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결의
* * *
내 안을 가득 채운 건 처음 느껴보는 충족감이었다.
항상 텅 비어있던 내 몸 안의 구멍 난 곳을 충족이라는 감정으로 메꾼 것처럼.
몸 안에 있는 모든 세포가 깨어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본능에 커다란 환호를 지르는 듯했다.
그 묘한 충족감에 침음을 삼키며 감았던 눈을 뜨자. 조각이 난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사람이었던 것들.
이제는 그 형태조차 구분이 되지 않아. 누구의 살점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장난이라도 치듯. 살점들을 발로 툭툭 차서 한곳에 모은 뒤. 그 덩어리들을 느리게 짓밟았다.
신발 밑창에서 뿌드득거리며 터져나가는 살점의 소리가 만족스러워 길게 입꼬리가 늘어졌다.
나는 손에 묻은 피를 툭툭 교복에 털고는 밖으로 나갔다. 콧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며 문 앞에 서 있자.
김비서는 긴 수건을 가져와 내 어깨에 두르고 나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초록색의 입욕제가 풀린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어깨에 걸친 수건을 바닥으로 떨구고 피에 젖은 교복을 벗기 시작하자. 김비서가 황급히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교복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새 옷과 속옷은 안쪽 서랍에 있습니다. 아, 휴대폰은 깔끔히 청소해 놔두겠습니다."
"응."
몸에 걸친 것들을 전부 벗고 샤워기를 틀어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한동안 물을 맞고 있자.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 한참을 멍하니 앞만을 바라보다. 나는 내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만족감과 충족감 사이.
후회와 절망이 조금씩 자리를 채워가며 본능이라는 것에 짓눌렸던 이성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진다. 생각하지 말자. 떠오르지 말자. 되뇌어보아도. 이성은 내 행동을 직시하라며 머릿속에 조금 전 있던 일들을 끄집어낸다.
배를 손으로 찌르자. 울부짖는 소녀의 턱을 그대로 찢어 흐르는 피가 아깝다는 듯이 받아먹던 모습.
누군가의 부드러운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으며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만족스럽게 웃어대던 나.
살려달라는 외침에 일부러 더 아프게 팔뚝을 깨물던 행동.
죄책감에 짓눌리기 전에 내 이성은 나를 교묘한 말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예전부터 사람을 죽여온 거라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지 않을까.
이게 내 본모습이라면. 오히려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니냐며 화를 낸다.
나는 한참이나 아무런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
몇 시간이 지나고 나는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진희와 만나기로 했고.
내가 들어갈 기숙사의 공사가 끝나 오늘부터 1인 기숙사에서 생활하기로 했으니까.
차기사의 차에서 내려 교정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린아!"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시골 똥강아지 같은 순박한 눈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김성현을 본 순간 아주 만족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오늘 학교에서 느꼈던 성적 욕구라 느꼈던 갈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당장에라도 김성현의 자지를 물고 싶어 하던 충동은 사라지고.
평범한 나로 돌아와 김성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안녕 성현아."
"괜찮아? 메시지 확인도 안 하길래…. 화 많이 났어?"
"응? 아니야. 바빴어."
왜인지 모르게 자연스레 미소가 나온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소리친다. 끌고 가자.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서 괴롭히자.
그 충동적인 외침은 마치 내 생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릿속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 그럼 아까 못한 거마저 할까?"
뒷머리를 긁으며 눈치를 보는 김성현의 모습에 내 머릿속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그래. 가자."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김성현은 기쁜 표정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땀이 조금 배어 나온 손이 끈적거려 불쾌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기에 순순히 따라가자. 김성현은 익숙한 모습의 창고로 나를 끌고 왔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한서아를 강간하려던 곳. 백진희를 공격하려는 걸 내가 머리로 막은 곳.
그런 안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을 나와 첫 경험을 하려는 곳으로 정하다니.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김성현에게는 나를 배려한다는 생각보다 성욕의 해소가 우선이겠지.
그 생각에 심장이 쿵쿵대며 온몸의 피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린 커억!"
문을 닫고 뒤에서 내 어깨를 잡는 김성현에게 몸을 돌려 곧장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무언가 딱딱하게 느껴져 불쾌한 감촉이었다.
아마도 매일 차고 다닌다는 메긴기요르드 같았다. 내가 생각한 부드러운 뱃살의 감촉이 아니라 조금 짜증이 났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무방비한 상태로 복부를 맞은 김성현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배를 부여잡고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봤다.
