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아주 오래된 기억
* * *
다시 내 귀에 들려오는 백진희의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웃기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왜, 왜 그런 거야 그러면…. 도대체 왜 여태까지 그런 거냐고!"
내 행복을 원했다면 김성현에게서 멀리 떨어트려 놓아야지. 왜 나를 김성현이라는 괴물의 아가리 앞으로 밀어놓은 건데.
내 인생을 무너트릴 가장 위험한 인물이 김성현인걸 모를 리가 없으면서.
"나는 너를 죽이려 한 적 없었어. 오히려 보호하고 있었지.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았어?"
"보호? 기한신에게 체벌 당해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나에게 포션을 부어주면서 더 때리라고 말하던 게?"
"그것도 너를 위한 거니까. 너의 행복을 위해서 내 양팔을 잘라야 했다면 그랬을 거야. 너한테 미움받더라도 필요한 일이었어. 우리의 목적은 같았잖아. 결과적으로 잘 풀렸고. 하지만 내가 조금 과격했다는 것은 사과할 게 충분한 보상도 해줄게. 그걸로도 성에 안 찬다면 나를 때려도 좋아. 다시 한번 미안해."
나를 바라보는 그 올곧은 눈빛에서 내 머리에서 멋대로 눈앞의 백진희 행동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백진희는 정말로 내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내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짓도 할 사람이라는 게 본능처럼 느껴졌다.
"미친 소리 하지 마…. 나를 김성현에게 너를 대신할 제물로 바친 거나 다름없어. 차라리 나에게 처음부터 모든 걸 설명해주고 도와달라고 했으면 됐잖아!"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진희는 테이블 위로 내 손을 잡으려 했기에. 테이블 밑으로 손을 피하자.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시선을 피하는 나를 응시하며 물어왔다.
"물어보고 싶었어. 너는 왜 김성현의 능력 각성을 막은 건데?"
"뭐?"
"김성현의 각성이 영또플의 프롤로그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그걸 알면서 왜 막은 거야?"
백진희의 백안이 순수한 호기심의 빛을 띠고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한서아 꼴이 될까 봐. 한서아처럼 김성현의 육변기가 돼서 매일 같이 김성현의 사랑을 받는 것만 목적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아서."
내 대답에 백진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며 노래 부르듯 말했다. 뒤의 연주 소리 때문에 더욱 그렇게 들린 것일 수도 있고.
"김성현이 이 세계를 구해야 하잖아. 김성현의 능력이 없다면 김성현이 구해야 할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고 세계가 위험할 수 있는 데?"
"내가 김성현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어. 너도 다른 소설들 봤으면 알잖아. 엑스트라로 빙의되었으면 주인공이 얻을 기연이나 유물, 정보들을 선점해서 주인공보다 더 강해져 새로운 주인공이"
"그건 불가능해 아린아."
내 말을 차갑게 자르며 백진희가 나를 응시했다.
"어째서."
"영또플의 주인공은 김성현이고.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것도 김성현뿐이니까. 그리고 네게는 큰 결격 사유도 있고."
"그럼 넌 왜 막은 건데!! 세계를 구할 김성현이 능력을 각성하는 걸 내가 막는데도 지켜보고 있었잖아. 아니! 오히려 나를 세뇌해 김성현이 동정을 잃지 않게 관리했잖아. 세계를 구할 생각이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 분노가 깃든 말에 백진희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의 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린아, 필연이라는 말을 알아?"
"알아. 무조건 일어나게 되는 우연 같은 거잖아."
내 대답에 백진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세계의 억지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누군가는 필연성이라고 부르는 운명이라는 것이 이 소설 속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 영또플의 [큰 흐름]대로 흘러가게끔."
목이 마른 지. 홍차를 한 입 마신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작은 흐름은 상관없어. 공략당했어야 하는 한서아나 소니아가 내 손에 죽거나. 네가 원래의 신아린과 다른 행동을 하거나. 그건 [작은 흐름]일 뿐이야. [큰 흐름]을 거스르지 못해. 중요한 건 [큰 흐름]. 영또플의 결말에 영향이 가는 일이 아니면 억지력과 필연성은 발동하지 않아. 하지만 김성현을 죽이거나 결말에 중요한 역을 하는 등장인물이 죽어버린다면 세계는 억지력을 동원해 다시 입학식으로 돌아가 버리는 거야. 원래의 [큰 흐름]을 지키려고 세계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을 초기화시킨다고 생각하면 돼."
