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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76화 (76/160)

〈 76화 〉 공략 플래그

* * *

울다 지쳐 쓰러진 아린이를 안아 들어 침대 위로 옮겼다.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자. 상처조차 남지 않은 깔끔한 손바닥이 보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잠들어 있는 아린이를 바라보며 내 몸의 변화는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에 잠겼다.

아린이의 왼손을 들어 가까이하자. 나와 같이 새끼손가락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붉은 실선이 보였다.

"하아."

아린이는 과거의 나를 잊지 못해 완전히 변해버린 나를 타인으로 생각하는 걸까.

아린이의 조금 부어오른 눈을 보니 마음이 아파져 왔다.

어찌할지 몰라 한참을 잠든 아린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손님이 찾아올 리는 없으니.

플라틴에서 소란을 눈치채고 직원이 온 걸까? 아린이가 잠든것을 다시 확인하고 문을 열자.

그곳에는 과일바구니를 들고 백진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안녕 성현아."

인사를 건네는 그 모습에 당황스러움에 한참을 문을 잡고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백진희…. 네가 왜 여길?"

내 물음에 백진희는 묘한 미소를 유지한 채 과일바구니를 내게 넘겼다.

"아린이랑 좋은 시간 보내는데 내가 방해한 거야? 걱정되어 와본 건데. 아린이는?"

"그, 아린이 말이야…."

최대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나는 자고 일어나니 내가 변했다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린이가 자살을 하려 한 걸 말렸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런데…. 너는 내가 김성현인 거 의심 안 하네?"

아린이는 완전히 변한 내 모습에 타인을 대하듯 했는데 백진희는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전과 같은 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느낌.

"아, 그냥 알겠더라. 너라는 거."

그 말을 하며 짓는 묘한 미소에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네가 이렇게 멋지게 변한 이유는 아린이와 첫날밤을 보내서인 걸까?"

고민하듯 과일바구니를 흔들며 나를 바라보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몰라.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 가족이나 친척 중에 이런 병을 앓고 있다는 사람은 들은 적이 없으니…. 정말로 아린이의 처녀가 변화의 이유였을까?

"뭐, 전보다 더 멋있게 변했으니. 축하해."

"그치만...아린이는 이런 내 모습 못 받아들이는데…."

내 말에 백진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뭐가 걱정이야? 그리 큰일도 아닌 것 같은데."

"큰일이 아니라니. 아린이는 내 모습에 충격받아서, 자살까지 하려 했다고…."

조금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커져 눈치를 보며 뒷말을 작게 속삭이자.

백진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백발의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린이가 자살하려는 이유가 과거의 너를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인 거잖아?"

"그런 것 같아…."

"그럼 그냥 과거의 너에게서 아린이를 빼앗으면 되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해법을 제시하는 백진희의 말에 나는 멍청하게 그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너보다. 지금의 네가 훨씬 더 나은데? 왜. 아린이를 다시 공략할 자신이 없어?"

긴장한 나를 풀어주려는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연시도 아니고 공략이 뭐냐. 사랑하는 거지."

"뭐, 어찌 됐든 간에. 과거의 너보다 지금의 너를 사랑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네가 노력하면 되겠네."

그런 걸까. 별문제 아니라는 듯 말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생각해보면 바뀌기 전의 모습도 내 모습이다. 아린이가 정말 과거의 나를 사랑했다면 바뀐 나도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바뀌기 전 모습을 그리워할지라도 그 위로 바뀐 나에 대한 사랑을 덧씌우면 된다.

"아린이랑 놀만 한 상황은 아니네. 과일은 여기 둘게."

"응…. 고맙다. 도움 되는 말 해줘서.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하네."

고마움을 표하자 백진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잠든 아린이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한 후 내게 작게 속삭였다.

"흐응, 아린이 이렇게 보니까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 같네. 깨어나려면 왕자님의 키스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에 나도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하. 멋대로 키스했다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어쩌려고."

"마음대로 해. 그냥 내 감이 그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멋대로 생각한 거니까. 참고로 난 되게 감 좋아. 불안해서 여기까지 온 거 보면 믿을 만 하지 않니?"