그 모습이 조금 전 기억 속에서 보았던 김성현에게 배신당한 백진희의 모습과 겹쳐 보여.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김성현을 발로 짓밟기 시작했다.
"악! 아악!!!"
김성현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를 때마다 나는 만족스러워하며 더욱더 세게 김성현을 짓밟았다. 점점 몸을 뒤로 빼며 내 발길질을 피하던 김성현은 이내 등이 벽에 닿자.
콩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피를 흘리며 내 발길질을 맞기만 했다. 그 모습에 흥미가 뚝 떨어졌다.
반항이라도 하면 더 재밌을 것 같은데.
"일어나. 김성현."
내 말에 꿈틀거리며 얼굴을 감싼 팔 사이로 두려움이 담긴 눈이 나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성현아~ 일어나~"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둘러보자 창고 안에 있는 훈련용 무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나를 때렸던 것과 같은 몽둥이가 보여 손에 쥐고 몸을 돌리자.
비틀대며 창고 밖으로 도망이라도 가려 했는지. 기어가는 김성현의 모습이 보여 느긋한 걸음으로 몽둥이를 까닥거리며 다가갔다.
"몇 대 맞을래 성현아?"
"왜, 왜 그래…. 아린아 내가 잘못했어."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
몽둥이를 느리게 머리 위로 들자. 김성현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서 막았다. 그 모습에 안심하고 몽둥이를 내려치자. 뿌득하는 소리와 함께 김성현의 왼팔이 이상한 모양으로 꺾였다.
"아아악!!!"
팔을 붙잡고 울어대는 김성현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다시 몽둥이를 들었다.
"오른팔 올려."
"아파! 아프다고!!! 이 미친년아!!!"
그제야 소리 지르며 욕을 내뱉는 모습에 내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오른팔 안 올리면 더 때릴 거야."
"이 씨발년아!!! 미쳤어!!!"
이제야 김성현의 본심이 튀어나오는 걸까. 나는 김성현에게 몽둥이를 내려치려 했지만.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아 막았다.
언제부터 내 뒤에 있었는지 모를. 은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처음 보는 여자.
"그만해. 남자친구를 죽일 생각이야?"
그 말에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칠격에 김성현의 호위를 맡겼었지. 거기에 은발이면….
"일리아구나?"
내 말에 흠칫 몸을 한 차례 크게 떨더니 미간을 좁히며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너…. 내 본명을 어떻게 알지?"
"차성이니까."
나를 노려보는 일리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봐주자. 한참을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노려보던 일리아는 내게서 시선을 돌려 쓰러진 김성현을 바라봤다.
"어쩔 거야 저거."
팔이 부러진 고통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기 주제를 모르네?"
더 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앞으로 가려는데. 창고의 문이 열리며 큰 소음을 냈다.
"아린아. 그만해."
들려오는 백진희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자. 백진희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아직 할 얘기가 남았잖아. 성현이는 나중으로 미뤄두자."
"...그래."
백진희의 설득에 나는 들고 있던 몽둥이를 김성현에게 던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창고를 나왔다. 일리아는 어느새 창고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배경과 동화되어 다시 김성현 근처에서 감시하고 있겠지.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진실의 끈을 묶고 있지 않은 이상은 백진희의 말을 신뢰할 수가 없었기에 말없이 백진희의 뒤를 따랐다.
*
크림색의 침대에 걸터앉아. 마실 것을 준비하는 진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마음속에 가시 하나가 깊게 박혀 계속 아파져 와 불편했다면. 갈증을 해결해서인지.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연신 지었다.
그런 나를 바라본 진희는 여느 때처럼 웃으면서 내게 물었다.
"아린이 기분 좋아 보이네?"
"그런가? 그런 것 같아."
김성현에게 복수해서일까. 아니면 갈증이 해소되어 충족감이 가득한 상태라서일까.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티가 담긴 잔을 건네준 진희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한 입 마시자.
시원한 느낌에 조금 답답했던 가슴이 편안해진 기분이다.
"앞으로 계획이 뭐야?"
잔을 둘 곳이 없어 침대 밑에 내려놓고 진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일단 우리의 목표를 확실하게 하자. 김성현이 졸업전까지 동정을 유지하는 걸로."
