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갈증
* * *
백진희는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감정을 다스리듯 크게 숨을 내쉬며 주먹을 쥐더니.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이게 김성현의 사랑이야. 똑똑히 봐둬."
그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는 말에 나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고 있는 백진희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왜…. 성현아…. 도, 도대체 왜….""응? 원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아, 아니야…. 나를, 날 사랑하잖"
그 말을 부정하려는듯 백진희는 남은 손으로 김성현의 바지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지금까지 재미는 있었어. 백진희. 그거 아니었으면 진작 죽였을 텐데.""거, 거짓말…. 아니잖아…. 이거 함, 함정이지.""너는 내가 따먹었던 여자 중에서 가장 명기라. 조금 아쉽긴 해."
낄낄대며 웃어대던 김성현은 백진희의 잘린 팔과 다리를 길가의 돌이라도 던지듯. 아무렇게나 멀리 내던지고는 주머니에 차놨던 포션을 꺼내 들어 백진희의 팔과 다리에 부었다.
"그래도 팔 한 짝은 있어야 기어 다닐 수라도 있겠지?""왜, 왜…. 아니야…. 아니라고!!!"
흙바닥을 꿈틀거리며 백진희가 김성현의 바지를 놔주지 않자. 귀찮다는 듯 바지를 잡은 손을 발로 쳐내고는 뒤에 멘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손에 쥔 물건을 자랑이라도 하듯 백진희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었다.
"이게 뭔지 모르지? 인큐버스들이 모여 사는 몽마의 환락가로 갈 수 있는 특수한 스노 글로브야.""꿈이야…. 꿈, 꿈일 거야….""진짜 넌. 끝까지 멍청하구나. 이건 꿈이 아니야. 정신 차려."
백진희의 뺨을 스노 글로브로 툭툭 치며 장난치듯 말하던 김성현이 쓰러져 있는 백진희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 속삭였다.
"세계는 구해줄 테니까. 그때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버텨봐.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잖아. 아 참고로 마계의 하루는 현실에서는 1시간인 거 알지?""하, 하지 마…. 제, 제발 성현아…. 난 정말로 널 사, 사랑하는 거 알잖아….""그래. 당연히 날 사랑해야지. 그게 내 존재 이유인데. 그러니까 이것도 내 애정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세계를 구할 때까지 인큐버스들에게 몸이라도 대주고 있어."
억지로 스노 글로브를 백진희의 손에 쥐여준 김성현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백진희의 얼굴에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 세계는 한참 뒤에 구할 거니까. 너한테는 한 50년 뒤이려나? 할머니가 돼 있겠네 크크. 그전에 복상사로 죽으려나?"
눈물을 흘리며 현실을 부정하는 백진희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김성현이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널 지옥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항상 응원해줘. 알았지? 그래야 빨리 세계를 구할 마음이 들지."
그 말을 끝으로 백진희가 잡고 있던 스노 글로브가 발동되었고 빛과 함께 주변이 흑백으로 물들어갔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 백진희의 서늘한 손이 내 손을 포개는 것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는 뿌옇게 변한 시야로 나와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백진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김성현에게 공략당해 내가 아는 모든 진실을 말했어. 이 세계가 사실은 소설 속이고 너는 주인공이라고. 김성현은 처음에 혼란스러워했지만 나를 받아들여 줬고 나는 진심으로 김성현을 사랑했었어."
그렇게 말하며 상자 안에 다시 트페레밧의 봉을 넣고는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네주고는 말을 이어갔다.
"당시에 나는 내가 회귀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기에 김성현도 내가 회귀할 줄 몰라서 마지막에서야 본심을 드러냈고. 나는 몽마의 환락가에 떨어져 백치가 될 때까지 강간당했어.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입학식으로 돌아온 거고. 아마도 내가 죽었거나 김성현이 세계를 구하지 않아 돌아온 거겠지."
"미친 새끼…."
장난치듯 백진희를 몽마의 환락가로 보내는 김성현의 마지막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내 머리에 각인처럼 남았다. 희망을 주고는 마지막에 절망으로 떨어트리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걸까.
