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55화 (55/160)

〈 55화 〉 생각

* * *

정신을 차린 임유모가 연신 구역질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 급히 달려와 등을 두들겨주셨다. 한참이 지나 구역질이 멈추자. 차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침대까지 나를 옮겨 눕혀주고는 약까지 먹여주셨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요."

"고마워 임유모."

문을 닫고 나가는 임유모의 뒷모습을 보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을 침대 위로 가져왔다.

복잡한 머리 때문에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릴 것 같았다.

한참을 바탕화면을 바라보다 메모장을 켜. 여태까지 내가 했던 일과 백진희에게 세뇌당한 것들을 정리해봤다.

가장 처음. 내가 이 소설 속 세계에 들어와 한 일.

김성현이 소니아에게 동정을 떼이는 일을 막은 근본적인 이유.

김성현의 육변기가 되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인 이유가 제일 컸다. 김성현에게 공략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영또플을 좋아하던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각성한 김성현을 같은 남자로서 좋아했다. 처음에는 섹스에만 집착하던 힘센 꼬마였던 주인공의 모습에 단순히 여자 가슴이 만지고 싶어 눈만 마주친 여자들에게 무조건 고백하던 내 철없던 중학생 때가 떠올랐으니까.

점점 사랑을 배워가고 악인, 마인들과 싸워가며 정신적인 성장을 이뤄내 미성숙한 꼬마가 성장하여 어른이 된 것.

마침내 자신이 아닌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또는 다른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희생을 하며 세계를 위해 싸우는 모습이. 정체돼있는 내 삶에 `김성현`이라는 주인공을 몰입해. 나 자신도 성장한듯한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줬으니까.

남자인 내가 여자가 되어 김성현에게 공략당해. 김성현 전용 육변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동성애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소니아와의 섹스를 막았다기보다는.

각성한 김성현이 처음 공략했던 한서아와 같은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작은 키를 가진 예쁜 보호 해주고 싶은 소녀 같은 이미지의 한서아는. 김성현이 처음 [공략 플래그의 달인] 능력을 깨우치고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단순히 복도를 지나가는 예쁜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성현의 첫 공략 목표가 되어 김성현만을 사랑하게 되는 육변기가 된 히로인이다.

차츰차츰 김성현에게 공략당해 생존 실습 때 처녀를 잃고. 그 뒤로 김성현의 섹스 테크닉 용도로 성적 호기심을 채우는 육변기처럼 조교 되어 살아가게 되는 한서아.

본래였다면 열심히 수련해 좋은 영웅이 되어 아픈 동생의 치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단순히 김성현의 능력 테스트용이 되어. 자기 삶의 목적을 잃고 김성현만을 사랑하게 되는 육변기가 되어버렸다.

사실 나는 백진희 코인을 타기 전 한서아를 좋아했다. 김성현과 처음 섹스한 첫사랑과 같은 관계였으니. 모쏠인 나한테는 당연히 `처음 관계를 맺은 소중한 인연`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에. 당연히 김성현이 한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성현은 소니아를 공략하자 한서아를 그대로 내버려둬 버렸다. 자신의 하고 싶었던 섹스 플레이를 하기 위해 매일 거대한 딜도로 억지로 자위시켜 작은 보지를 넓히고. 평상시에 엉덩이에 딜도를 꽂으며 언제든지 후장섹스를 할 수 있게 관장시켜 원할 때마다 화장실에 끌고 가 범하는 육변기로 만들어놓고서는.

소니아의 공략 이후 김성현은 한서아의 존재를 잊은 듯. 소니아와 섹스하는 것에 몰두했고 한서아는 독자들에게 `훈련용 허수아비` `한공기` `한토리얼` 이라는 별명과 함께 놀림감이 되었다.

작가도 한서아라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없는지. 영또플에 나오는 분량이 그 뒤로는 손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김성현이 자신의 육변기들에게 계급을 매길 때 최하위 계급으로 한서아를 배정해. 위 등급인 소니아가 매일 같이 한서아를 괴롭힌다거나.

변태가 된 한서아가 이제 영웅이 되어 동생을 치료하고 좋은 영웅이 되고 싶다는 꿈은 잊은 채 훈련과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김성현의 마지막 명령대로 매일 같이 자위와 자신의 후장에 딜도를 넣느라. 성적이 곤두박질쳐 유급을 당할 뻔 한걸. 소니아가 도와줬다는 언급만 있었다.