백진희의 말에 내 회귀의 정체를 조금은 [이해]했다. 김성현을 죽이고 입학식으로 다시 돌아간 이유가 그거였구나.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벗어나는 일이 [큰 흐름]을 벗어나는 일이 되는 걸까?
"내가 아카데미에서 벗어나면 회귀하는 이유는 뭔데."
신아린이 반드시 아카데미에 있어야 하는 이유. 그게 무엇일까.
내가 모르는 영또플의 결말과 관련된 일일까?
내 질문에 천장의 밤하늘을 바라보던 백진희 시선이 내 얼굴로 내려왔다.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히죽거리며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보기 싫어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날카롭네. 역시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나를 김성현에게 제물로 바쳐 동정을 잃지 않게 하려 한 이유. 내가 아카데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영또플의 결말! 네가 아는 거 다 말해!!!"
더는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다니기는 싫었다. 정말로 아직도 믿기지는 않지만. 백진희가 나를 조금이라도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사실을 말해줬으면 싶었다.
내 말에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의 밤하늘을 보며 무언가 생각하던 백진희가 조금 슬픈 눈으로 시선을 내려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김성현에게 공략당하면 안 됐거든."
"너는 육변기가 되면 안 되지만. 친구라고 부르는 나는 육변기가 되도 상관 없다? 그게 지금 말이라"
백진희의 서늘한 손이 내 손등에 닿았다. 조금 흥분한 감정이 진정되는 느낌에 손을 뺄 수 있었지만, 그냥 놔두었다.
"조금만 진정해 아린아. 다 설명해줄 테니까. 김성현에게 공략당하면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이미 김성현에게 공략당한 경험이 있어서야."
"역시…. 너도 회귀자구나."
내 예상이 맞았다. 본래의 백진희는 검사. 하지만 지금의 백진희는 대부분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나 다름없었다. 의심하고 있던 당사자의 입에서 내가 생각한 진실이 나오자 조금은 만족감이 들어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맞아. 김성현에게 공략당하면 그 앞에서는 비밀이라는 게 사라지는 거 알지?"
"알아. 그래서 무서웠던 거니까."
마치 사이비 교주를 따르는 신도처럼. 김성현의 모든 행동을 믿고 거부하지 못하며 비밀이라는 것조차 없어진다. 김성현에게 자신의 인생을 부숴버릴 수 있도록 스스로 목줄을 걸어 손에 쥐여주고 싶어 안달 나게 되니까.
"내가 공략당하면 김성현은 진실을 깨닫고 너와 나를 반드시 백치로 만들어 회귀하지 못하게 만들 거야. 그 뒤에 우리가 다시 회귀해 자신을 방해하는 걸 막을 방법을 찾아내겠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김성현이 그럴 리가…."
백진희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저게 무슨 말이지? 김성현은 이 세계를 위해 희생하는 주인공이다. 지금의 김성현은 많이 부족하지만. 능력 각성 후 김성현이 그런 짓 벌일 리가 없을 텐데.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 들어봤을 거야. 끈 때문에 그런데 잠깐 따라올래?"
백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다른 테이블로 가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이상한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30cm 정도 돼 보이는 대리석 같은 흰 봉이 들어 있었다. 한쪽 끝은 붉은 보석이 한쪽 끝은 파란 보석이 붙어 있었다.
상자에서 흰 봉을 꺼낸 백진희는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당겨 내 옆자리로 옮긴 뒤 앉았다.
"트페레밧의 봉이라는 거야. 붉은 쪽은 기억을 보내고 파란 쪽은 기억을 받아들여."
백진희의 설명을 들으며 의자에 앉자. 백진희는 파란 보석이 박힌 쪽을 붙잡고 반대편의 붉은 보석이 박힌 쪽을 내게 내밀었다.
"트페레밧을 잡고 아무 기억이나 떠올려봐. 성능 확인은 해봐야지."
정말 그것뿐일까? 조금 의심하는 눈초리로 머뭇거리자 백진희가 자기 손목에 묶인 끈을 보이며 말했다.
"함정 아니고. 너 속일 생각도 없다니까?"
그 말에 봉을 잡아들었다. 무슨 기억을 떠올리지. 잠깐 고민하려는 찰나. 마치 흑백영화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의 색이 흑백으로 변하더니 공간이 변했다.
