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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80화 (80/160)

〈 80화 〉 노력

* * *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며 숨을 내쉬자. 백진희는 내 상태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칠격이 무서워?"

"당연하지. 너도 직접 싸우는 걸 봤다면­"

"아린이가 위험해도?"

그 말에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지금의 내가 아린이를 지킬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린이를 위해서라면 내가 대신해서라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린이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

울다 지쳐 잠든 아린이의 모습을 보며 다짐했었다.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거라고.

소년을 어른으로 만들어준 여자를 위해.

하룻밤의 치기가 아닌 마음속 깊이 각인된 첫사랑이라는 감정이 만들어낸 다짐.

평생 서로를 사랑하기로 맹세한 걸 죽을 때까지 지킨다고 말했다.

단순히 상황을 넘어가기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 다짐하려고 일부러 아린이의 눈을 보며 그리 말했다.

누군가 첫사랑에 콩깍지가 씌어 물불 못 가리는 멍청한 놈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그 말이 맞다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인정할 것이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남의 시선이나 평가가 아닌, 아린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우선순위였으니까.

아린이와 함께라면 그곳이 지옥이라도 나는 그곳을 향해 스스럼없이 달려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가 닿았다.

"진짜 사랑하는구나."

그 목소리에 시선을 마주하자. 조금은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진희의 모습이 보였다. 윗입술을 혀로 핥으며 무언가 생각하는지 한참을 말이 없던 백진희는 피식­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린이는 차성의 유일한 후계자. 칠격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아린이를 이용해 차성을 협박하려 들 거야."

"아린이 옆에서 도와줄 수 있어?"

백진희는 능력이 있다. 무력적인 능력은 나보다 아래지만 상황을 풀어나가는 데는 종종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기한신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기한신을 이기는 방법을 내게 제시해주기도 했고.

아린이와 가까워지는 것도 백진희의 도움을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특히, 이 비밀의 방을 자신 것처럼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백진희의 숨겨진 비밀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척이나 그러고 싶지만, 안돼. 알아봐야 할게 있어. 차성이 정말로 마인에 대해 숨기고 있는 게 있다면은 미리 알아놔야 칠격의 공격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

백진희의 말에 나는 망설임이 들었다. 자기 친구가 혼혈 마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린이가 말하지 않은걸. 백진희에게 얘기해도 되는 건가 고민이 들었지만. 이대로 아린이가 위험한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진희는 종종 이상하게 반응할 때도 있지만. 항상 아린이를 안아주고 배려해주며 엄마처럼 감싸줬기에 아린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믿을 만 하다는 어느 정도의 신뢰가 쌓여있었기에.

나는 백진희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너에게 말할 게 있어 백진희."

"나한테?"

신기하다는 듯 눈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잘 안 맞는 사촌 누나를 보는듯한 기분이라 조금 껄끄러웠다.

"나도 오늘 아침에 안 건데...아린이 사실 혼혈 마인이야."

"혼혈 마인이라고…? 그걸 어떻게 안거야? 아린이가 너에게 말한 거야?"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백진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키스를 하니까 기적이 일어나더라. 그래서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내 말에 생각에 잠긴 듯.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려 톡­톡­하며 손가락을 두드리던 백진희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이 되네. 왜 그리 차성에서 마인에 관한 연구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서는 내버려 두는 건지. 아린이를 지키려고 했던 거구나."

"그래. 아마도 아린이의 아버지는 아린이가 마인인걸 알고 있을 거야."

"그래도, 놀랍네 아린이가 마인이라는 게."

정말 놀란 듯 조금 입을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너도 놀라긴 하구나."

"뭐?"

"아니, 평소에는 항상 웃기만 하거나 무표정으로 있으니까."

내 말에 길게 입꼬리를 늘리며 백진희가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기에 백진희의 큰 가슴이 시선을 끌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나한테 관심이 많았나 보네?"

묘한 색기가 담겨 있는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린이랑 제일 친하니까 보인 거지."

"흐응, 그래?"

의심하는듯한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백진희를 노려봤다.

"난 아린이를 사랑해. 너한텐 이성적인 관심은 없어."

한때는 백진희의 비현실적인 외모와 몸매에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린이와 사랑을 확인한 뒤부터 백진희를 바라볼 때는 그저, 동성을 보는듯한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3P각 날카롭게 섰다! 라며 즐거워 했을 텐데.

왜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무척이나 죄책감이 드는 일이라. 그런 망상을 하는 것에 흥미가 떨어졌다.

"칠격은 무척이나 강한 집단이야. 한 명 한 명. S급과 비견될 무력을 가진 괴물들이 모인 집단. 너 혼자 힘으로는 아린이를 지킬 수 없어."

"아린이를 설득해서 차성의 도움을 받아 칠격을 공격하는 건?"

내 의견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백진희는 고개를 저었다.

"안 좋아. 오히려 차성쪽에서 자신의 비밀을 알아낸 우리를 먼저 처리하려들 수도 있어. 아니면, 아린이만 다른 곳으로 보내 우리와 접촉을 못 하게 막을 수도 있고. 차성의 안 좋은 소문 너도 들어봤지?"

