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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79화 (79/160)

〈 79화 〉 선별

* * *

"김성현도 각성했으니, 이제 아린이도 변할 때가 된 것 같네."

생각에 빠져있다 들려오는 백진희의 말에 경계심이 들었다.

"무슨 뜻이야?"

"이제 회귀한다는 선택지가 사라졌으니까. 열심히 살아야지 아린아."

백진희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힘들면 돌아가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왔던 것이 이제와 후회스러웠다.

빙의 전 기억이 없다는 이유를 변명삼아.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여태까지 훈련을 빼 왔으니까.

자위하거나 빈둥빈둥 보내던 시간 동안. 잃어버린 전투 능력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입학식 첫날과 지금의 나는 전투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전혀 성장하지 못했으니까.

회귀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변명으로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다.

본래 신아린이 갖고 있던 능력을 다시 찾아야 했다.

노력하지 않았던 나에 대해 한숨이 흘러나왔다. 똑같이 나태하게 행동하면서 김성현에게는 한심하단듯 훈계하던 일이 떠올라. 이제야 내 행동에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네 말이 맞아. 안일하게 살았어."

"맞아. 포기하면 그냥 끝나는 거야. 마지막까지 노력하면 바꿀 수 있어."

내 대답에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백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백진희의 손에 들린 것은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가 아닌 영또플의 일러스트로.

심장 모양으로 만들어진 보라색 항아리. 리치 `레이나`의 생명력이 담긴 그릇.

라이프 포스 베슬.

조민성이 요정왕의 팔찌를 건넸을 때 거래 식으로 라이프 포스 베슬에 대한 정보를 넘겼는데. 백진희가 조민성보다 한발 빨랐나 보다.

"선물이야. 아린아."

받아달라는 듯 수줍게 베슬을 내미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진희는 진심으로 나를 자신이 정의한 친구로서 대하고 있다.

처음 트페레밧으로 본 첫 회차의 백진희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진정으로 김성현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김성현이 배신한 것이 큰 상처가 된 걸까. 아니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스스로 죽이면서 회귀를 하느라. 인간성을 잃어버린 걸까.

눈앞의 백진희가 두려우면서도 조금의 동정심이 들었다.

같은 빙의자인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려는 건.

일종의 대리만족이 아닐까.

베슬을 내밀고 있는 백진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백진희. 아니, 진희야."

"응. 아린아. 궁금한 거 있어?"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이 기쁜지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나는 이 모든 상황을 계획한 백진희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내 머리가 빠르게 회전해 가장 이상적인 질문을 [이해]했다.

"너는 지금 행복해?"

"...뭐?"

가면에 금이 가듯. 예쁜 미소를 짓던 백진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으며 서늘한 백안이 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행복해?"

입술을 찢을 듯 세게 깨물며 백진희는 내밀고 있던 베슬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화가 난 듯. 콧김을 크게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당장에 백진희가 돌변해 내 목을 꺾어 죽인다 해도. 더는 백진희가 파놓은 함정에 끌려가고 싶지는 않다.

방식이 잘못되었지만. 백진희가 정말로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한편으로는 백진희라면 나를 때릴지언정 목숨은 붙여놓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인간성이 닳아 없어진 백진희를 다시 원래의 백진희로 되돌릴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에 나는 입을 열었다.

"내 행복을 원한다며."

"...맞아."

"내가 행복하면 너도 행복할 수 있어?"

내 물음에 백진희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한참을 바닥을 내려다보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언젠가는 행복하게 될 거야."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백진희의 모습에 나는 손을 뻗어 백진희의 손을 잡았다.

"친구라는 이유 말고,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는 이유가 있는 거지?"

내 질문에 백진희는 미소를 지으며 잡은 손을 빼내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거야. 우린 친구니까."

환한 웃음과 함께 그렇게 대답하는 백진희를 바라보다 입을 열려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친구. 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목소리로 나오지 못했으니까.

***

아레아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주인이 여주인과 섹스 여행을 떠나버려. 휴대폰도 할 수 없어서 혼자 심심하게 침대에 누워 흐느적대고 있는데.

