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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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 진희는 어디선가 재료들을 구해와 비밀의 방에서 해독제를 만들었다. 신비한 마법약을 만드는 시간이 된 것처럼 재료들의 무게를 재고 녹이는 등 여러 가지를 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본 결과.
냄새만으로도 엄청나게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조금 걸쭉해 보이는 초록색 액체가 탄생했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액체가 들은 잔을 받아들여 꾸역꾸역 삼켜내자.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쓴맛이 느껴졌다. 미리 진희가 준비해놓은 초코우유 안에 초콜릿까지 부숴 넣은 단맛의 결정체를 마시자. 그제야 입안을 감도는 쓴맛을 강한 단맛이 덮어줬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내 양쪽 귀에서 멍한 느낌이 들더니. 갑자기 무언가 액체가 흘러나오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손을 가져다 대니. 손에 검은 액체가 묻어나왔다. 매우 역한 냄새 때문에 코가 아플 정도였기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본 진희가 알 수 없는 언어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손을 흔드니. 악취가 곧장 사라져버렸다.
"와. 진희 너는 마법도 잘하는구나."
"시간이 많았으니까. 마법도 배우고 고대 룬문자도 많이 배워놨지. 기분이 어때? 제대로 효과가 발휘되려면 자고 일어나야 할걸."
"기분은 괜찮은 것 같아."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진희는 미소를 지으며 내 귀에서 흐르는 액체를 닦아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성현이에게 가서 설명하고 사과하자. 괜히 이 일 때문에 너에게 악감정이라도 품고 있으면 어떻게 해?"
"알았어…."
진희의 말에 내가 김성현에게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희는 테이블 위의 책들을 정리한 뒤.
나와 같이 김성현이 있는 내 방으로 향했다.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자 심통 난 표정으로 아레아와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성현이 내게 시선을 보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진희가 나 대신 나서줬다.
"김성현. 너에게 설명해줄 게 있어."
"...뭘?"
진희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가 조민성에게 속아 넘어가 벌레의 독에 물려. 지금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백진희의 말을 미심쩍어하는 김성현의 모습에 내 뒷머리를 들춰 흉터를 보여주고. 책의 페이지를 휴대폰으로 찍어놓은 것까지 보여주자 그제야 김성현은 믿음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김성현은 조금 걱정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어쩐지 너무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이제 몸은 괜찮은 거야?"
"그…. 미안해."
그렇게 함부로 굴었는데도 나를 걱정하는 모습에 또 독이 작용한 건지 크게 죄책감이 들어 눈물이 눈에 고였다.
"아니야. 여자친구가 이상한 것도 눈치 못 챈 내 잘못도 있지."
아레아가 눈치를 보더니 잘됐다며 손바닥을 짝짝 쳤다.
"근데 얘는 누구야?"
아레아를 처음 보는 진희는 김성현 곁에 있는 고스로리 트윈테일 소녀가 궁금했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김성현이 왜인지 크게 당황하며 말했다.
"아, 그 나랑 계약한 정령이야. 이름은 비골이고…."
"정령…?"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진희가 아레아를 바라보자. 아레아는 백진희의 시선을 피해 황급히 내 뒤로 몸을 숨겼다.
"흐응, 정령이라…. 풋. 대단하네."
무언가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는 김성현과 진희의 모습에 의아해할 찰나. 갑자기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 쓰러질 뻔한걸 아레아가 붙잡아 줬다.
"여주인! 괜찮아?"
"으, 응. 미안. 갑자기 어지러워서."
"약효 때문일 거야. 아린이 쉬게 나가주자."
진희의 말에 다들 밖을 나가려기에 나는 황급히 김성현을 불러세웠다.
"잠깐 성현이랑 얘기 조금만 할게."
내 말에 진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차라리 남자친구가 간호해주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그럼 나는 자리를 비워줄게."
무언가 김성현과 또다시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며 피식 미소를 짓고는 진희는 내게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머리가 어지러워 아레아의 도움으로 침대에 눕자. 김성현이 걱정하는 얼굴로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봤다.
침대에 걸터앉은 자세가 이상해 웃으며 말해주려다. 까먹고 있던 것이 떠올라 자책하며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 성현아. 정조대 잊어버리고 있었어…. 얼른 풀자."
황급히 서랍에서 열쇠를 꺼내 들어 건네주자 뒷머리를 긁으며 열쇠를 받아든 김성현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사실 화장실 가고 싶은 거 엄청 참고 있었거든."
"그…. 미안해 정말. 내가 제정신이 아녔나 봐."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었고 짜증 날 상황도 아니었는데. 독의 효과가 엄청났다기보다는 그동안 내 안에 쌓아놓고 풀지 못했던 감정들이 독에 의해 급격히 분출 된 것 같았다.
열쇠를 받아든 김성현은 곧장 화장실로 향했고. 어느새 정령화를 한 건지. 내 품 안에 쏙 들어온 아레아를 인형처럼 끌어 안아 들었다.
"여주인. 독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오해했어! 역시 돈 많은 착한 누나가 진짜 여주인이지!"
나를 달래주는 아레아의 위로 섞인 말에 물컹거리는 몸을 쓰다듬어주고 있을 때. 한 손에 정조대를 들고 김성현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럼 이제 이거는 안 차도 되는 거지?"
"당연하지. 미안해."