"나는 그 뒤로 김성현에게 공략당하기 직전에 자살하거나 아카데미를 자퇴하는 거로 김성현을 피하면서 살아왔어. 내가 다시 김성현에게 공략당하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비밀을 김성현에게 고백할 거고 김성현은 내가 복수할까 내 회귀를 막을 방법을 찾을 테니까."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백진희는 조금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내가 김성현에게 공략당하면 안 되는 이유를 조금 알겠니?"
"그럼 왜 김성현과 나를 기아스로 묶은 건데! 너는 안전하게 뒤에 있고 나는 앞에서 탱킹하라고? 이것 때문에 나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김성현이랑 섹스하고 싶어서 미치겠다고!!!"
내가 김성현에게 공략당해 팔다리가 잘린 백치가 되는 걸 원했던 걸까. 백진희를 노려보며 소리치자. 백진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붉은 실 기아스에는 그런 능력은 없어 아린아. 그건 너의 착각일 뿐이야."
"뭐? 웃기지 마."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어제부터 나는 김성현을 의식하기만 하면 온몸이 흥분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데.
백진희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붉은 실은 다른 기아스들처럼 의무 맹약 구속의 효과가 아니라. 운명 속에서 우연을 만들어주는 특수한 기아스야. 내가 너에게 기아스를 넘겨준 이유는 김성현과 너는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차라리 좋은 쪽으로 엮으려고 한 거였고."
"거짓말하지 마! 그럼 내가 발정 나는 이유가 뭔데. 김성현을 보면 미친 듯이 흥분되고 갖고 싶다고! 내 안의 짐승의 본능이 깨어나는데. 이게 기아스의 능력이 아니라고? 내가 그냥 발정 난 거라고? 김성현이랑 섹스하고 싶어서 기아스 핑계 대는 거라고 하는 거야?"
내 말에 백진희는 다시 손목에 있는 끈을 보여주며 거짓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며 말했다.
"신아린이 가진 아주 중요한 비밀. 그 이유 때문이야."
"...그게 뭔데."
내 물음에 고민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백진희에게 재촉하듯 노려보자.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김비서에게 갈증이나니 공장에 가야겠다고 연락해봐."
"갈증…? 무슨 말이야 그게."
"설명보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맞을 거야. 어차피 주기를 넘은 것 같으니. 갈증도 해결해야 하고."
백진희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모르는 신아린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백진희의 말대로 행동해야 했다.
"거짓말이면 후회하게 해줄 거야."
"아린이는 바보야. 자꾸 끈의 존재를 잊네."
쿡쿡대며 웃으며. 손목의 끈을 보여주는 백진희에게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꺼내 김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가씨.]
"갈증이 나서 그런데 공장에 가야겠어."
[아. 알겠습니다. 차기사님에게 이번 공장 주소 보내겠습니다.]
"...그래."
뭐지. 당연하단 듯이 대답하는 김비서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아린아. 갔다 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손목에 묶은 끈을 풀려다 백진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것도 내 계획의 일부야?"
"어떤 게?"
"지금 네 편으로 나를 회유하는 거."
"그렇다고 볼 수 있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계획이 도대체 뭔데."
내 질문에 백진희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손목의 끈을 풀고는 내 볼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속삭였다.
"비밀."
백진희가 손가락을 튕기자. 고블린들이 신나는 음악으로 바꾸며 몸을 뒤뚱거리며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
차기사님에게 연락하자 검은 리무진이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한참을 이동하던 차는 초월동을 벗어나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휴대폰을 확인하니. 나한테 욕한 걸 이제 와서 후회하는지 김성현에게 장문의 사과 메시지가 와있었지만.
김성현의 본모습을 본 이후라서 그런지. 김성현이 보낸 메시지를 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여자가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게 싫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처음부터 백진희를 가지고 놀려고 했던 걸까. 마음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도착했습니다."
생각에 잠겨있다 차기사님의 말에 정신을 차리니. 산속 깊은 곳에 정말 공장이 있었다. 외벽에 녹슨 자국이 보이는 공장은 조금 오래돼 보였다.
차 문을 열고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비서가 내 앞으로 달려왔다.
"아가씨. 준비 다 끝났습니다. 곧장 가시죠."
무슨 준비가 끝났다는 거지? 속으로 크게 당황했지만 일단 무표정을 유지하며 김비서의 뒤를 따라갔다.