인큐버스 킹 싸대기 여러 번 때릴 정도의 미모를 가진 멋진 남자가 갑자기 주인의 침대로 다가와 자신을 밀쳤으니까.

"뭐, 뭐얏!"

마령화를 하고 있기에 허락되지 않은 인간은 자신을 만지거나 볼 수 없을 텐데.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경계하며 몸을 출렁거리자.

미남은 미간을 좁히며 아레아를 내려다봤다.

"나야. 비골."

"엉?"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니 조금 신기했다. 도대체 정체가 뭔가 싶어. 몸을 출렁거리며 올려다보자. 미남은 귀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고."

"나가 누군데?"

아레아가 가자미눈을 하며 바라보자 미남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김성현이라고."

"풉. 웃기시네."

그 잘생긴 얼굴 어디에도 주인의 못생김이 안 보이는데. 사기를 치려면 조금 더 얼굴을 박살을 내고 와야 했다.

"왜 못 믿어?"

"그야, 당신은 무척이나 잘생기고 멋이라는 아우라가 풍기는데~ 우리 주인은 당신 얼굴이 아스팔트에 갈려도 외모에서 딸­"

날아오는 베개의 감촉에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김성현인가 싶어 마력을 흘려보내자. 자신과 연결된 계약의 존재가 느껴졌다.

"말,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야!! 어떻게 그 못생긴, 아니. 그 뭐라 해야 해. 조금 자기주장 심한 얼굴이 이렇게 잘­"

벽에 집어던지려 하기에 황급히 마령화를 풀어. 트윈테일 교복 소녀로 변하자. 역겹다는 표정으로 손을 떼는 미남의 반응을 보고 아레아는 확실할 수 있었다.

이 잘생김으로도 가릴 수 없는 좆같음.

주인이 확실하다.

"아니, 도대체 무슨 엄청난 섹스를 했기에…."

"몰라."

침울해하며 침대에 걸터앉는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 저렇게 잘생기게 변했는데 왜 침울한 표정일까?

"그, 하긴 한 거지?"

확실히 전에 풀풀 풍기던 동정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이 변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기에 물어봤다.

"했어. 엄청 많이. 만족스럽게."

"섹스하다가 갑자기 변한 거야?"

"아니, 자고 일어나니 변했어. 이유는 나도 모르겠고."

침울해하며 이마를 부여잡는 주인의 옆모습에 아레아는 조금 설렘을 느꼈다.

역시 뭐든지 외모가 최고인 것 같다. 그 좆같은 성격을 가진 주인도 이리 멋있게 느껴지다니.

심지어 외모덕에 방정맞던 주인이 차분하고 진지하게 보이는 것이 조금 평소처럼 대하기 어렵게 느껴질 정도…!

"근데 왜 그리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내가 그리 잘생겨졌으면 매일 같이 실실 웃으면서 여자나 꼬시러 다녔을 텐데!"

"아린이가…. 나를 남처럼 대해."

김성현의 대답에 아레아는 그 옆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며 생각해봤다.

갑자기 못생긴 남자친구가 하루아침에 잘 생겨졌는데 좋아하지는 않고 남처럼 대한다?

"아! 주인이 개 빻아서 페티쉬로 좋아하던 건데. 잘생겨져서 흥미가 떨어­"

멱살을 붙잡고 평소보다 엄청 강한 힘으로 흔들어대는 통에 아레아가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지려 하자.

당황한 김성현이 본능적으로 침대 위로 끌어당기다. 힘을 조절을 못 해 서로의 이마에 박치기를 가해 아파할 때.

누군가 타이밍 안 좋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딸깍

"김성­"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 있는 아레아를 옆으로 밀치며 김성현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백진희는 싸늘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그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아린이를 두고 바람피우다니."

황급히 손을 흔들며 오해라고 말하려할때.

