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심연
* * *
과호흡이라도 온 것처럼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백진희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어디까지가…. 네 계획인 거야."
백진희는 상자 안에 들어있던 진실의 끈을 꺼내 들어 살랑살랑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알고 싶어?"
진실의 끈을 내미는 그 손을 한참을 바라보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려 하자 백진희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뒤로 뺐다.
"왜 그래 아린아~ 우린 친구잖아. 평소처럼 묶어줄게."
"웃기지 마!!!"
쾅!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테이블을 내리쳤다. 또 내게 세뇌를 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계획한 일일까.
백진희는 언제부터 내 행동을 조종하고 있던 건지 그 시작조차 모르겠다.
회귀 자체가 거짓이라는 걸까? 하지만 트페레밧의 봉으로 보여준 그 장면은 정말 진실이었을 텐데.
서늘한 백안을 바라보며 나는 진실을 물었다.
"내 행복을 원한다고 했잖아."
"응. 정말이야."
당연하다는 듯이 즉답을 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올라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으며 물었다.
"내가 김성현에게 공략당하게 만드는 게…. 네가 말한 행복이라는 거야…?"
"맞아. 사랑하는 성현이에게 공략까지 당하면. 얼마나 더 행복하겠어? 매일같이 성현이만 생각할 텐데."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나는 멍청하게도 백진희라면 이 상황을 타파할 조언을 해줄 것이라 생각해서.
1주일이라는 시간을 번 것인데. 이게 뭐지…. 왜…. 어디서부터….
"끈 묶어줄 게 아린아. 궁금한 게 많잖아?"
내 오른손을 잡아끄는 손길에 뿌리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백진희의 말대로 나는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이 거대한 계획이 가져올 엔딩은 정말 헤피엔딩인걸까.
내 손목에 진실의 끈을 묶은 다음. 자기 손목에 끈을 묶은 백진희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행복하길 원해."
백진희의 말에 나는 그 뜻을 [이해]했다. 어떠한 방식이든. 어떠한 과정을 거치든.
그 결과가 내 행복과 직결된다면 백진희에게는 그 과정이 수라(??)의 길일지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결말을 위한 광기(??).
그것만이 백진희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
나는 백진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백진희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으니까. 지나왔던 돌다리조차 뒤돌아봐 함정인지 확인해야 한다.
입에서 목소리가 사라졌다.
`나는 사실 펭귄이야`라는 거짓말로. 진실의 끈의 효과를 확인했으니까.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나를 보며 백진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관찰했다.
"회귀 할 거라고 생각하냐는 말. 그 뜻이 뭐야?"
"말 그대로인데?"
"나 회귀할 수 없는 거야?"
입학식으로 회귀는 나의 보험이었다. 큰 잘못을 저질러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일종의 정신적인 보호장치였고. 나쁜 선택을 해도 다음에는 그 선택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갖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무기였다.
김성현에게 공략을 당하면 회귀를 못 하는 걸까? 그 추측은 곧 부정되었다.
백진희는 분명 첫 회차에. 김성현에게 공략당한 뒤 배신당해 백치가 된 상태에서 회귀한 전력이 있다.
그럼 이유가 도대체 뭘까.
고민하는 내 귓가로 백진희의 서늘한 목소리가 닿았다.
"네 회귀 자체가 거짓인걸?"
"뭐…?"
백진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회귀했던 기억이 거짓이라고? 왼손에 낀 요정왕의 팔찌를 바라봤다. 이 팔찌를 이용해 나는 백진희에게 세뇌당했던 기억과 본래의 기억 두 가지를 구분해놨다. 자퇴하거나 김성현을 죽여서 돌아간 기억이 내게는 분명히 있다.
"못 믿나 보네?"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백진희는 트페레밧의 봉을 들고 와 내게 내밀었다.
"확인해 볼래?"
"뭘 보여주려는 건데."
"진실."
입꼬리를 길게 늘이는 백진희의 모습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트페레밧의 봉을 쥐었다.
***
입학식이 진행 중인 강당 안. 자리에 앉아 있는 백진희의 모습이 보인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묘한 표정을 짓던 백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얼굴이 빨개진 김성현이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다 백진희와 시선이 맞닿자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숙이고는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백진희는 도망치는 김성현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는 화장실 앞으로 걸어가 귀를 기울였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말싸움을 하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웃어? 이게 미쳤….""신아린. 차성의 후계자."
