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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72화 (72/160)

〈 72화 〉 은인

* * *

"..아린아."

"..."

"아린아!"

"으, 응? 미안."

나를 부르는 성현이의 목소리가 그제야 들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사과를 건넸다. 머리도 아프고 몸도 무거운 게 너무 힘들어 반응하지 못했다.

"괜찮아?"

"미안, 요즘 잠을 못 자서…. 너무 힘들어서 정신이 없네…."

내 말에 성현이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요즘 들어 매일 같이 성현이와 관계를 맺는 꿈을 꾸고 있다. 발정이라도 난 동물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어나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위하느라 잠을 잘 시간도 부족했다. 당장에라도 침대에 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몸과 정신은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다.

심지어 수업 도중에 처음으로 잠이 들어 성현이가 나를 깨워주기까지 했으니까….

다행히 내일부터 주말이니 푹 쉴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위안이 되었다.

"오늘은 푹 자고 싶어…. 너무 힘들어."

한탄하듯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성현이는 뒷머리를 긁으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미안…."

"응? 뭐가?"

뜬금없는 사과에 이유를 묻자. 성현이는 당황해하며 손을 흔들었다.

"어? 아니, 너 피곤한데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하다고…."

"아니야. 내가 잠 설치는 건데 뭐."

자기 생각하면서 자위하느라 피곤하다는걸. 성현이는 알까. 착하기도 한지 내 피곤함이 자기 잘못인 것처럼 미안해하는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마다 잘했다고 칭찬을 해야 더욱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래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축내리는 모습이 귀여워 책상 위에 올려진 손을 잡아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네 탓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마."

"응…. 그냥 걱정되서….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거야!"

나를 걱정하며 위로하는 모습이 시골 똥강아지 같은 눈과 무척이나 어울려. 그 처연스러움에 무척 귀엽게 보였다.

볼 한번 세게 깨물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 때쯤 진희가 다가와 말을 건네왔다.

"아린아. 미안한데 잠깐 성현이 빌려 가도 될까?"

"응? 왜?"

진희는 나와 있을 때는 성현이와 대화를 자주 했지만.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 단둘이 있을 때는 서로 껄끄러워해서 대화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현이랑 단둘이 대화를 한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진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비밀이야~ 잠시면 돼. 궁금하면 이따가 성현이에게 물어봐."

목소리에 깃든 장난기에 걱정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자. 성현이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진희의 뒤를 따라 교실 밖 복도로 나갔다.

***

갑작스럽게 단둘이 대화를 하자니. 백진희가 무슨 소리를 할지 조금 경계심이 들었다.

전부터 조금 꺼림직하다 해야 하나. 백진희 앞에서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생긴단 말이지.

그래도 아린이를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전적으로 내가 잘못한 일투성이였기에 불편한 티를 최대한 감추고 백진희를 바라보자.

인형같이 아름다운 외모에 맑은 백안이 장난기 섞인 눈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 조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항상 내 앞에서 서늘한 모습을 보이던 백진희가 이런 눈웃음을 지을 줄 안다는 게 조금은 신기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 괜찮지?"

"뭔데?"

고백한다면 어쩌지. 내게는 아린이가 있는데…. 첩이라도 상관없다면 3P를­

"조민성이 아린이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뭐!?"

백진희의 충격적인 말에 당장 머릿속의 망상이 지워졌다. 내가 들은 게 진짜인가?

내 반응이 즐겁다는 듯이 관찰하던 백진희의 모습에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거짓말하는 거지?"

내 말에 살짝 고개를 젓고는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진짜야. 조민성은 플라틴의 공식적인 후계자. 아린이는 차성의 유일한 후계자. 그 둘이 만나면은 초거대기업이 탄생하니까. 조민성이 아린이를 사랑하지는 않아도 차성이라는 그 매력적인 배경을 놔둘 리가 없잖아."

씨발. 백진희의 논리적인 말에 말문이 막혔다. 백진희에게서 고개를 돌려 문틈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아린이의 옆모습을 보니 조금 가슴 한쪽이 쓰라렸다.

인기도 많은 새끼가 왜 남의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손가락에 커플링까지 끼고 있는데….

내 머릿속 야한 망상이 빠르게 회전하여 이유를 찾았다. 조민성이 아린이에게 이성을 잃는 독을 주입한 이유.

정조대를 채우고 나를 패던 아린이의 상태에 정이 떨어져 나와 아린이가 헤어지고. 힘들어하는 아린이에게 위로한다며 접근해 비어있는 남자친구 자리를 낚아채려고 했던 거다.

그 둘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며 후회하며 아카데미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내 침대 위에 올려진 의문의 CD를 확인하니 화면 속에는 조민성과 신아린이 등장하고 아린이는 카메라를 보며 옷을 하나씩 벗어가 나에게 "성현아, 나 오늘 민성이랑 첫 경험을 할 거야." 그 뒤로 나는 후회하며 그것을 보며 딸을 잡는….

NTR 망상 멈춰!!!

"아린이 요즘 고민 있는 거 알고는 있어?"

"..어?"

백진희의 목소리에 망상에서 벗어났다. 아린이의 고민이라면 요즘 비골이 밤마다 꿈에 들어가 섹스를 해서 피곤한거일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내가 비골을 시켜 아린이를 발정 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도 없기에 모른 척 물어봤다.

"무슨 고민인데?"

내 물음을 들은 백진희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아주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해주기 전에 나한테 약속하나 할 수 있어?"

"무슨 약속?"

"아린이 배신하지 않고 평생 행복하게 해준다는 약속. 네 입으로 그 말을 듣고 싶었어."