뒤에서 들려오는 아레아의 목소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응~주인 아프자나~그렇게 세게 하면 어떻게 해~"

뒤에서 백허그를 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는 아레아의 행동에 김성현의 얼굴이 혐오로 굳어가며 주먹을 쥘 때.

또다시 들려오는 찰칵­ 소리에 황급히 허리를 붙잡고 있는 아레아를 내던지고 백진희의 오해를 풀러 뛰쳐나갔다.

***

백진희의 뒤를 따라 비밀의 방으로까지 따라온 나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믿는데 아린이가 믿을지는 모르겠네~"

백진희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걸려도 하필이면 백진희에게 걸리다니.

비골과 여행 가기 전에 예행연습을 하던 것도 하필이면 이상한 자세에서 아린이가 목격해 오해를 푸느라 진땀을 뺐는데.

백진희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바뀐 내 얼굴에 아린이가 적응하기 전에 헤어지자고 통보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오해 사기 좋은 사진이었다.

"제발. 아린이에게는 비밀로 해줘."

"응. 그러지 뭐."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안도감이 들 때쯤. 백진희가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럼 사진은 지워주는 거지?"

"아. 그건 싫은데."

정색하며 대답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입술이 말라갔다. 역시 뒤통수 칠 준비를 하고 있던걸까.

"네가 아린이에게 남자친구로 제대로 인정받으면 그때는 지워줄게."

"당연하지. 그 조건 받아들일게."

무슨 협박을 당할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백진희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착한 것 같다.

"아, 그보다 할 말이 있어서 너한테 찾아간 거 였어."

"뭐, 할 말 있어?"

아린이와 관련된 이야기인가 싶어 상체를 내밀자. 백진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기한신에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 따로 조사 좀 해봤거든."

"...기한신?"

갑자기 기한신의 이름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잊고 있었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아린이를 폭행해 피투성이로 만든 뒤, 목을 조르던 기한신의 모습.

이미 머리를 터트려 죽인 놈이지만.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한신이 아린이를 죽이려 한 이유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어. 자신의 아버지 연구를 차성이 뺏어갔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백진희의 말에 묘한 불안함이 들었다. 차성과 기한신. 그 악연이 아린이와 깊게 연관돼있는 걸까.

"기한신이 아버지가 연구하던 자료. 정보 길드에 의뢰해 찾아봤거든."

백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에서 조금 오래된 종이봉투를 꺼내와 내게 넘겨주었다.

"이게 그 연구자료야."

종이 봉투 위. 낡은 종이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인 선별검사­

마인이라는 단어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백진희는 내용을 확인해보라며 재촉했다.

­현재는 마인과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시체를 해부하는 일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한 반­마나 물질을 체내에 주입해. 마인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었다….

일기처럼 쓰인 글. 한참을 읽어내리자. 백진희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차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인을 색출하는 것에 관한 것들은 모조리 비싼 값에 인수하고 있어. 그래놓고 따로 연구를 진행하거나 그러지도 않고. 마치 마인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돈을 쏟아붓고 있어."

백진희의 말에 나는 차성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차성의 후계자이자. 혼혈 마인인 아린이 때문이겠지.

아린이는 정말 마인이 맞는 걸까. 머리가 아파져 왔다.

마인이라면 대부분 스스로 마족과 영혼의 계약을 한 괴물들을 뜻하는 단어다.

하지만, 혼혈 마인이라는 난생처음 듣는 이름을 가진 아린이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직접 아린이에게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소니아를 죽인 칠격. 기억하고 있지?"

"기억 못할 리가 없지."

대지를 부수고 공간을 찢어내며 수 없이 몸을 재생하던 가면을 쓴 남자. 마지막에서는 소니아의 얼굴을 뜯어 먹어 자기 얼굴로 만드는 기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줬는데. 쉽게 잊을 수 있는 기억의 종류가 아니었다.

"칠격은 마인을 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야. 차성이 마인에 대한 연구를 의도적으로 막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지금. 가장 위험한 건 아린이야."

"뭐…?"

백진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아린이의 얼굴을 뜯어먹는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구역질이 올라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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