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수복
* * *
"이제 기숙사에 들어가면 자기 전까지 항상 붙어 있을 수 있겠다. 좋지 성현아?"
[으, 응. 좋지….]
내가 들어갈 1인 기숙사에 새로 실내장식과 가구들을 들여놓는 일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내일까지는 원래 살던 집에서 생활해야 했다. 얼른 성현이랑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계속 붙어지내고 싶은데.
"아, 좋은 소식 있어 성현아."
[뭔, 뭔데?]
"성현이 부모님 더 좋은 곳에서 지내라고 이사 보내드리게."
지금 성현이 부모님이 사는 집은 좁기도 했고 성현이가 또 집으로 도망칠 수 있으니. 멀리 보내놔야 다른 곳으로 못 도망갈 것 같았다.
"조금 먼 곳이지만 그곳에서 있는 차성 계열사에 좋은 자리도 알아봤어. 지금보다 돈도 많이 버실 거고 일도 편하실 거야."
[그치만 그건….]
"고마워하지 마. 내가 그동안 신경 못 쓴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해주는 거니까. 방학 때는 지금 내가 사는 집에 같이 있으면 되니까 걱정 말고."
[...알았어.]
나한테 잘못한 일 때문에 고분고분해진 성현이가 귀엽게 느껴졌다. 말 잘 듣는 시골 똥강아지 느낌이랄까?
오늘 데이트 동안에도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 워낙 귀여워 볼을 깨물어주고 싶었다.
"내일은 우리"
휴대폰 통화가 끊겼다. 뭐지? 화면을 확인하니 처음 보는 서비스 제한지역이라는 이상한 문구가 떠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다시 껏다 켜보고 있는데. 밖에서 쿵 하는 무언가 쓰러지는듯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임유모?"
크게 소리를 질러봤지만 들려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침대에서 벗어나 문을 열었다.
항상 조명이 켜져 있던 복도가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에서 보면 이럴 때 나처럼 겁 없이 확인하려 드는 주인공에게 귀신이 튀어나오던데.
"임유모? 차기사님?"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대답해주는 분들이었는데. 고요한 적막이 알 수 없는 공포를 일으켜. 친숙하던 집안의 모습을 두려움으로 바꿔냈다.
휴대폰의 손전등을 켜고 복도를 걸으니.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내 발소리가 무척 크게 느껴졌다.
"임유"
멀리 테이블 밑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조심스레 다가가자. 갑자기 복도의 불이 밝혀졌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감았다 뜨자. 복도의 끝.
조민성은 악몽처럼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 조민성."
바닥에 쓰러져있는 임유모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눈앞에 있는 조민성이 존재가 내 이성을 두려움으로 좀 먹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지? 칠격이 내 방에 무단으로 들어와 보고서를 놔두고 갔을 때부터.
불안한 마음에 보안을 몇 배는 강화했는데….
"약속 지키러 왔는데 말이야."
"무,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경계심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자. 조민성은 코를 긁으며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거참. 어디서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나가. 여긴 내 집이야."
내 말을 비웃으며 조민성은 허공에 손을 들었다. 그 손위로 파란 구체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 파란 구체안에 손을 집어넣자. 마법 주머니라도 되는지. 특이한 모양의 팔찌가 조민성의 손에 딸려 나왔다.
"요정 왕의 팔찌. 구하는데 힘들었어."
조민성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조민성은 나를 강간하려 했던 강간미수범.
당장에라도 도망쳐야 했다.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리려 하자.
그 모습을 본 조민성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내 주변에 푸른 선이 생기더니 마치 사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몸을 휘감아 속박시켰다.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장난치듯 팔찌를 공중에 던지며 다가오는 조민성의 모습이. 내게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에게 다가오며 험악한 미소를 짓는 사형집행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오, 오지마!"
"겁내지 마. 안 잡아먹어."
미소를 지으며 내 앞까지 다가온 조민성은 몸을 기울여 내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궁금하네. 깨어난 너는 어떤 모습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친 짓 그만하"
"일할 시간이야. 깨어나 파트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내 왼 팔목에 강제로 팔찌를 채웠다.
두려움에 팔을 휘둘러 반항하고 싶었지만. 온몸이 속박되어 팔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
"■■?"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조민성의 얼굴이 흐려졌다.
