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설득
* * *
"아린"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김성현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더는 내 이성이 보내는 경고에 이 행복을 참을 수는 없으니까.
당황한 김성현이 입술을 다물고 있어. 입술 사이로 혀를 넣어 앞니를 혀로 툭툭 치며 신호를 보내자. 그제야 김성현은 눈치채고 입을 벌려 혀를 휘감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의 갈증을 해소하듯 혀를 통해 전해지는 타액을 맛있다는듯이 삼키며. 머리를 가득 채우는 황홀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들뜬 숨소리를 내었다.
잃어버린 아주 소중한 것을 되찾은 듯한 충족감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라 기분 좋은 소름이 들었다.
되찾았어. 성현이.
혹시 소리가 들릴까. 조심스럽게 혀를 움직이면서도. 성현이를 끌어안아 내 몸에 밀착시켰다.
따뜻한 성현이의 체온.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딱 좋아.
그동안 참았던 것을 보상받기 위해 키스를 멈추고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덜미에 파묻고 성현이의 체취를 크게 들이마셨다.
뇌가 달아 오르는듯한 행복. 이렇게 좋은 걸 참고 있었다니. 이런 걸 참고 있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다.
"아린아. 몸 괜찮은 거지?"
걱정하는 성현이의 목소리에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고 다시 키스했다. 혀뿐만이 아니라 입술에 닿는 성현이의 윗입술이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입술을 떼고 성현이를 열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하고 싶어."
"..어?"
자신이 떠올린 음흉한 생각이 맞는지. 반신반의하며 멍한 표정으로 되묻는 성현이의 턱에 뽀뽀하며 유혹하듯 속삭였다.
"너랑 하고 싶다고."
누가 뒤통수를 때리기라도 했는지.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던 성현이의 목을 살짝 깨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내 손을 잡아 나를 침대에서 끌어당겨 자신의 품으로 안아 들었다.
"진, 진짜지?"
"나…. 이제 안 참을래. 사랑해 성현아."
"나, 나도 사랑해 아린아. 진짜로 사랑해!"
눈을 동그랗게 뜬 성현이는 나를 꽉 끌어 안아주었다. 품에서 나를 떼고서는 급한 표정으로 내 손을 붙잡고 보건 선생님에게 인사한 뒤.
황급히 보건실 문을 열고 나오니 그곳에는 백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가 예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안녕. 아린아."
"..백진희."
백진희의 백안과 시선을 마주하자.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식은 느낌이 들었다. 뱀 앞에 놓인 쥐의 심정일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오그라든 것처럼 피가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걱정했어 아린아. 많이 아픈 거야?"
정말 친구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무엇이 백진희의 본모습일까.
다른 사람 앞에서 친구인 척 구는 모습일까. 아니면 나를 조종하고 괴롭히면서 아무런 죄책감 없는 모습일까.
백진희라면 그 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데 나랑 아린이랑 급히 갈 데가 있어서 그런데 나중에 얘기할래?"
여태까지 참아왔던 섹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성현이는 급한 표정으로 백진희에게 말했지만. 백진희는 나만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나도 급해서 말이야."
"야. 바쁘다는 말이 뭔지 몰라?"
성현이가 조금 짜증을 내자. 그제야 백진희의 백안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성현이의 얼굴로 옮겨갔다.
"꺼져. 김성현."
"이게 진 크허억!!"
화를 내던 성현이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숨을 쉬기 힘든지 목을 잡고 꺽꺽대는 모습에 황급히 성현이를 붙잡고 백진희에게 소리쳤다.
"그만해!"
"...알았어."
그제야 성현이는 발작을 멈추고 백진희를 죽일 듯 노려봤다. 나도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백진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백진희. 원하는 게 뭐야."
내게 다가와 성현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아린아. 영또플이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 작은 말이 가져오는 충격은 매우 컸다. 나는 누가 머리에 다시 몽둥이를 휘두른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백진희가 영또플을 언급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했기에. 멍청한 눈으로 백진희를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나갔다.
백진희의 뒷모습만 멍청히 바라보며 얼른 뇌가 깨어나길 빌고 있을 때. 일어선 성현이가 내 팔을 잡고 급하다는 듯 재촉했다.
