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거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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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같이 밝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한참을 내려다보다 입을 막던 손을 조심스레 치워,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손을 가져다 대자.
내 손길이 두려운 듯 몸을 움츠리며 감은 눈을 떨고 있는 모습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조심스레 겁먹은 아기 고양이를 달래듯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자.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슬며시 눈을 뜬 아린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당장에라도 끌어안아 키스하고 싶었지만. 나를 타인으로 생각하는 아린이와 키스하는 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욕망 해소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으로 조금씩 경계를 풀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만족스럽게 지켜보기만 했다.
"아린아."
제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어찌 그리 놀라하는 걸까 생각하다. 양손을 억지로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레 손을 풀었다.
제압당했던 손이 풀리자 방어라도 하려는지 가슴 앞으로 양팔을 교차하는 행동을 무심코 지켜보고 있자.
내 눈치를 살피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다. 결국, 시선이 맞닿자 또다시 몸을 움츠리는 모습에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를 무서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으니까.
"신아린."
"...응."
내 시선에 마지못해 입을 열어 답하는 아린이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내가 너를 강제로 탐할까 무서워?"
실수로 손이 바늘에 찔린 사람처럼 몸을 크게 움찔하며 시선을 내리깔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두려워하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짓이겨나간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동안 아린이의 사랑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집착하고 강요했던 일들.
배려하지 않고. 마음을 의심하며, 스스로 타협하여 합리화하던 행동들의 결과가 가져온 경계심이라는 결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듯한. 깊은 절망감이 짓이겨진 마음 한구석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약속할게. 앞으로 네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가 함부로 네게 행동하는 일 없을 거야."
내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지. 그저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모습에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게 시간을 줘. 네가 사랑하던 김성현이 나라는 걸. 증명할 시간."
그제야 흑요석 같은 아름다운 눈으로. 내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보던 아린이는 교차하던 양손을 풀고 슬며시 내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심장이 그 손길에 요란하게 반응한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과시라도 하려는 듯. 쿵쿵거리며 아린이의 손가락 끝에 깊은 진동을 울려댔다.
묘한 표정으로 손가락 끝으로 내 심장의 떨림을 느끼던 아린이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 미소는 지워지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또다시 타인을 바라보는 그것으로 변했기에. 나는 황급히 내 가슴에서 멀어져가는 손을 붙잡았다.
"미안해…."
그 작은 속삭임에 담긴 죄책감이라는 감정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빠져나가려는 손을 억지로 붙잡았다.
"정말 미안하면 도망치지 마."
또다시 시선을 내리깔려 하기에 나는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죄책감일까 두려움일까. 아린이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우는 것이 보기 싫었다. 사랑스러운 얼굴에 슬픔이라는 감점은 내 마음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으니까.
당장에라도 끌어안으며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그것마저 나를 타인으로 대하는 아린이에게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뺨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안타까우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떨리던 어깨도 멈추고 퉁퉁 부은 눈가와 조금 붉게 변한 분홍색 입술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귀여운 아이 같다. 응석이라도 부린다면 마음껏 받아줄 텐데. 물기 있는 흑요석의 눈동자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조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던 아린이는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성현아."
내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는 아린이의 목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저 입에서 다음으로 나올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너는 멋있어졌어. 시골 똥강아지 같던 눈도 늑대처럼 변했고. 아이 같던 얼굴도 어른처럼 변했으니까. 목소리도 좋아졌고 몸매도 멋있어졌어. 그러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조금은 물기 있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아린이의 모습에 나는 가슴속 깊이 차오르는 분노를 절제하며. 그 말을 부정했다.
"네가 아니면 안 돼. 평생 서로를 사랑하기로 맹세한 거. 나는 죽을 때까지 지킬 거야."
내 말에 아린이는 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랑해 아린아. 외면은 변했어도 그 마음은 어제와 똑같아."
한참을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아린이는 속삭이듯 작게 입을 열었다.
"무거워."
"응?"
"너 무겁다고."
그 말에 내가 아린이의 몸 위에 올라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일으켜 옆으로 이동하자. 아린이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고민하는지 미간을 좁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미간을 눌러 펴자. 아린이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작게 말했다.
"1주일."
"응?"
"1주일 동안 서로 적응 기간을 갖자. 네 말대로 내가 바뀐 너에게 적응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린이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나쁜 제안이 아니었기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여행은 즐거웠어?"
홍차를 타고 있는 진희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것 때문에 보자고 한 거야."
무척이나 마음이 심란해서. 진희와 진솔한 대화가 하고 싶었다.
아직도 김성현을 떠올리면 바뀌기 전의 성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애원하는 듯 절실하게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김성현의 모습에 결국, 1주일이라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홍차와 먹을 것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와 조심스럽게 내 앞에 놔두는 진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현이 각성했어."
"응, 내가 고른 속옷이 괜찮았나 보네?"
진희의 말에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성현이에게 허니문 여행을 가자고 들었을 때도 헤어지고 곧장 진희에게 연락을 했다.
결국, 성현이의 마음을 받아주기로 했다는 내 말에 진희는 기뻐하며 도와주겠다고 했고.
진희는 성현이와 완벽한 첫날 밤을 보내게 해주겠다며. 그 음란한 속옷과 피임약까지 나에게 사주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기아스 말이야…. 이것 때문에 지금 문제가 생겼어."
"문제?"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진희의 모습에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각성 전의 성현이가 자꾸 떠올라. 지금의 김성현을 보면 남을 보는 느낌만 들고."
"흐응, 그거 신기하네. 아직 바뀐 성현이에게 적응하지 못해서 낯설게 느껴지는 거 아닐까?"
김성현과 같은 말을 하는 진희의 모습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말 그런 걸까.
하지만, 내 안에 있는 깊은 상실감도 사실이었기에 무어라 내 마음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냥, 혼란스러워…. 전의 성현이가 그립기만 해."
그런 내 말에 홍차를 마시던 진희는 묘한 미소와 함께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린아.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네 기억 속의 성현이는 무척이나 다를 거야."
"뭐?"
"너와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너는 그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잖아.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분명 느껴지는 괴리감에 고통스러운 건 너일 거야."
진희의 말이 옳았다. 입학식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 기억 속에 남은 김성현과 겉모습만 같은 사람이겠지.
차라리 나와 지냈던 기억을 가진 지금의 김성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난 지금의 성현이를 사랑하지 않아. 다시 입학식으로 돌아가고 싶어. 미안해 진희야…."
그 말에 진희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즐겁다는 듯 내 손등을 툭툭 손가락으로 쳤다.
"잊었어?"
"응?"
의아해하며 진희를 바라보자. 진희는 양손으로 턱을 받치며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약속했잖아. 성현이가 공략하는 여자는 반드시 네가 처음이 되게 해준다고."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방금…무슨 말을….
"기억 안 나? 네가 성현이에게 기아스를 걸고 난 다음 말이야."
진희의 말에 머릿속에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희가 내 귀에 입을 가까이했다."조급해하지 마. 기아스도 걸었으니. 성현이는 이제 네 거야.""으, 응. 그렇겠지…?"불안해하며 수긍하자. 내 불안함을 느꼈는지. 진희가 나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내가 약속할게. 성현이가 공략하는 여자는 반드시 네가 처음이 되게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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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호흡이 가빠지며 잊고 있던 두려움들이 다시 슬금슬금 마음속을 좀 먹기 시작했다.
백진희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름을 낮게 불렀다.
"아린아."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무척이나 무섭게 느껴졌다.
"정말 네가 회귀할 거라고 생각해?"
즐거움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모습에.
나는 백진희가 설계한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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