"그냥 김성현 꼬추 잘라버리면 안 돼?"
내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진희는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돼. 그러면 다시 입학식으로 돌아갈 거야."
진희를 바라보다 진실의 끈을 다시 차자고 말할까 고민이 들었다. 백진희를 믿는다는 뜻을 보여주려면 그게 맞지만.
솔직히 아직은 백진희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런 내 고민 섞인 표정을 읽었는지. 고맙게도 진희는 먼저 진실의 끈을 가져와 자기 손목에 묶었다.
"자. 신뢰를 쌓기 전까지는 확실한 게 좋겠지?"
"그, 그래. 고마워."
다시 오른 손목에 서툰 왼손으로 묶으려 하자. 진희가 내 오른 손목에 직접 묶어주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 뭐든지 물어봐."
그 배려심 있는 모습에 내 기억 속에 항상 나를 배려해주던 백진희의 모습이 떠올라 조금 미소가 나왔다.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거. 정확히 무슨 뜻이야?"
다시 아카데미로 오는 동안 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나를 세뇌하고. 내가 마족임을 숨기던 백진희가 사실은 내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거.
나를 바라보던 진희는 버릇처럼 내 머리에 손을 올리려다 멈추고는 슬쩍 내 눈치를 보기에 손을 올려. 진희의 손을 내 머리에 올려뒀다.
"괜찮으니까 해도 돼."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진희는 여느 때처럼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까 나한테 물었지. 왜 네가 아카데미에서 벗어나면 [큰 흐름]을 거스르는지."
진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신아린은 영또플에서 무슨 설정이기에 아카데미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걸까.
"신아린 너는…. 영또플의 마지막 히로인이자. 마지막 빌런이라는 설정이니까."
"...그렇구나."
진희의 말은 충격적인 말이지만 왜인지 모르게 지금의 나는 그렇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렇구나`라는 생각만이 들 뿐.
조금 무감각해진 걸까. 요정왕의 팔찌를 내려다봤다. 세뇌당한 게 아니라는 증거. 그럼 내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이 허무함은 무엇일까.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내 손에 자기 손을 포개고는 나를 보며 조금 슬픈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초월 아카데미의 최종 보스. 차성이라는 세계 3위의 기업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기르던 마족. 그게 바로 신아린의 정체야."
"그럼 왜 나한테 기아스를 김성현에게 사용하라고 세뇌한거야?"
"최종 보스지만. 마지막 히로인이라고도 했잖아. 김성현은 너를 공략함으로써 세상을 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어."
그 말에 의문이 들었다. 내가 세상을 멸망시킬 괴물이라도 되는 걸까.
"너는 재앙의 그릇이야 아린아."
그 말을 하며 묘한 미소를 짓는 백진희의 모습에 뒷목을 바늘로 긁는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내게 다시 세뇌하는 건가 싶어 조금 경계하자. 백진희는 잡은 내 손을 놓고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릇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진희의 백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백진희는 영또플에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진희는 잠시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를 보며 미소 지으며 물었다.
"일단 기아스를 왜 걸었는지. 그것부터 설명할게."
"응."
"김성현은 반드시 너를 공략하게 될 거야. 그건 필연성이거든."
"뭐…?"
백진희의 말에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미친 소리야. 내가 무조건 육변기가 될 운명이라고?
"말했잖아. [큰 흐름]이라고. 너는 아카데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김성현에게 결국, 공략당해 이 세계를 무너트릴 재앙을 막을 방법을 찾을 수 있어."
"씨발…. 그런 게 어딨어. 여태까지 노력한 건 어떻게 되는 건데!"
흥분한 내가 소리 지르자. 진희는 내 손을 잡아 다시 침대에 걸터앉혔다.
"기아스를 건 이유가 그거야. 김성현이 너를 반드시 공략하는 운명이지만. 절대 나처럼 이용하고 버리지 못하게 하려는 보험."
"씨발…. 웃기지 마…."
내가 마족이라는 말을 들은 것보다도. 또, 내가 영또플의 마지막 빌런이라는 말을 들은 것보다도. 반드시 김성현에게 공략당한다는 운명이라는 사실에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공황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내 중얼거림에 진희가 내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린아. 내가 다 시도해 봤어. 벗아나는건 불가능해."
"아니라고!!!"
이딴 운명은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는 주인공이 될 거야.
이 세상을 내 힘으로 구할 거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