나와 백진희는 보건실의 침대 옆에 서 트페레밧의 봉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무언가 쩝쩝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내 앞에는 보건 선생님의 눈을 피해 격렬한 키스를 하는 나와 김성현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백진희가 보이지 않는지. 열심히 혀를 휘감으며 본능적으로 서로의 몸을 만지는 짐승 같은 모습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아니야 이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무의식중에 떠올린 걸까. 부끄러움에 황급히 손을 저었지만, 백진희는 장난기 섞인 시선으로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웃었다.
"행복해 보이네~ 완벽한 커플이야."
"닥쳐."
백진희에게 쏘아붙이고 나에게 고개를 돌리자. 미친 듯이 혀를 휘감고 있는 모습에 황급히 백진희에게 소리쳤다.
"이거 언제 끝나는데!"
"잡은 봉을 놓기만 하면 돼."
황급히 봉을 놓자. 다시 주변이 흑백으로 변하더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성능은 확인했으니. 원한다면 내 기억을 보여줄게."
백진희의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떤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영또플의 결말? 김성현의 각성 후 모습?
흥분으로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백진희가 내민 파란 보석이 박혀 있는 곳을 잡았다.
*
"성현아. 사랑해. 정말로 나는 너밖에 없어."
곧장 내 눈에 들어온 건 여태까지 봤던 남자 중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의 품에 안겨 고개를 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백진희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저게 김성현이겠지. 어떻게 그 시골 똥강아지 같은 김성현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는게 더 설득력 있다.
아까의 일을 복수하고자 백진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진희의 모습에 장난기를 지우고 다시 김성현과 백진희를 바라봤다.
"나도 사랑해. 진희야."
아.
김성현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한 번 놀랐고. 진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꿀이 떨어지는 듯한 시선으로 꼬옥 안아주는 모습에 묘한 불쾌함이 들어 다시 한번 놀랐다.
내 안을 채우는 이상한 감정에 관심을 지우고 백진희가 보여주는 기억에 집중했다.
김성현에게 푹 빠진 듯 보이는 백진희는 김성현과 여러 일을 했다.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김성현과 함께 마인들과 싸우고 다치고 피를 흘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백진희와 김성현의 모습은 정말로 선남선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잘 어울리는 이상적인 커플이었다. 공간이 바뀌고 내가 모르는 거대한 산들이 둘러싸인 곳에서 김성현과 백진희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일만 끝나면…. 아마도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까?""...차라리 세계를 구하지 말까?"
김성현의 말에 백진희가 가슴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김성현을 바라봤다.
"안돼. 너 아니면은 세계를 구할 사람은 없단 말이야.""그렇지만 아무도 모르잖아. 그리고 세계를 구한 대가로 너를 잃는 건 나한테는 손해잖아.""이미 몇 번이나 얘기 끝난 거잖아 성현아. 나는 원래 살던 삶이 있어. 나도 정말로 너와 함께 있고 싶지만…. 모두를 위해 이게 해피엔딩이야. 세상을 구해줘 성현아."
그 말을 한 백진희가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리자. 김성현은 아무 말 없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아.""나도…. 그래. 어디서든 너를 그리워할 거야. 반드시 네 곁에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 널 정말로 사랑하니까. 나 믿지?""알았어…. 나도 사랑해 진심으로."
한참을 서로의 체온을 나누던 둘이 시선을 마주치고 긴 입맞춤을 하고 몸을 떼었다. 그 모습에 가슴 한편이 이유 없이 답답했다.
"가자. 세계를 구해야지."
백진희가 김성현의 손을 잡아끌고 앞장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백진희의 등 뒤에서 슬며시 검을 꺼내 드는 김성현의 모습에 묘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불안한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툭
"끄윽!! 끄아아악!"
김성현의 검에 오른팔이 잘린채. 바닥에 피를 뿌리며 쓰러진 백진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이, 이건…."
내가 놀라 고개를 돌려 백진희를 바라보자. 백진희는 분노를 참는 듯 입술을 깨물다. 결국, 눈앞의 장면을 보기 싫은지 떨리는 눈을 감았다.
"끄흑…. 헉... 성, 성현아 도, 도와줘….""내가 왜?""성, 성현아…. 이, 이게…. 왜…. 왜…."
김성현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백진희에게 또다시 검을 내리쳤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흐으아악!!!""아, 움직이니까 오른쪽이 좀 더 길게 잘렸잖아. 가만히 있어 봐 대칭을 맞춰야지."
김성현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뜨다 보게 된 광경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무릎 위로 다리가 잘린 백진희가 남은 한 손으로 김성현의 바지를 붙잡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김성현은 웃으면서 다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리에 검을 내리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장면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고개를 돌린 내 시선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는 백진희에게 닿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