끼기기긱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김비서가 공장문이 열었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자. 의외로 안은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이라 조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 안에는 몇몇 경비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장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내부에는 큰 컨테이너 같은 것들만 들어 있었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김비서의 뒤를 따라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가자.
화장실 같은 하얀 타일이 깔린 아무것도 없는 큰 방에 플라스틱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의자 옆에 서있는 김비서를 보고 눈치 있게 의자에 앉자. 김비서가 무전기로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들여보내."
네. 들어갑니다.
신아린의 비밀이 과연 무엇일까. 조금 들뜬 마음으로 다리를 흔들며 기대하고 있는 내 눈에.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큰 충격으로 다가와 그대로 몸을 굳게 만들었다.
팔다리가 십자가 모양으로 돼 있는 틀에 묶인 채 눈에 안대를 찬 나체의 사람들이 물건을 진열하듯 하나씩 내 앞에 세워졌다.
"오늘은 총 7명입니다."
김비서의 말에 멍하게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정신이 들어 김비서를 바라봤다.
내 시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김비서는 미소 지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순결한 처녀 4명과 동정 소년 3명입니다. 왼쪽부터 11살, 13살, 14살, 16살 처녀들이고 오른쪽은 13살, 14살, 14살 저 둘은 쌍둥이 소년입니다."
김비서의 설명에도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정육점의 고기처럼 투명한 랩 같은 것에 팔다리를 묶여 상품처럼 진열돼있는 소년·소녀들.
이게 내 비밀이라고…?
공황에 빠져 멍하니 있는 내 귀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니 왼쪽 여자애의 허벅지를 칼로 그어내고 있는 김비서가 보였다.
"뭐, 뭐 하는 거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자. 김비서는 허벅지를 베던 손을 멈추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아, 오늘은 직접 하실 겁니까? 죄송합니다. 저번에는 제가 손질하라고 하셔서…."
손질? 사람의 허벅지를 칼로 갈라 피를 내는 행위가. 손질이라는 단어가 필요한 말일까.
내가 말이 없자 의아한 표정을 짓는 김비서의 모습에 황급히 손짓했다.
"됐으니까 나가. 알아서 할 테니."
"넵.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김비서의 뒷모습을 보다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소녀를 보며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생각이 상황을 따라잡지 못했다.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어 백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아린아.]
"백진희. 이게 뭐야 씨발…."
[뭐가 아린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목소리에 화가나 소리 질렀다.
"씨발 내 앞에 왜 김비서가 사람을 상품처럼 포장해 내놓는 거냐고!"
내 화난 목소리에 휴대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원래 주기적으로 하던 거야. 아린아.]
"내가…. 뭘 했는데."
불안했다. 내 머리에 차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제발 틀렸기만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참지 마 아린아. 못 버티잖아.]
"무슨 개소"
방안을 채우는 피 냄새에 나는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마치 김성현이 옆에 있다는 것을 의식한 이후 몸이 흥분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내 안의 무언가가 소리쳤다. 참지 말라고.
짐승의 본능을 깨우라고.
더는 외면하지말라고.
무엇을?
이곳에는 내가 발정 날 김성현이 없을 텐데.
무엇을 참고 있다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도 흥분한것처럼 혼자 몸이 달아오른 걸까.
금방에라도 이성을 잃을 것 같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며 백진희에게 말했다.
"씨발…. 나 세뇌한 거지. 나를 속이려고 이곳에 보낸 거잖아. 김비서랑 차기사 세뇌해서!"
[아린아. 요정왕의 팔찌 차고 있잖아. 세뇌가 아니라는 거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웃기지 마! 시발!!! 그럼 뭔데 도대체!"
[뭐긴. 네가 마족이라는 증거지.]
백진희의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백진희의 말을 곱씹으며 내가 들은 말의 단어들의 뜻을 다시 한번 제대로 떠올리며.
내 눈은 본능적으로 소녀의 허벅지를 타고 바닥에 고이는 피를 보고 있었고.
내 코는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그 피에서 나는 냄새를 향기라도 되듯 폐 속 깊숙이 집어넣었고.
내 귀는 휴대폰 너머의 백진희가 건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네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이유야 아린아.]
그 절망적인 말에 나는 주인의 신호라도 받은 사냥개처럼.
놓지 말아야 할 이성을 충동적으로 놔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