기억난다. 처음 소니아와 만났을 때 겪었던 일.
김성현의 동정을 취하려는 소니아를 막아 세우고 당장에라도 나를 죽이려는 소니아를 차성이라는 배경으로 막아 세운 날.
말싸움을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듣고 있는 백진희의 모습에. 나는 트페레밧의 봉을 쥐고 있는 백진희를 노려보았다.
"이 기억은 왜 보여주는 건데?"
"기다려봐."
성급한 나를 달래듯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모습이 이제는 두렵기만 했다.
"신아린, 오늘 일은 꼭 기억할게."
말싸움이 끝난 듯. 소니아의 말이 들리자 백진희는 조용히 자리에서 벗어나 모른 척 계단 앞에 섰다.
"내 이름은 소니아야. 너도 꼭 기억해."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진희는 묘한 표정으로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소니아를 바라봤다.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표현이라도 하려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소니아는 괜히 백진희에게 시비를 걸었다.
"뭐야 넌 또?""재밌네."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니아는 계단을 내려갔다.
"미친년들이 많네."
그리 말하며 소니아가 계단을 내려가자. 즐겁다는 미소를 짓던 백진희는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계단을 황급히 내려갔다.
그 뒤, 입학식에 참여하기 위해 강당으로 돌아가는 내 모습을 숨어서 한참을 바라보던 백진희의 모습이 보이고, 마치 시간의 배속을 늘린 것처럼 엄청 빠른 속도로 눈앞의 장면들이 흘러가더니.
차기사님의 차를 타는 내 뒷모습을 지켜보는 백진희가 보였다.
새로운 것을 발견한 호기심 어린 아이의 표정.
삶이 무료한 사람에게 재밌는 놀이를 가르친 것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표정에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흐응, 여태까지랑 다르네. 이게 변수인가…?"
즐겁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백진희는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돌연, 양팔을 들어 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기 턱과 머리를 감싸 쥔 모습에 기괴함을 느낄 때.
우드드득
기억 속의 백진희는 자신의 머리를 뒤틀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자기 목뼈를 부러트렸다.
"무, 무슨…."
내 경악 섞인 물음에도 백진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주변의 색이 흑백으로 물들어가더니. 입학식 때로 돌아왔다.
마치 아까의 기억을 다시 불러온 듯. 똑같은 기억을 보여주기에 의아해할 찰나. 차를 타는 내 뒷모습을 보는 백진희의 표정에서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귀하면 기억을 못하나 봐."
아쉽다는 듯 발끝을 땅으로 툭툭 치는 백진희의 모습에 나는 이것이 백진희가 신아린을 감시한 2회차라는 것을 깨달았다.
허공에서 얼음이 솟아나더니 날카로운 얼음 검이 만들어져 백진희의 손에 쥐어졌다.
"흐응, 다시."
미소를 지으며 얼음 검으로 자기 목을 잘라버리는 백진희의 모습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주변의 색이 흑백으로 물들어가더니. 또다시 입학식 때로 돌아왔다.
긴 줄의 앞. 무언가를 작성하기 위해 길게 이어진 줄 앞에. 내가 있었다.
감정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무표정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는 내 뒤로.
백진희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내 뒷모습을 관찰했다.
무언가를 적고 있는 내 뒤에서 백진희는 무언가를 했다.
나와 백진희의 외모에 몰래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백진희의 손이 내 뒷목에 닿았다.
뒷목에 닿은 손길에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나는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백진희는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비켰고. 나와 백진희를 바라보던 시선도 다시 돌아왔다.
그 뒤, 한참을 눈을 감고 있는 내 뒤로. 누군가가 소리쳤다.
"...야!"
그 낯선 외침에 신아린은 눈을 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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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트레페밧의 봉에서 손을 떼었다. 눈앞에 있던 기억들이 사라지고 원래 있던 공간으로 돌아온 나는 격한 숨을 내쉬며 백진희를 바라봤다.
"더 보여줄 게 있는데."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백진희는 광기의 책사.
처음 날 본 순간부터 날 향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너…. 처음부터 나를 세뇌한 거구나."
"세뇌보다는 기억을 집어넣었다는 게 맞지. 아린이는 내가 회귀하면 기억을 잊으니까."
"그럼 내가 김성현을 죽인 건…."