내 목소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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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떠졌다. 아주 오랫동안 깊은 잠에 빠진 듯한 탈력감과 무기력함이 머리를 짓눌렀지만. 깨어났다는 사실에 조금씩 머리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조각났던 기억들이 퍼즐처럼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덧대어져 있는 기억들에 녹아들어 기억의 혼돈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기한신한테 몸이라도 대주고 있는 게 어때?""아직도 죄책감을 사랑으로 바꾸고 있었구나? 먼저 한 말을 우선시 하는 건가?""아린아. 잘 들어. 다시 처음부터 하자. 너는 성현이만 사랑해. 네가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다 성현이를 위한 거야.""그래, 내 계획에 변수는 너 하나로 충분해.""당연하지~ 아린이 너는 내 소중한 평생 친구라고.""항상 고마워. 아린아."
■■■
"...영원한 사랑.""정말로, 정말로 좋아해 아린아.""좋아. 어쩔 수 없지. 너가 그리 원하니 나도 영원히 널 사랑할게."
□□□
"사랑해 성현아.""우린 영원히 사랑할 거야."..."저, 저는 한서아입니다…. 저, 저는 김성현을 유, 유혹 했습…. 니다.""제 잘못…. 흐윽…. 잘못으로…. 부, 부모님이 대신 벌을…. 받습니다.""저는…. 제 잘못을 모, 모두 인정하고…. 앞, 앞으로 죗값을…. 갚도록 하겠습니…. 다…. 흐흑."
한서아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자기혐오와 죄책감에도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눌렀다.
"...조민성."
"파트너라고 불러야지."
웃으며 내 코를 툭 치고는 손가락을 튕겨 나를 속박하던 마법을 없앴다. 나는 그 즉시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머리를 박았다.
구에에엑
나에 대한 혐오. 자책. 한서아에 대한 미안함과 백진희에 대한 분노. 김성현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조차.
더는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위안에 있는 위액까지 전부 뱉어내고 나서야. 변기에서 겨우 고개를 들 수가 있었다.
내가 여태까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무슨 잘못들을 해왔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됐다.
백진희의 세뇌 속에서 몽롱한 정신으로 `나`를 잃고 살았던 것.
심지어 내가 동정하던 한서아에게 한 짓까지.
한서아에 대한 생각이 들자. 급히 휴대폰을 꺼내 김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아가씨.]
"한서아한테 하려는 거 그만둬 당장."
[네? 아,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화장실 바닥을 치며 울부짖었다. 백진희가 내게 한 짓들이 떠올랐고.
내가 김성현에게 한 짓들과 세뇌당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도 모조리.
내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이유가 되었다.
"괜찮냐?"
조민성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일단은 조민성과 얘기를 나누는 게 우선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세수만 하고 나갈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조민성이 화장실에서 나가자. 나는 몸을 일으켜 찬물로 세수를 했다.
목덜미가 스트레스 때문에 무척 당겨왔다. 머리는 터질 것 같았고. 마음은 당장이라도 이 감정을 분출하라며 소리치고 있었지만.
상황을 수습하는 게 지금은 제일 급선무였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거실로 나가자. 조민성이 반기듯 웃으며 말했다.
"일단은 앉지. 팔찌 구하느라 고생이 많았거든."
멋대로 거실의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걸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관계에서 `갑`은 조민성이었다.
최대한 비위를 맞춰줘야 조민성이라는 양날의 검을 안전하게 내 계획에 써먹을 수 있다.
"...임유모랑 차기사님은?"
"잠깐 재워둔 거야. 걱정하지 마."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죽이지는 않았구나.
"고마워. 세뇌에서 풀어줘서."
진심으로 조민성에게 고마웠다. 조민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백진희의 계획에 끌려다니면서 백진희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 팔찌가 없으면 백진희에게 다시 세뇌당할 수 있으니 조심해."
백진희라는 이름에 자연스레 이가 갈렸다. 왼팔에 찬 팔찌가 목숨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자. 이제 얘기 좀 할까."
조민성의 서늘한 눈동자로 내 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려는지 매섭게 노려봤다.
"내 앞에 있을 운명이라는 계획이 뭐지?"
"...잠시만 머리를 정리할 시간 좀 줘."
"그러지."
마음대로 하라며 조민성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시 머릿속에서 가짜와 진짜 기억을 정리하며 왼팔에 찬 요정 왕의 팔찌가 떠올랐다. 영또플에서는 언급되지 않던 유물이라 궁금증이 생겼다.