김성현은 그런 소니아에게 `육변기 관리 잘했으니 포상주지!`라며 소니아에게 상으로 질내사정을 해주며 독자들의 웃음을 샀지만.

나는 묘한 슬픈 감정을 느꼈다. 다른 독자들이 단 댓글의 즐거운 분위기 때문에 한서아가 불쌍하다는 댓글을 달지 못했지만.

한서아의 무너진 삶이 김성현에게는 단순한 테스트였다는 생각에 몇 일 동안 소설을 보지 못하기도 했다.

한서아에게 본래 관심이 없던 김성현은 다른 히로인들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한서아는 그 뒤로 영또플에서 언급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런 한서아와 같은 꼴이 될까 싶어 두려웠다.

사랑임을 착각하고. 매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삶이 망가져 가는 것을 사랑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내가….

[하렘 아카데미물]이라는 게 그렇다.

내가 주인공으로 빙의했다면 좋다고 여자들을 따먹으며 나만을 바라봐주는 여자들에게 정복감과 행복을 느꼈을 테지만.

내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여러 여자들 중 1명이 된다는 사실은 당사자로서는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 주인공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며 매일 같이 내 위치에 대한 절망과 주인공에 대한 그리움뿐일 테니.

김성현이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나는 김성현이 나를 바라보기를. 안아주기를. 기다리며 혼자 끙끙대며 아무것도 할 수밖에 없는 육변기가 되는 것이다.

다른 좋은 남자를 만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그저 김성현이 큰 자지로 내 보지를 꽉 채워줬으면 좋겠다는 음란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병신이 되는 거다.

그게…. 나는 싫었다. 가해자는 좋지만, 피해자는 싫은 개인주의. 비겁하다 내로남불이다 욕해도 어쩔 수 없다.

내 삶의 목적이 김성현의 자지가 된다면 자살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난 그런 사람이니까. 내 이득이 될 때만 행동이 빨라지는 이기적인 타입.

그래서 김성현의 각성을 막았고 처음엔 독자의 위치로 안전하게 김성현을 지켜볼 생각이었지만.

나는 김성현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세계를 구할 `주인공`의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김성현을 죽이기로 하기도 했고 실제로 죽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인지하지 못한 어느 순간부터. 이해 못할 거대한 죄책감에 짓눌려 김성현에게 끌려다녔다.

아마도 그전부터 백진희가 나에게 세뇌를 걸었던 게 아닐까. 추론할 뿐.

백진희.

영또플에서 나오던 백진희와 지금의 백진희는 같은 얼굴에 다른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영또플속의 백진희는 자신의 라이벌인 신아린에게 이기고 싶어 피나는 노력을 하는 천재노력충이다.

처음 신아린이라는 벽에 막혀 좌절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깨워 당당하게 신아린의 라이벌이 되는 설정.

하지만 지금의 백진희는 노력하는 모습은 없다. 그저 당연하게 강하고. 당연하게 무엇이든 해결해버린다.

실패하고 좌절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는 백진희는 없다.

원래의 백진희라면 하지 않을 행동까지 스스럼없이 한다.

거기에 백진희가 말한 `설정`이라는 말.

영또플안에서 캐릭터에게 작가가 만들어준 캐릭터의 기본 `설정`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내 가설이 맞았다면 백진희는 김성현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다.

나와 같은 회귀가 가능한 빙의자인 가능성이 매우 큰 괴물.

마치 이 세계의 마지막 보스처럼. 자신만의 큰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계획의 `변수`이자 백진희에게 중요한 인물인 것 같다.

백진희는 나를 왜 조종했을까. 의문이 든다.

김성현의 동정을 졸업 전까지 지켜내라는 세뇌를 건 것을 보면. 나처럼 김성현이 능력을 각성해 자신을 공략할까 걱정하는 것 같은데.

굳이 나를 세뇌해서 조종까지 해야 했을까? 차라리 나에게 진실을 말하고 협력을 구하는 게 더 나았을 텐데.

무언가 숨겨진 내막이 있을 것 같다. 지금의 백진희는 뒤에서 사건들을 조종하는 흑막.

각성하지 못한 김성현이 기한신을 죽일 정도로 강해진 것도. 내가 김성현에게 기아스를 사용하게 한 것도.

백진희가 꾸미는 계획 중의 일부일까.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마에 열이 나는 게 뇌가 과부하에 걸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멈추면 안 됐다. 당장 내일 백진희를 아카데미에서 만나야 했으니까.