"신경 쓰지 말고 가자. 근처에 비어있는 창고 있을"
"미안해 성현아. 다음으로 미루자."
이미 몸의 흥분은 짜게 식었다. 백진희는 말 한마디로 내 안의 모든 관심사를 김성현에서 자신으로 바꿔버렸다.
당장에라도 백진희를 따라가 묻고 싶었지만 성현이의 손이 나를 놔주지 않아. 돌아보며 말했다.
"진희랑 대화 좀 할 테니까. 이따 학교 끝나고…."
급하게 말하며 팔을 잡은 손을 뿌리치려 하자 성현이는 화를 내며 내 팔을 땅에 던지듯 뿌리쳤다.
"아 씨발 진짜."
"...뭐?"
방금 들은 욕설이 나를 향한 게 진짜인가 싶어 되물으니. 성현이는 짜증 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따지듯 말했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섹스하자며. 하고 싶다며."
"지금 수업 중이잖아. 그리고 학교 끝나고 하면 되잖아."
"...또 그러다가 안 하려는 거잖아. 한두 번이야?"
성현이가 의심하는 목소리로 눈을 좁히며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하지 말든가."
나도 그 태도에 화가나 짜증을 내며 백진희의 뒤를 따라갔다. 뒤에서 무어라 김성현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어느덧 복도 끝에 다다른 백진희를 황급히 뒤쫓았다.
"어디…가는 거야."
백진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며 물었지만. 나를 돌아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한 번을 짓고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백진희를 따라 올라간 곳은 8층. 초월 아카데미의 비밀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들어오는 방법은 알지?"
중앙 복도의 큰 거울 앞에서 나에게 뒤돌아 생긋 웃고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비밀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황급히 백진희를 따라 몸을 움직인 다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2걸음 걷자. 등을 스치는 부드러운 천이 느껴졌다.
비밀의 방은 전의 모습과 그대로였다. 붉은 벨벳으로 꾸며진 벽. 뻥 뚫린 천장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들.
그 중앙에 놓인 크림색의 멋드러진 침대와 갖가지 판타지스러운 마법 물건들.
그 판타지다운 광경이 새삼 내가 소설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줬다.
"마실 것 내올게. 편히 쉬고 있어 아린아."
백진희는 연신 즐겁다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의자를 가리켰다. 언제라도 백진희가 돌변해 나를 죽이려 들지 모른다는 공포에 두려운 줄 알았는데. 나는 오히려 조금 흥분하고 있었다.
백진희가 영또플을 언급한 것으로 호기심이 공포를 이긴 걸까? 백진희가 굳이 내게 영또플을 언급한 거로 보아 나와 싸우려는 게 아닌. 대화하려 할지 모른다는 [이해]가 작용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한 것도 있었다.
"...홍차 괜찮지?"
멀리서 노래하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까지 들었던 진희의 목소리 중에서 가장 밝으며 즐거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이게 원래의 백진희일까?
"아무거나 괜찮아."
"응. 제일 좋은 거로 가져갈게. 기다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봤다. 밤하늘의 별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했다. 별들을 바라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백진희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여기서 내가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무엇일까. 어떤 사실을 들려주고 어떤 거짓을 말할까. 머릿속으로 계획을 점검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들려오는 트럼펫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큰 쟁반에 먹을 것이든 그릇과 마실 것이든 잔을 들고 오는 백진희의 뒤에 마치 재즈바라도 되는 것처럼 고블린같이 생긴 것들이 각자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보였다.
"고블린 맞아. 난 직접 듣는 게 좋거든."
"...고블린도 세뇌한 거야?"
조금 어이가 없어 물어보자. 백진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유물로 조종하는 고블린인데. 전투력이 낮아서 잡일 시키고 있어."
당연하단 듯이 말하며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내 앞에 홍차가 담긴 잔을 혹시 흘릴까. 조심스럽게 놔두는 백진희의 모습에 조금 기가 찼다.
"너….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내 말에 백진희는 미소만 짓고는 홍차를 마시며 고블린이 연주하는 곡만 들었다. 그 불편한 침묵에 홍차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백진희가 서늘한 백안으로 나를 바라보다 팔찌로 시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요정왕의 팔찌. 꽤 괜찮은 유물이야."
"...알고 있었구나."