그렇게 말하며 백진희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인사도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잠들어 있는 아린이를 바라보며 백진희의 말을 생각하다. 얼굴을 가까이해 입술을 갖다 대자.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고 있자. 아린이의 숨결이 느껴져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그러자, 마법처럼 내 시야가 잠시 뿌옇게 변하더니.

아린이의 얼굴 위로 불투명한 창이 하나 떠올랐다.

흔히 게임에서나 보던 [상태창]과 비슷한 디자인으로 눈앞에 떠오른 불투명한 창에는 아린이의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 공략 대상 ­

[이름 : 신아린]

종족: 혼혈 마인

나이: 17

근력 5.2

지구력 4.1

순발력 5.0

체력 3.1

마력 1.7

타고난 능력

행운 3

매력 9.3

지능 7.3

◇­잠겨있음 / 공략도 90% 이상일시 열람 가능.

◇김성현과 기아스로 묶여 있음.

◆권능

◆­잠겨있음 / 공략도 98% 이상일시 열람 가능.

현재 공략도 17% / 공략도가 하락 중입니다.

현재 상태: 기절

심리 상태: 불안/우울/후회

섹스 경험: 1번.

음란도: 72%

­상세 기록

­상세 성감대

"뭐, 뭐야 이거."

눈앞에 뜬 상태창에 당황해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을 때. 아린이의 이름 밑. 종족이 적혀 있는 곳에 혼혈 마인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아린이가...마인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일까.

갑작스러운 신체의 변화와 아린이가 마인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져 왔다.

권능 마인화라는 능력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린이는 소니아와 같은 마인이 맞는것 같다.

아린이도 자신이 마인인것을 알고 있을까? 아니, 마인임을 확신할 수도 없다.

혼혈 마인. 혼혈이 가진 뜻을 풀어보면 부모님이나 그 위의 가족 중의 한 명이 마인일 수도 있으니까.

아린이는 자신이 마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섣불리 말했다가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혹시, 너무 힘든 나머지 환상이 보이는 건 아닐까. 눈앞에 뜬 상태창을 손으로 휘젓자 연기처럼 사라지기에. 황급히 다시 상태창을 외쳐봤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키스해야만 뜨는 건가 싶어. 아까처럼 다시 아린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자. 또다시 뜨는 상태창에 어떤 방식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흔히 야겜에서 자주 보던 상태창과 비슷했다. 공략도라는 것은 아마도 야겜에서처럼 히로인을 공략한 수치를 표현하는 것 같고.

공략도가 하락 중인 건 내가 변화해서일까?

하루 만에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갑자기 야겜에 빙의한 주인공이 돼버린 것 같아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상태창에 나와 있는 현재 공략도는 17%. 백진희의 말대로 아린이가 바뀐 나를 좋아하게 공략해 100% 채운다면….

아린이는 나만을 사랑하게 되는 거 아닐까? 다시 상태창을 살펴보다 기아스라는 단어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나와 기아스로 묶여 있다고? 잠시 생각해보니 기아스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린이와 내 새끼손가락에 남아있는 붉은 실선.

영원한 사랑의 맹세라는 말을 하던 아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기아스겠지.

해결해야 할게 산더미였기에. 양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린이가 깨어날 때까지 물어볼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무거운 눈꺼풀에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뇌는 조금씩 제 기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푹신함에 내가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 기억으로는…. 김성현의 품 안에 안겨 미친 듯이 울던 것.

한숨을 내쉬고 눈을 떠 상체를 일으키자. 내 발밑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김성현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일어났어?"

"...응."

얼마나 울었는지 갈라진 목소리에 갈증이나. 메마른 목구멍에 침을 삼키자. 내 앞으로 물이 담긴 잔이 나타났다.

"마셔."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받아들여 물을 마시자. 남아있던 잠기운도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빈 잔을 다시 받아든 김성현은 잔을 부엌에 갖다두고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내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아린아.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자살하려 했던 이유를 묻는 걸까. 어떻게 말해야 하나 생각할 때. 내게 들려온 말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거라 무척이나 당황했다.

