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각성과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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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함보다는 개운함에 눈이 번쩍 뜨였다. 상체를 일으켜 정신을 차리니. 옆에 잠들어 있는 아린이의 모습이 보였다.
몇 번을 했는지 셀 수 없을 만큼. 미친 듯이 섹스하던 어젯밤이 떠올라 조금 부끄러워졌다. 거의 마지막에는 이성을 잃고 기절한 아린이와 관계를 했으니까.
뜨거웠던 어젯밤의 감정을 떠올리니. 가슴 속 깊이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남아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깊게 잠들어 있는 아린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관찰하게 했다.
분홍빛이 도는 입술. 길게 뻗은 속눈썹. 대리석 같은 흰 피부.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무심코 부드럽게 입술을 맞대자.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반응이 워낙 귀여워.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스럽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존재.
지금이 느끼는 이 감정이 영원하길 염원했다.
한참을 잠들어 있는 아린이를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그 모습을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게 각인하고 있을 때.
몸을 꿈틀대던 아린이가 아주 느리게 감았던 눈을 떴다.
잠기운에 몽롱함이 가시지 않은 흑요석 같은 눈은 매혹적으로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아린이의 이마에 뽀뽀하자.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린아. 잘 잤어?"
나를 바라보는 눈에 담긴 당혹감과 경계심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왜 그래 아린아? 어디 아파?"
"김, 김성현?"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구는 모습에 걱정하며 물어보자 나를 의심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어보는 모습이 의아스러웠다.
"왜 어제가 너무 좋아서. 오늘은 더 멋있게 보여?"
"...너 거울 봤어?"
"응?"
의아해하는 나에게 아린이가 손으로 거울을 가리켜 고개를 돌려 거울을 확인하자.
그곳에는 내가 처음 보는 미남자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내 행동을 따라 하는 게 보였다.
"뭐, 뭐야."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니 거울 속의 미남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내가 변한 건가? 당황스러움에 아린이를 바라보자. 마치 타인을 대하듯 이불을 끌어모아 자기 몸을 가리는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왜 그래…. 나, 나야 성현이."
"아, 알고 있어…."
경계심 섞인 목소리에 아린이에게 다가가자. 두려운 듯 몸을 움츠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 오버하며 장난치듯 멋있는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나 잘생긴 사람으로 변했나 봐!"
그 말에도 조심스러운 얼굴로 꼭 끌어안은 이불을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고 있는 모습이 마음이 아파졌다.
당장에라도 일어난 아린이와 키스하며 서로가 느낀 사랑이란 감정을 공유할 줄 알았는데….
"나쁜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 상황에도 나를 배려해 걱정해 조심스레 건네는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나인 걸 모르지?
"내가 바뀐 게 이상해?"
"응? 아니, 아니야."
변명하듯 말하는 모습에 위가 쓰려왔다. 바뀐 내 모습은 원래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조각상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아린이는 왜 바뀐 내 모습을 좋아하지 않아 보이는 걸까.
슬쩍 입맞춤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아린이는 고개를 돌려 입맞춤을 피했다. 어제의 키스가 거짓이었다는 듯. 고개를 피하는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와 심장이 욱신거렸다.
"왜…. 남처럼 구는데?"
"네가 너무 바뀌어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그래. 너무 급작스러운 변화니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린이의 타인을 보는듯한 경계 어린 반응은 조금 마음이 아팠지만.
그 반응을 애써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대에서 벗어나 시원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주었다.
"고, 고마워."
눈치를 보며 물을 마시는 모습에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며 먼저 씻는다고 둘러대고 화장실 안으로 도망쳤다.
거울 속 바뀐 내 얼굴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진짜 나라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외모. 운동이라고는 하지도 않았던 내 몸에 선명하게 보이는 근육까지.
분명히 이 변화에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아린이의 반응에 속상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왜 바뀐 걸까. 아린이와 첫 경험을 해서인 걸까. 아린이의 처녀에 남자를 멋있게 만드는 능력이라도 있던 걸까?
병일 수도 있다. 3개월의 시한부 동안 잘생긴 얼굴로 살라는 신의 배려일 수도 있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변화보다 아린이의 반응이 내게는 더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찬물을 틀어 샤워하며 머리를 식혔다. 아린이에게 시간을 주는 게 맞다.
나도 변한 내가 어색할 텐데. 아린이는 더 혼란스럽겠지.
욱신거리는 가슴의 고통을 참으며. 아린이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
동정을 잃으면 김성현의 능력이 각성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었지만.
눈을 뜨자 보게 된 김성현의 모습에서.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뀐 김성현에게서 어젯밤 사랑을 속삭이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엔 다른 사람인지 의심할 정도로. 내가 알던 성현이의 모습이 그 얼굴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장난기가 뚝뚝 묻어나던 조금 하이톤이었던 목소리도 중저음의 동굴 같은 목소리로 변해버렸다.
나를 바라보며 순박한 눈웃음을 짓던 시골 똥강아지 같던 눈은 날카로운 늑대같이 매서운 눈으로 변했고.
장난을 칠 때마다 광대가 씰룩거리던 웃긴 표정은 진중한 표정으로 변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입맞춤을 하려는 김성현을 피해버렸다.
남인 것 같아서. 이러면 안 되는 것 같아서.
적응이 되지 않았다는 말로 변명했지만. 내 마음속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같은 김성현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바람이라도 피는 것처럼 그 입술이 다가올 때 커다란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사랑을 속삭였던 시골 똥강아지 같던 눈을 가진 성현이를 이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깊은 상실감이 내 시야를 뿌옇게 바뀌었다.