조금 충격적인 말에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내가 자신의 세뇌에 벗어난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가만히 있던 거지?
"걱정하지 마 아린아. 너를 죽이는 건 아까도 충분했으니까. 그냥…. 솔직한 대화가 하고 싶었어."
"나를 죽일 수 없는 건 아니고…? 입학식으로 돌아갈까 봐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생각한 가설을 바탕으로 비꼬듯이 말하자 백진희는 농담이라도 들은 지 피식거리며 웃었다.
"아린아, 나는 항상 너의 평생 친구가 되고 싶었어. 진심이야."
"웃기지 마! 나를 세뇌하고. 나를 멋대로 김성현을 사랑하게 세뇌해놓고? 기한신에게 몸이라도 대주라는 말을 해놓고 친구? 네가 생각하는 친구는 다루기 쉬운 하인 같은 거는가 보네?"
백진희의 말에 화가 났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큰 죄책감을 느끼고 성현이에게 애원하듯 매달리고 사과하고 몸을 내주었던가. 내 첫 키스는 끔찍했고 상처로 남았는데.
친구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진심으로 친구라고 생각했다면 그딴 짓은 안 했을 거야. 아니, 못했지 친구니까!"
내 분노에 찬 목소리에 백진희의 눈이 조금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다.
정말로 내 말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게. 또 다른 흉계를 꾸미는 것 같아서.
나는 본능적인 경계심을 풀지 않고 백진희를 노려봤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너에게 말 못 할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 내가 네가 모르는 곳에서 얼마나 너를 위해 노력했는지 알면…."
"닥쳐! 넌 그냥 나를 조종해서 김성현의 육변기로 만들고 너는 안전해지고 싶었던 거잖아!!!"
홍차가 담긴 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카펫 위로 떨어진 잔이 뭉툭한 소리만 내며 뒹굴었다. 조금은 깨지는 걸 바랬는데. 드라마처럼 극적인 거와 나는 맞지 않나 보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거 알아. 나를 믿을 수 있게 해줄게."
백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래돼 보이는 갈색의 서랍을 열어 은색의 끈을 가져와 자리로 돌아왔다.
"거짓말의 신인 헤르메스의 유물이야. 진실의 끈이라고 불러. 이걸 서로의 손목에 묶으면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
자기 손목에 끈을 묶으며 말하고는 내게 끈을 내밀었다.
또 나를 세뇌하려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끈을 바라보자 백진희는 애원하듯 나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속임수도 계략도 아니야. 내게 믿음이 없다는 건 알지만. 이번 한 번만 믿어줄래?"
그 진심 섞인 목소리에 마지못해 내민 끈을 잡아 들었다. 힘겹게 왼손으로 내 오른팔에 묶었다. 왼팔에는 요정왕의 팔찌를 차고 있어 혹시 모를 일을 방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유물이 진짜라는 걸 믿게 해줄게. 내게 거짓말 한번 해볼래?"
백진희 말에 `너를 용서해`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입안에서 목소리가 증발한 듯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만 붕어처럼 뻐끔뻐끔하며 백진희에게 거짓말들을 내뱉어봤지만 정말로 진실만 말할 수 있나 보다.
"...널 죽이고 싶어."
내 진심은 이렇게 내 입에서 당연하단 듯이 흘러나와 백진희에게 닿았으니까.
그 말에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백진희가 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황급히 거짓말을 뱉어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사라졌다.
이럴 수는 없어. 분명 백진희가 이 끈에 무슨 짓을 한 걸 꺼야.
예를 들면 저쪽으로 묶은 사람만 거짓말을 할 수 있다거나.
"이거 너만 거짓말 할 수 있는 거지?"
내 의심 섞인 질문에 백진희는 계속되는 의심에 지친듯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로 그런 거 아니야."
"내가 그쪽으로 묶을래. 확인해봐야겠어."
내가 의심을 풀지못하고 끈을 풀어 내밀자. 백진희도 자기 손목에 감은 끈을 풀어. 내게 내밀었다.
다시 끈을 묶고 백진희에게 거짓말을 내뱉어보려 시도했으나. 역시 아까처럼 붕어처럼 뻐끔거릴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린아."
내 귀로 들려오는 백진희 목소리에 귀를 막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게 진실이라고? 거짓말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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