나도 남자였으니 내가 얼마나 나쁜 짓을 한지 잘 알고 있다. 자위도 못 하게 하는 건 너무 심했다.
하루의 끝을 자위로 끝마치고 꿀잠을 자는 게 내 학창 시절의 일과였으니까.
"아니야. 뭘."
테이블 위에 정조대를 올려놓고 내 곁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김성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주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내 가슴에 파묻혀 몽글몽글한 아레아의 감촉에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올라갔다.
"근데 이 팔찌는 어디서 난 거야? 요즘 계속 차고 다니네?"
"아, 이거 조민성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너무 기분이 좋아 무심코 입 밖으로 조민성을 언급하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김성현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조민성? 걔가 준 걸 왜 끼고 있는데?"
"아니, 이건 껴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
"당장 벗어. 조민성은 너한테 독을 주입한 놈이야. 그 미친놈이 준 걸 왜 끼고 있어?"
이 팔찌가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 모르는 김성현의 입장에서는 조민성이 준 물건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다.
키스 이후. 나는 진희를 온전히 믿을 수 있었다.
단순히 예쁜 여자와 키스를 해서 온전히 믿을 수 있어! 같은 멍청한 생각이 아니라.
진실의 끈을 차고 있을 때. 진희는 절대 나를 세뇌할 생각이 없다고 약속했고. 내가 행복해지길 원한다는 말이 조금씩 내 마음을 흔들었다.
기한신과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진희에게 화가 나면서도. 결국에는 은연중에 내 목숨을 보호하고 김성현의 동정을 지켰다는 것과.
생존 실습 때 내가 소니아에게 죽을뻔한 날. 나를 구해준 것도 진희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더는 진희의 본심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진희는조금 과격할때가 있지만.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또다시 나를 세뇌할까 두려웠다. 조민성조차 나를 폭주시키려고 내 몸에 독을 주입했는데. 더는 누군가에 세뇌당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인물이 불쑥 나타나 나를 세뇌하여 조종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너무 컸기에 진희를 믿으면서도 팔찌를 벗지 못하는 이유였다.
결국, 나는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김성현에게. 이 팔찌에 대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요정왕의 팔찌라는 거야. 착용자에게 해로운 마법이나 저주 등을 `해주`하는 팔찌야. 그것 때문에 내 몸을 보호하려고 계속 차고 있는 거고. 조민성이랑 거래해서 받아낸 거지. 조민성이 나에게 선물로 주거나 그런 게 아니니까 걱정 마. 이상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도 진희가 확인했고."
그렇게 설명하자. 내 품 안에 있던 아레아와 김성현이 묘한 시선을 주고받더니 내 팔찌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수상한 눈빛을 보냈다.
어지러워서 그런가. 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 그러면은 잘 때는 안 빼?"
"굳이…? 자고 있을 때 세뇌당하면 어떻게 해?"
내 말에 왜인지 모르게 아쉬운 한숨을 내쉬는 김성현의 모습에 조금 의심이 들어 눈을 좁게 만들어 바라봤다.
"왜 반응이 이상해? 마치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
"아니, 나는 안 아쉬운데? 불편할까 봐 그런 거지 뭐. 그치 비골아?"
"으, 응. 그 팔찌 차고 자면 피부병 걸릴 텐데. 어차피 밤에 누가 세뇌할 것도 아닌데. 팔찌는 벗고 자는 게 여주인의 피부에 좋지 않을까?"
날 걱정해주는 아레아의 말에 상체를 일으켜 아레아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 걱정해주는 거야? 걱정 마. 요정왕의 팔찌라 그런지 더러워지지도 않아서 피부병 걱정은 없어."
"엣 그러면 안 되는데."
내 말에 당황한 듯 눈을 굴리며. 아레아는 마치 도와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김성현을 바라봤다.
"응?"
아레아의 이상한 반응에 의아해할 때쯤 김성현이 급히 끼어들었다.
"많이 피곤한 거 아니야? 휴식해야지 자자. 누워."
내 어깨를 누르는 손길에 다시 침대에 누우면서 무언가 수상함을 느껴 김성현을 바라봤다.
"내가 팔찌 벗길 원해?"
"아니, 잘 때만이라도 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조민성이 준거잖아. 조금 찝찝해서 그러지."
뒷머리를 긁으며 걱정하는 목소리로 나를 보는 김성현의 눈빛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잘 때만 뺄게."
"흐엣! 진짜지!"
기쁜 듯 내 배 위에서 통통 몸을 튕기는 아레아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왜 그리 좋아해?"
"그야! 그, 여주인이 안아줄 때 팔찌가 닿아서 조금 아팠거든."
"그래? 몰랐어 미안해."
안아 들 때마다 아레아의 몸에 팔찌가 닿았었나 보다.
내가 미안해하자 이상하게도 아레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꿈틀댔다.
"그 정도로 미안해 할 필요는 없을…. 걸?"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런지 다들 아까부터 반응이 이상했다. 약효가 돌아서 그렇게 느끼는 걸까.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눈이 점점 감겨 잠기운에 몽롱해질 때쯤 김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것 같으니…. 그럼 팔찌 풀게?"
"...응, 그래."
눈을 감은 채 내 왼팔을 들어 팔찌를 벗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졸리다. 이대로 푹 자고 싶어.
"아잇! 이번엔 진짜로 이 아레아님을 전적으로 믿고 맡"
아레아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머리를 만져주는 따스한 손길에 참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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