그것도 거짓일까? 사실은 내가 죽인 게 아니라 백진희가 내게 넣어놓은 기억일 수도 있다. 내 죄책감을 이용해 김성현에게 공략당하게 하려고.
"묻지 말고 확인해봐. 그게 더 설득력 있잖아?"
내게 봉을 내미는 백진희의 모습에서.
나는 순백의 광기를 느꼈다.
***
쿵! 철벅철벅 쿵!
화장실 앞.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물이 튀는 소리. 짐승이 울부짖는듯한 소리가 화장실 안을 울려, 불투명한 화장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마치 클래식이라도 듣는 것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겁다는 듯이 감상하던 백진희는.
오열하는 소리에 화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피가 웅덩이처럼 고인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신아린.
부들부들 몸을 떨며 절대 눈을 뜨지 않으려는지. 힘을 주어 눈을 감고 있는 모습에 백진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를 밟으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김성현에게 다가갔다.
"죽었나?"
백진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성현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턱이 날아가 하관과 이마가 크게 함몰된 흉측한 모습의 김성현의 얼굴에 살덩어리들이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태를 벗어나려는 듯. 빠져나간 왼쪽 눈의 구멍에서 기다란 손가락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몸은 터질 것처럼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엑크에에르겍""각성하기 위해 억지로 변이하는구나. 변수라도 큰 흐름을 거스르진 못하나 보네."
신기하다는 듯 변화하는 김성현을 바라보며 백진희는 묘한 미소를 짓더니 왼쪽 눈에서 튀어나온 손가락에 손을 가져다 댔다.
먹이를 낚아채듯 곧장 백진희의 하얀 팔을 붙잡은 손가락은 비어있는 눈구멍으로 팔을 끌어당겼다.
우드득끄그적끄드득
짐승이 물어뜯은 듯. 찢겨나간 왼팔을 바라보던 백진희는 미간을 좁혔다.
"징그러워."
뜯겨나간 왼팔을 얘기하는 건지, 눈 앞에서 수백 개의 눈알을 흘러내리며 침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를 흘려대는 김성현의 모습을 말하는건지 모를. 평온한 목소리였다.
"크에에엑!"
인육의 맛을 본 김성현이었던 괴물이 달려들기 직전.
백진희는 남아 있는 오른손을 자기 머리에 갖다 댔다.
수십 수백 개의 눈알과 손가락이 백진희의 몸에 닿는 순간.
백진희는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 머리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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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변하고 입학식으로 돌아왔다.
백진희는 또다시 내게 기억을 주입했고. 김성현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울고 있는 나를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걱정하는 얼굴로 내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울먹거리며 자책에 휩싸여 있는 신아린에게 다가간 백진희는 걱정하는 연기를 하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백진희?""절 아세요?"
그 말에 당황한 신아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제 이름을 알기에 혹시, 아는 사람인데 제가 기억 못 하는 건가 해서 물어봤어요.""아, 아니에요. 지나가다 봤는데 너무 예뻐서 기억에 남았어요.""칭찬 고마워요. 저보다 예쁜 분한테 칭찬받으니까 더 좋네요."
이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울고 있는 나를 걱정하며 배려하며 다가온 백진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좋은 첫인상을 가졌던 날.
"친하게 지내자! 아직 아카데미에 아는 사람이 없거든.""나야 좋지!"
친하게 지내자는 제안에 좋다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백진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생각을 읽은 듯. 백진희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저 때부터 너는 엄청 귀여웠어."
"뭐…?"
"전의 신아린은 인형이라 감정이 없었거든. 그래서 재미없었어."
즐겁다는 듯 말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이게 사실이라면.
백진희의 손짓 한 번에 내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까.
회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져온 두려움에 백진희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 화장실 먼저 가야겠어. 아까 보니까 화장실에 사람 많던데 위 층으로 가봐야 하나?""위 층! 지금 공사 중이래!""그래? 아쉽네. 그럼, 급하지 않으니 입학식 끝나고 가야겠다."
백진희가 트페레밧의 봉을 놓았다.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원래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이때 말이야. 네가 성현이를 잊은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한 거야. 눈치 빨랐다면 이상함을 느꼈을 텐데. 귀엽게도 아무것도 모르더라."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백진희의 모습에서 나는 한 없이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진실을 알았을때는 이미, 너무나도 깊은 심연이 나를 옥죄고 있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