백진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3위 기업 차성.

돈을 복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휴대폰, 가전기기, 마석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

특히 사내 복지가 매우 뛰어나고 사원 대부분이 애사심으로 뭉쳐있는 특이한 기업이라는 평이 있다.

하지만 악평이 없는 것도 아니다.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 그 피해를 본 사람이 적지 않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은 사람을 죽이는 일도 할지 모른다는 악명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아린이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아니, 아직은 이른 것 같아. 사실 너 만나기 전에 아린이를 만났거든."

백진희의 말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린이가 무슨 말 했어? 내 얘기는 안 했어?"

"했어. 자고 일어나니 너무 바뀌어서 다른 사람 같지만. 적응하도록 노력할 거라고."

백진희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불안감이 조금은 해소되었다.

솔직히 자신의 여자친구가 자살하려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불안에 떨 것이다.

백진희의 말대로라면 아린이가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마음속에 박힌 가시 하나가 빠져나간 후련함을 느꼈다.

"지금 너에게 적응하기도 힘든데 마인이라는 것과 칠격이 노린다는 것을 말하면 아린이가 얼마나 힘들어하겠어."

진심으로 아린이를 걱정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무언가 기분이 좋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아린이를 걱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질투보다는 안심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 거네."

칠격은 아린이를 노리고. 아린이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바뀐 내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며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고….

좋은 방법이 없을까. 무심코 백진희를 바라보니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원하는 말을 해주었다.

"방법이 있어."

"방금 너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 알아?"

"알아, 절실하게 바라보더라."

조금 얼굴에 티가 난 걸까. 이마를 긁자 백진희는 웃으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아린이한테 네가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인정받아."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아린이의 안전이 더 걱정인데…."

"들어봐. 아린이가 너를 신뢰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다면. 너는 아린이를 설득해서 차성의 도움을 받아야 해."

백진희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차성의 도움을 받으라니. 아까 했던 말을 기억 못 하는 걸까?

"멍청아. 차성의 도움을 직접 받는 게 아니라. 아린이를 통해서 차성의 도움을 받는 게 중요해.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거라고."

"...어째서?"

내 물음에 `이런 것도 모르는 바보구나`라는 글이 써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백진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성의 도움을 직접 받으면 분명히 우리를 감시하고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내려할꺼야. 하지만, 아린이를 통해 도움을 받는다면? 후계자가 남자친구에게 푹 빠졌구나. 남자친구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가 보다. 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꼭 아린이를 통해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어."

"어떤 도움인데?"

내 물음에 백진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가디언즈. 입단 시험."

백진희의 말을 들은 나는 누군가 머리를 강하게 내리쳐 멍청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디언즈? 내가 아는 그 가디언즈를 말하는 걸까?

"그래, 바보야. 가디언즈. 세계를 지키는 S급들의 모임."

나도 잘 알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인기 많은 영웅들. 내가 재밌게 하던 [거지 영웅 키우기]의 엔딩중 하나가. 가디언즈에 들어가는 거니까.

재앙급이라 불리는 S급의 마인, 마족에 대응하여 기적, 신의 전사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는 S급의 `초월자`들을 한곳에 모은 곳이.

바로 가디언즈.

그런 가디언즈에 입단 시험을 받게 해달라고 설득하라고? 미친 건가?

"너…. 내가 D급 인 건 알고 있지?"

"응, 알아. 그래도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조금 겁 없는 신뢰에 당황스러웠다. 백진희가 이 정도로 나를 신뢰할 정도로 큰일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부모님보다 더 내 능력을 믿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참 이상했다.

"뭐, 그 정도로 내가 믿음직해 보였나?"

"아니, 그건 아니지."

정색하며 곧장 대답하는 백진희를 빤히 바라보자.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노력 안 하면은 사랑하는 아린이가 위험해질 거니까. 나는 그것 때문에 네가 포기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거든."

백진희의 말에 뒷머리를 긁었다. 아린이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바뀐 네 모습만 보면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메긴기요르드의 효과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야. 메긴기요르드는 무조건으로 2배의 힘을 얻게 해주는 조건이니까. 네 힘이 강해질수록 메긴기요르드의 효과는 더욱 커질 거야."

백진희의 말에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뀌기 전에는 팔굽혀펴기 10번에 다음날 팔에 알이 배길 정도로 힘들었는데.

지금은 50번을 해도 끄떡없을 정도로 조각 같은 근육을 가진 몸은 장식이 아니었다.

아린이를 위해서라면 피나는 노력을 해서 빠르게 B급이라도 올라가야 한다.

메긴기요르드의 효과를 받으면 최소 A급의 위력을 낼 수 있을 테니.

노력하고 싶다.

변하고 싶다.

아린이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걱정거리가 아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

아린이는 우는 것보다 웃는 게 더욱더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웠으니까.

더 이상 그 예쁜 흑요석 같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그 길이 수라의 길이라 할지라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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