듯이 웃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이런 뜬금없는 짓을 하는 건 전의 김성현과 차이는 없는 것 같다.
팝콘과 음료수를 구매하고 자리에 앉자. 갑자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셋이서 영화를 보러 간 첫날. 큰 팝콘 통을 내게 들게 하고 백진희 몰래 내 가슴을 만져대던 기억.
설마 또 그런 짓을 하려고 영화를 보려고 한 걸까. 조금 의심스러워하며 고개를 돌려 김성현을 말없이 바라보자.
김성현은 그저 눈이 마주친 걸로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내게 기울여 속삭였다.
"내가 그리 멋있나. 자꾸 바라보네."
"...존댓말 한다며."
"아, 깜박했네요. 멋있나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얼굴에 기분이 이상해져 괜스레 팝콘만 내밀었다.
"팝콘이나 드세요. 이상한 짓 하려 하지 말고."
내 말에 넙죽 팝콘 통을 받아들여 장난스레 팝콘을 먹는 모습을 보이기에 별 말없이 앞의 스크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만약, 김성현이 또 이상한 짓을 한다면 그 핑계로 영화관을 빠져나가 데이트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김성현은 내게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김성현이라면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왜인지 모르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영화가 끝나자 내가 먹은 음료 통까지 들어 쓰레기통에 넣은 뒤. 오늘 본 멜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말하는 김성현을 보며. 조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원래의 김성현이라면 지금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엉덩이를 만지거나 옆 가슴을 만져댔을 텐데. 정말로 영화가 재밌던 걸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감상평을 말하는 김성현의 모습에 바뀐 모습에 적응하기는커녕. 더 낯설게만 느껴졌다.
"저녁 먹으러 갈까요? 저번에 간 불백집은 어떤가요? 아니면 첫 데이트답게 파스타?"
"불백집가자."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은 미소만 짓는 김성현의 모습에 내색하지 않고 불백집으로 가기로 했다.
자리에 앉자. 몇 번 봤던 이모님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내 등짝을 때렸다.
"아이고! 저번에 온 놈은 비실대서 쓸모도 없어 보이던 만. 어디서 이런 남자를 집어 왔데~! 완전 잘 어울리네. 어때 오늘도 반반?"
무척이나 오지랖이 넓으신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이랑 이곳에 왔다면 분명 전 남자친구와 온 곳을 데이트코스로 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네. 반반으로 주세요."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 시선을 돌리자. 김성현은 웃음을 참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전 남자친구분이랑 왔던 곳인가 봐요."
장난기를 숨기지 못하고 웃어대는 김성현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너잖아."
"지금 제가 비실대서 쓸모도 없어 보이나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김성현의 몸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옷 위로도 알 수 있는 탄탄한 몸매. 운동을 오래 한 사람처럼 큰 팔근육.
"그래도 전의 네가 더 좋아."
이건 진심이었다. 이곳에서 같이 웃고 떠들던 김성현의 모습이 나한테는 가장 좋았으니까.
내 말에 한 방 먹은 듯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던 김성현은 무슨 생각인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린아."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김성현의 진지한 모습에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비실대고 쓸모없어 보이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준 건 너뿐이었어. 그래서 변한 나도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 진심이 듬뿍 묻어나는 말에 나는 민망한 기분이 들어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에 대충 밥을 먹고 우리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주문한 음료를 받아온 김성현이 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든 컵을 건네주었다.
"고마워."
"뭘."
음료를 마시며 입을 다물고 있자. 김성현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지 입을 열었다.
"오늘 데이트는 어땠어? 나는 우리 처음 데이트하던 거 생각나더라."
"나도 옛날 생각났어."
"여기도 우리 왔던 카페잖아. 그때…."
기억을 떠올리던 김성현이 갑자기 말을 흐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의아해 주변을 둘러보자. 이 카페에서 뭘 했는지가 떠올랐다.
"내 가슴 빨던 곳이네."
무심코 뱉은 말에 김성현은 당황해하며 머리를 긁어댔다.