백진희의 말에 조금 내 안에 있던 불신과 꺼림칙함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 녀석…. 정말로 아린이를 아끼는 건가? 사실, 옆에서 보면 같은 나이의 친구가 아니라 엄마처럼 아린이를 챙겨주는 모습이었다.

나도 몇 번 그 도움을 받아 아린이와 가까워질 수 있었고…. 생각해보면 내가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거지. 그전까지는 나와 백진희의 사이도 꽤 좋지 않았나 싶다.

"당연하지. 내가 아린이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니까."

인터넷에서 본 조금 멋진 대사를 얘기하자. 백진희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자, 이거 받아."

"뭐야 이거?"

무심코 건넨 것을 받아들여 확인해봤다. 무슨 고속버스 탈 때 쓰는 승차권 같아 보였다.

"플라틴 포탈 이용권이야."

"포탈 이용권? 이거 존나 비싼 거 아니야?"

비행기를 타기 귀찮아하는 부자들이나 이용한다는 마법 포탈의 이용권. 한 번 이용에 억을 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주 고객이 중동의 기름 부자들이라던데. 이걸 어째서 내게?

"플라틴에서 1박 2일 허니문 상품으로 초고가에 파는 거야. 작은 무인도에 잘 꾸며진 펜션 하나. 누구의 간섭도 없이 단둘만이 그 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거지."

"오, 말만 들어도 되게 비싸 보이네. 그런데 그걸 왜 나한…. 잠깐, 허니문?"

백진희의 말을 잘 못 들은 건가? 허니문이라면 내가 아는 그 허니문 말하는 걸까? 신혼 첫날 밤 뜨거운 시선을 공유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그 허니문?

"아린이는 너랑 첫 경험을 하고 싶은 마음과 차성의 후계자라는 사이에서 엄청나게 고민하며 힘들어하고 있어."

"그건 알고 있어…."

비골도 아린이가 분명 발정이 났을 텐데 섹스하자고 달려들지 않는 거 보면 초인적인 인내심이라고 칭찬했으니까.

"나한테 묻더라. 너랑 하고 싶은 게 정상이냐고. 너도 알다시피 아린이가 이런 쪽에는 무지하니까. 내게 조언을 구하거든."

"...정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참고는 있지만 아린이도 사실은 나를 원하고 있다는 말에 묘한 흥분이 들었다.

"응. 그래서 말했지, 연인 사이에서는 당연한 거라고. 그래서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힘들어하고 있어."

그렇게 말한 백진희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네가 정해. 내일 아린이와 허니문 여행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지. 이대로 놔두다가 조민성에게 선수를 뺏길지."

"...조민성이 여기서 왜 나와."

짜증이 담긴 내 대답에 백진희는 피식­ 비웃는 소리를 내며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솔직히 조민성이랑 너랑 비교도 안 되는 거 알잖아? 조민성은 플라틴의 후계자, 잘생긴 외모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아린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솔직히, 나는 조민성이 아린이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거든. 너랑 아린이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조민성이 아린이와 잘되게 도와줬을 거야."

백진희의 정직한 답변에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짓는 조민성을 볼 때마다 열등감이 느껴져 그럴 때마다 일부러 아린이의 손을 잡거나 끌어안는 거로 해소했는데. 아린이마저 조민성에게 뺏긴다면 둘 다 죽여버리고 싶을 거다.

NTR당한 주인공이 무릎 꿇고 후회하는 건 나한테 없다. 무조건 빠따들고 년놈들 대가리 깨는 복수극이야.

"내일 확실한 도장을 찍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건 너일 거야. 이건 아린이의 친구로서 말하는 게 아니라. 네 친구의 입장으로 조언해주는 거야."

"...우리가 친구였나."

"메긴기요르드를 구할 때 친구라고 말하기에 여태까지 친구인 줄 알았더니. 내 오해였다면 미안."

"아니, 장난이지 뭘~ 정색을 해. 나야 항상 네 도움 받는데. 친구가 아니라 은인이다~ 이 말이지."

조금 무섭게 정색하는 모습에 황급히 장난인 것처럼 넘겼다. 어찌 되었든 이런 비싼 포탈 이용권까지 주는 걸 보면 백진희는 정말로 우리 둘이 행복하길 바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메긴기요르드를 얻게 해준 것도. 기한신에게서 벗어나게 해준 것도. 내가 한서아에게 못된 짓을 하는걸 막아준 것도 생각해보면 다 백진희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워져 턱을 긁으며 작게 말했다.

"그, 고맙다. 진희야."

"성 붙여서 말해. 아직 그 정도로 친하진 않잖아?"

쌀쌀맞게 말하는 백진희의 대답에 나는 무언가 떠올라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웃자 백진희는 미간을 좁히며 나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그 모습에 더욱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야 알겠다. 백진희가 쌀쌀맞게 굴며, 내가 친근하게 대할 때마다 틱틱거리는 이유.

아직 나는 수행이 부족했다. 곧장 알아채지 못하다니…. 이런 캐릭터 익숙하잖아?

츤데레.

백진희는 츤데레였어!!! 이제야 백진희의 행동이 설명이 갔다.

싫다고 말하면서 뒤에서는 나와 아린이의 사이가 좋아지도록 돕고. 가까이 가면 싸가지없이 굴면서도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난식으로 말한 `친구`라는 단어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미소녀.

누가 봐도 츤데레 역할이잖아!!!

잘하면 진짜로 첩실로 들일 수 있­

"이상한 망상 그만하고. 아린이한테나 잘해."

"훗…. 그래."

조금 멋있게.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불쾌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백진희는 나를 지나쳐갔다.

귀엽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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