백진희에게 진실을 얘기하면 어떻게 될까. 세뇌에서 풀렸다. 네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뭐냐.

나를 조종하던 백진희라면 구구절절 설명해주며 나를 설득하기보다는 팔찌를 빼앗거나 나를 죽이려들 확률이 더 높았다.

그렇다면 백진희가 원하는 김성현이 졸업 전까지 동정상태를 유지한다는 계획을 부숴버린다면?

김성현의 육변기가 될 가능성은 있지만. 김성현이 각성한다면 여자인 백진희는 공략당할 것이고 비밀을 내뱉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김성현에게 내 비밀을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니 이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입학식으로 돌아간다면? 팔찌가 없으니 곧장 백진희에게 다시 세뇌당하겠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이다.

진퇴양난이다.

회귀는 배제. 김성현의 동정은 유지해야 하며 백진희의 세뇌를 견제해야 하고 언제 미쳐 날뛸지 모를 조민성의 비위도 맞춰줘야 했다.

"씨발…."

소주가 간절했다. 노트북을 닫고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칠격.

마인사냥 집단이자. 개개인의 무력이 S급 영웅과 비견될 정도의 강함. 그리고 차성이라는 재력을 이용할 수 있는 곳.

일단 최우선으로 미뤄뒀던 일부터 하나씩 처리해야 했다.

조민성을 새로운 주인공으로 세울지. 지금이라도 이 세계를 위해 김성현에게 몸을 대줄지.

아직은 마음이 결정되지 않았으니까.

제일 우선순위의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김성현의 동정을 노리는 소니아를 죽이는 것.

휴대폰을 들었다.

[간만입니다. 고객님.]

알펜시아의 목소리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인을 사냥할 시간이다.

***

"아린아~"

언제나처럼 교실에 들어서자. 나를 반기며 안겨드는 백진희의 모습에 긴장을 숨기고 최대한 밝게 미소를 지었다.

"진희야~좋은 꿈 꿨어?"

잡다한 얘기를 하며 자리로 가는 동안. 나는 눈앞의 백진희가 정말로 연기를 잘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에게 차갑게 말하며 세뇌하던 백진희의 모습과 지금 평범한 친구처럼 대하는 모습의 괴리감은 극심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무서웠다. 언제든지 웃으면서 돌변해 내 목을 찌를 것 같았으니까. 재밌어하며 한서아의 엉덩이를 바늘로 거리낌 없이 꾹꾹 찌르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안녕…. 성현아."

김성현을 보자 본능적인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아내고 인사를 건넸다.

"으, 응. 잘 잤어?"

"응."

다행인 점이라면 백진희의 세뇌 때문에 성현이의 집에 찾아가 여동생을 죽인다며 협박한 일 때문에 김성현이 나를 `얀데레`로 의심하고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랄까.

세뇌당한 연기를 위해 이 쓰레기 같은 놈에게 키스를 안 해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위로가 되었다.

소니아를 죽이고 칠격의 신용을 받아 백진희를 마인으로 몰아 죽이는 것.

그게 지금 내 계획이었다.

평범함을 가장하며 성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불안한 모습으로 연신 좌우를 살피며 덜덜 떨면서 내게 무언가를 내미는 한서아의 모습이 죄책감을 들게 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뭐야 이게?"

"그…. 간식…. 준비하라고…."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김성현이 내 옆에서 눈치를 보며 나와 한서아를 살피는 게 머리를 터트리고 싶을 정도로 역겹게 느껴졌지만.

진희가 보고 있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침부터 열심히 준비했는지. 한서아가 건네준 찬합통을 열자. 과일들을 예쁘게 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준비하려 얼마나 빨리 일어났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과일 하나를 집어 먹은 백진희가 "맛없어"라고 말해 황급히 미간을 구겼다.

"이런 쓰레기를 간식이라고 준비한 거야?"

내 말에 덜덜 떠는 한서아의 모습에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싶은 죄책감이 들었다.

"오늘도 혼내야겠네~"

진희의 말에 한서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작은 소녀를 괴롭히는 건 상당히 기분이 좆같은 일이기 때문에.

나는 화를 내며 급히 한서아를 교실에서 내쫓았다.

"남들 보기 전에 갖고 꺼져. 나중에 부를 테니까 찾아오지 말고."

울먹거리며 한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찬합통을 다시 들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 작은 뒷모습을 나는 한참을 바라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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