"기아스라는거 알고 있어?"

"...응?"

"혹시, 이게 기아스야?"

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에 남은 붉은 실선을 보여주며 나를 바라보는 김성현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진실을 들어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갈색 눈동자를 한참을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김성현은 붙잡았던 손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기아스가 뭔지 나한테 설명해줄 수 있어?"

부탁하는 듯한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실이라는 이름의 기아스야. 기아스는 원래 구속이나 속박 같은 계약을 하는 유물인데. 이건…. 서로 인연을 만들어 준대."

"기아스를 나랑 한 이유는…?"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진희에게 세뇌당하고 있었기도 했고. 너를 내 말에 복종하는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했었다는 걸.

복잡한 눈으로 김성현을 바라보자.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진실을 온전히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래서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만 얘기하기로 했다.

"너와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서…."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눈동자를 위로 올리던 김성현은 시선을 내려 나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지금은...? 기아스로 연결돼있잖아. 날…. 사랑하지?"

마치 애원한 듯한 목소리로 내 애정을 확인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지금 너를 보면…. 내가 사랑하는 성현이가 도저히 안 떠올라. 그래서…. 그냥 남처럼 느껴져. 미안해…."

내 대답에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좁히며 이마를 만지던 김성현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변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할게. 다른 거 물어봐도 될까?"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김성현은 한참을 망설이다. 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머니에 대해 알고 있어?"

"...응?"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스러워 대답을 못 하자. 김성현은 내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알고 있어?"

"아니, 나 낳으시고 얼마 못 가서 돌아가셨다고 들어서…. 기억이 없어."

"그, 그렇구나."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기에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했다.

"우리 어머니는 왜 물어본 거야?"

"아, 아니. 갑자기 생각나서…. 미안해 뜬금없었지?"

말없이 고개를 젓자. 김성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김성현을 낯선 사람으로 인식해 경계하자. 김성현은 붉은 실선이 남아있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나는 맹세한 대로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그 모습에 큰 죄책감이 들었다. 어떠한 달콤한 말을 해도. 나는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듯한 죄책감밖에 들지 않았으니까.

"...미안. 정말로, 미안해."

나도 그렇다고 둘러대고 이 자리를 벗어나 입학식으로 회귀하는 방법도 있지만…. 눈앞의 김성현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로는 눈앞의 남자가 각성한 김성현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지만.

기아스때문인지. 내 마음속에 거대하게 남은 상실감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아린아."

"...응."

"나도 미안해."

또 잘못 없는 자책을 하려는 걸까. 전적으로 내 잘못인데….

그렇게 생각할 때 갑자기 김성현이 붙잡고 있던 손을 확 끌어당겨 나를 품 안으로 안아 들었다.

"뭐, 뭐하는 거야!"

화들짝 놀라 가슴을 밀치려 했지만. 저항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김성현은 나를 안은 채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과거의 내가 그리 좋아?"

"...응. 시골 똥강아지같이 멍청해 보이는 성현이가. 내가 사랑하던 성현이야."

내 대답에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내 몸을 두른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럼…. 뺏어줄게."

"뭐…?"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멍청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김성현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나를 침대 위로 쓰러트리고는 내 몸을 올라탔다.

"뭐, 뭐하­"

내 양손을 머리 위로 교차해 한 손으로 제압한 뒤. 다른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며 김성현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나를 더 사랑하게…. 철저하게 공략해줄게."

김성현의 눈에 깃든 감정을 읽은 나는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내가 없으면 살 이유가 없을정도로 사랑해줄게."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잊고 지내던 기억이 떠올랐다.

체벌이라는 변명으로 나를 때리고 치료하며 서서히 그 고통을 쾌락으로 바꾸는 나를.

즐겁다는 듯이 관찰하던 기한신의 눈에서 익숙할정도로 보았던.

정복감.

그 정복감이 짙게 깃든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영원히 내꺼야."

짐승이 위협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소유욕과 절제된 분노에.

지금.

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는 것을 [이해]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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