"이 팔찌의 용도는? 어디서 구한 거야?"
"궁금한 게 많은가 보네 파트너. 내 질문에 답도 안 하고 물어보는 거 보니."
지적하듯 말하는 조민성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아. 미안."
사실 조민성이 어떻게 강해졌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전혀 모른다. 단지 거래가 하고 싶어 내뱉은 허세였을 뿐.
이 사실을 안다면 곧장 내 머리를 뜯어버리려 들겠지만. 내 생각을 읽을 수는 없으니 그 점은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영또플스토리는 김성현이 마음에 드는 히로인을 공략하다가. 히로인의 가정사나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풀어가며 그 뒤에 있는 악인 또는 마인과 싸우게 되며 일어나는 일들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조민성은 그저 김성현의 운명적인 라이벌. 어디 가서 사건을 일으키고 혼자 마인들을 몰살시켰다 등등 이 정도로 언급으로 비교가 되었을 뿐이지.
정확한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한 묘사가 없었다. 단지 강함에 대한 언급만 종종 있었을 뿐.
하지만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임시지만 녀석은 `주인공` 자리에 올려져 있는 조커.
김성현이 해결해야 할 사건들을 조민성이 대신 해결하면 된다.
그 사건들은 분명 일어날 일들이니까.
휴대폰을 꺼내 들어 날짜를 계산하고 내 머릿속에 있는 원작의 기억을 떠올렸다.
"일주일 뒤에 초월역 지하철에서 또 한 번 테러가 일어날 거야."
"또 테러를 막으라는 거가 그건 재미없는데."
내 말에 급속도로 흥미를 잃고 실망한 표정을 짓는 조민성의 모습에 급히 말을 이어 붙였다.
"그 마인이 아주 좋은 걸 갖고 있어. 마법사라면 탐날걸."
"뭔데?"
"리치의 라이프 포스 베슬."
김성현은 지하철을 타다가 사건에 휘말려 마인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마인을 죽이고. 이 라이프 포스 베슬을 이용해 미소녀 리치 `레이나`를 자신의 새로운 조력자이자 육변기 노예로 만들었다.
리치라는 설정이지만 큰 가슴과 매력적인 외모의 일러스트가 공개되자. 백진희 다음으로 레이나 코인을 타는 독자도 많았다.
"호오. 리치라…."
내 말에 흥미를 느꼈는지 조민성의 짙은 검은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인 건가.
"그걸 얻으면 그다음 계획을 설명해 줄게."
사실은 계획 같은 건 없지만. 지금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내 머릿속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억과 감정들에 복잡해져 조민성을 속일 새로운 변명거리를 만들 힘이 부족했으니까.
"좋아. 답변이 마음에 드니 팔찌에 관해 설명해줄게. 이름은 요정 왕의 팔찌. 이름대로 요정 왕이 착용했다는 전설이 있는 유물이야.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해로운 마법이나 저주 등을 `해주`하는 아주 귀한 팔찌야. 구하기도 퍽 어려웠고."
설명을 마친 조민성은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이제 백진희를 죽이러 갈 건가?"
"...아니."
백진희를 죽일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랬겠지만. 지금 내가 백진희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여러 가지. 내가 모르는 것들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백진희는 숨기는 게 많으니까. 오히려 팔찌를 뺏길 가능성이 더 컸기에 조심해야 했다.
"뭐. 알아서 해. 참고로 나는 백진희랑 싸울 마음 없어. 도움받을 생각은 하지마."
"...왜?"
의문이다. 오히려 조민성이 다짜고짜 백진희를 죽이는데 협력하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는데.
조민성이 먹이로 가장 좋아하는 `계획`을 세우는 인물이 백진희일 텐데.
내 의문스러운 시선을 읽은 건지. 조민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질 것 같아서."
"뭐?"
조민성이 질 것 같다고? 세계관 최강 마법사의 잠재력을 가진 조민성이?
"아직은 말이야."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하며 조민성은 혼란스러워하는 내 시선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파트너."
"그래."
내 대답이 끝난 순간. 푸른 선이 어디선가 나타나 조민성의 몸을 휘감기더니 불에 타오른 종이처럼 재가 되어 모습을 감췄다.
한참을 조민성이 사라진곳을 보던 나는 또다시 올라오는 구역질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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