설마, 전처럼 다시 내 가슴을 빨려고 이 카페에 오자고 한 걸까?
또다시 김성현에게 경계심이 들었다.
방심하지 말자.
상대는 김성현이니까….
***
"...뭐지."
조금은 허탈한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침대에 누워 방 천장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기분을 해석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왜 안 만져?"
내가 아는 김성현이라면 이럴 수가 없다. 강제로라도 가슴 한 번, 엉덩이 한 번 더 만지려고 노력하던 게 김성현인데.
각성한 김성현은 성욕이 없는 사람처럼. 억지로 스킨쉽을 하지 않고. 여자친구를 배려하고 아껴주는 멋있는 남자친구의 표본이 되었다.
바뀐 김성현에게 적응하려 데이트까지 했는데. 데이트가 끝나니까 오히려 더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버리다니.
혹시 멀티방에 가서 야한 것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래도 괜찮은 속옷으로 준비까지 했는데.
진짜 카페에서 2시간 동안 어떤 스킨쉽도 없이 떠들기만 했다.
심지어 내일은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자는 건전한 약속까지.
김성현과 야한 것을 하는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행동하면 같은 얼굴이었어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은데….
이제 백진희를 온전히 믿을 수도 없으니 상담할 사람도 없다.
혹시, 내 경계심을 없애고 있는 거 아닐까? 안심하고 있는 나를 1회차의 백진희처럼 배신하고 덮치려고….
김성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하며 한참을 침대 위를 뒹굴었다.
***
"에엥? 키스도 안 했다고?"
아레아는 데이트가 끝나고 돌아온 주인의 말에 많이 당황스러웠다.
매일 같이 여주인 처녀에 대해 떠들어대며. 여주인 유두에 피어싱하자고 설득하면 받아줄 것 같냐는 개소리만 하던 주인이 맞나 싶었다.
당연히 오늘 데이트한다기에 또 섹스하는 줄 알았더니. 키스도 안 했다는 게…. 혹시 싸운 걸까?
"둘이 싸웠어?"
"응? 아니, 좋은 분위기였는데?"
미소 짓는 주인의 모습에 아레아는 묘한 불쾌함이 들었다.
"그럼 여주인이 키스를 거부했어?"
"아니? 그냥 데이트했다니까?"
"그니까! 데이트인데 왜 키스를 안 했는데?"
아레아의 말에 김성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냥. 아직 아린이는 나를 어색해하는데. 키스하는 건 좀 그렇잖아. 아린이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테니까."
`언제부터 그리 아껴줬는데?`
당장에 몇 일전만 해도 데이트 때 왼쪽 엉덩이 2번 더 만졌다고 밸런스 타령하던 주인이. 이제 와서 여주인 입장을 따진다?
눈앞의 주인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뭐?"
"혹시 주인 변화하면서 고추 떨어지거나 그런 건 아니"
곧장 날아오는 베개에 아레아는 황급히 몸을 굴려 피했다.
"정상이야. 어딜 고자를 만들려고."
"아니, 그러면 왜 안 하는 건데! 다시 밤에 가서 여주인 발정 나게 해줘?"
아레아의 말에 김성현은 정색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앞으로 그런 거 절대 하지 마."
"...왜?"
"아린이를 사랑하니까. 그때는 내가 철없이 행동한 거지. 이제는 나쁜 행동인거 아니까…."
김성현의 말에 아레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몸이 변화하면서 뇌도 변했나 보다.
그래서 성욕이 사라진 거야…!
주인이 정신적인 고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아레아가 눈물을 흘리자.
김성현은 당황해하며 아레아를 달래줬다.
그런 김성현을 보며 아레아는 반드시 주인의 성욕을 되찾아 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매일 밤 유두 피어싱, 후장섹스, 수면제를 검색하던 순수했던 주인을 되찾겠어!`
촉감이 불알 같다며 건들지도 않던 주인이 자신을 걱정하며 스스럼없이 쓰다듬는 모습에
아레아의 오해는 더욱 깊어져 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