어제의 행복이 거품처럼 무너지고 커다란 상실감에 후회가 찾아왔다.
조금만 참을걸.
어젯밤 섹스를 하지 말걸.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눈을 감자. 익숙한 얼굴의 성현이가 떠올랐다.
교장의 화단에서 꽃을 꺾어와 멋쩍은 얼굴로 내게 꽃을 내밀던 기억.
"성현아 그 꽃 이름이 뭔지 알고 주는 거야?""크흠. 히아신스….""그럼 꽃말도 알겠네?""몰, 몰라! 오다가 주웠다니까!"
기억 속의 성현이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백진희의 추궁을 피하려 했다.
"꽃말이 뭔데?""...""뭔데 성현아?"
내 물음에 성현이는 이마를 긁으며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영원한 사랑."
멀어져 간다.
그 기억이. 그 감정이.
꿈처럼 잊혀져 간다.
"좋아. 어쩔 수 없지. 네가 그리 원하니 나도 영원히 널 사랑할게."
미소를 지으며 새끼손가락에 묶인 붉은 실을 내보이며 시골 똥강아지 같은 순박한 미소를 짓던 성현이의 모습도.
"사랑해 아린아. 평생 사랑할게. 진짜 너만 사랑할게.""나도 너만 사랑해 성현아."
스스로 다짐하듯 내게 속삭이던 어제의 성현이도.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성현이에 대한 감정의 기억들이 내 마음속에서 역류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사랑을 잃어버렸다.
숨이 가빠졌다. 미친 듯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뿌옇게 변한 시야를 억지로 손으로 닦아내었다.
커다란 상실감. 내 이성을 짓누르는 후회감이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내가 알던 성현이는 이제 기억 속에만 남을 터. 내 선택으로 내가 알던 성현이는 죽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부엌으로 힘겹게 걸어갔다.
내가 알던 김성현을 되찾아야 한다는 후회와 압박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부엌에 걸려 있는 칼이 눈에 들어왔다.
김성현에게 공략당하는 것을 피해 자살을 해. 회귀를 했다는 진희의 말이 떠올랐다.
칼을 집어 들었다. 아플까 하는 생각보다. 성현이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목에 칼을 들이댔다.
목을 긋기 위해 팔을 움직이자. 붉은 피가 내 어깨를 적셨다.
목뼈에 닿은 걸까. 힘을 주어도 움직이지 않는 칼에 의아스러워 고개를 내리니.
그곳에는 칼을 붙잡고 있는 피 묻은 손이 보였다.
힘을 줘. 칼을 부숴버린 손이 내 어깨를 붙잡고 내 몸을 돌려세웠다.
"뭐 하는 거야…."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당장에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늑대 같은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구석으로 몰아세우던 김성현이 내 어깨를 붙잡자. 나는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그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미쳤어!!"
"내 몸에서 손때!!!"
"정신 차리라고 신아린!"
그 외침에 발버둥을 멈추자. 화가 난 듯 김성현은 벽을 주먹으로 부수며 소리쳤다.
"날 사랑한다며!! 왜 죽으려고 하는 건데!"
그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울고만 있자. 성현이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마주하고 물었다.
"왜 그랬어. 내가, 내가 뭐 잘못했어? 사과할 게 미안해 아린아. 응? 왜, 왜 그런 거야 도대체. 미안해. 용서해줘…. 미안해 아린아."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미안해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에 나는 결국,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내, 내가 아는 성현이…. 내가 사랑하는 성현이가 아니잖아."
내 말에 이해를 못 했다는 표정을 짓는 김성현에게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성현이가 아니라고!!"
내 외침에 충격을 받았는지. 김성현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애원하듯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며 나를 설득이라도 하려는지. 필사적으로 내 팔을 붙잡았다.
"나야, 아린아. 나 성현이야. 너랑 반지도 맞추고 키스도 하고.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고. 그거다…. 나라고 아린아."
그 말에 나도 무릎을 꿇고 성현이에게 빌듯이 애원했다.
"제발, 원래대로 돌아와 줘…. 제발, 제발. 부탁이야. 이렇게 빌게 미안해. 응?"
앞으로 손을 모아 성현이에게 울면서 빌자. 김성현은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아린아. 손가락에 이거. 영원한 사랑의 맹세라며. 내 새끼손가락에 이 붉은 선. 너도 보이잖아. 내가 몰라보게 많이 바뀐 거 아는데. 제발 진정하고 나 좀 봐. 응? 제발!"
"미안, 미안해. 내가 미안해."
"신아린!!"
어깨를 부술듯한 강한 힘에 고개를 들자. 턱에 힘을 주며 화를 참는듯한 표정으로 김성현이 나를 노려보았다.
"제발. 혼란스러운 거 아는데. 제발, 심호흡 한 번만 해. 조금만 진정해줘. 부탁이야."
"흐...흐흑…. 흑…."
"미안해 아린아. 미안, 미안해."
날 품에 끌어안는 김성현의 행동에 몸을 밀치고 싶었지만. 김성현의 힘이 워낙 커서 품에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발버둥 치지 못하게 하려는지. 내 몸을 꽉 안아 든 김성현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아린아."
"흐흑…. 흑…."
"지금의 나에게 적응하기 힘들지 몰라도. 제발, 시간을 줘. 나 정말로 성현이야. 너한테 증명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내가 진짜 잘해줄 게 아린아."
그러나, 나는 그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김성현에게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