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최악의 최선
* * *
눈을 뜨자 보인 건 진희의 예쁜 얼굴이었다.
머리가 몽롱한 게 마지막 기억이 희미했다.
도망가는 성현이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인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보니 충격이 컸던 걸까. 성현이가 정말로 진희 말대로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니.
"괜찮아 아린아?"
몸을 일으켜 세우자. 진희가 걱정하듯 내 손을 꼭 쥐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보건실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진희의 시선에 성현이가 떠올랐다.
"...성현이는?"
"도망쳤어…. 부끄럽긴한가봐."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젖는 진희의 모습이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 진희야.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정말로 볼 면목이 없었다. 친구의 사랑싸움에 휘말리게 하다니. 부끄러웠다.
"그…. 애는?"
성현이랑 섹스하려 하던 여자애. 이름이 한서아랬나.
떠올리자 이가 갈렸다. 정말로 성현이를 뺏으려는 `여우`가 근처에 있었다니.
진희를 따라 창고로 가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것이다.
"아. 기숙사로 돌아갔어."
"...그렇구나."
마음이 울적하다. 진희의 말대로 성현이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서로 사랑한다며 키스를 하며 섹스를 하려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우울해졌다.
진희는 서늘한 손길로 내 뒷목을 쓰다듬어주며 나를 달랬다.
"...어떻게 할래? 한서아. 본보기로 삼아야지."
"응."
본보기로 삼자는 진희의 조언에 내 안에 잠들어있던 분노가 다시금 불이 붙었다.
진희가 건네준 내 휴대폰을 들어 곧장 김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비서."
[네 아가씨.]
"한서아라고 초월 아카데미 다니는 여학생 있어. 1학년."
[한서아. 네 적었습니다.]
"한서아에 대해 알아보고 집안에 대해서도 알아봐. 약점이 될만한 건 뭐든."
[네 체크했습니다.]
"최대한 빨리해."
[넵!]
전화를 끊고 진희를 바라봤다. 진희는 하얀 백안으로 나를 보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한서아 혼내주러 갈까? 나쁜 년이잖아."
어디 여행이라도 가자는 듯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진희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러자."
침대에서 일어나 진희를 따라 보건실 밖으로 나왔다.
성현이는 어디 갔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일단 이 분노를 해결해야겠다.
***
"아, 아파! 아파요…. 흐읏, 흑흑…. 죄송해요."
한서아의 비명이 짜증 나게 들려 한 번 더 막대기를 등에 내려치자. 몸의 중심을 못 잡고 앞으로 쓰러졌다.
"일어나."
쓰러진채 나체인 몸을 부들거리던 한서아는 내 말을 듣고 아픈 척 연기라도 하는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척 하더니 끝내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진희가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쓰러진 한서아에게 다가가 엉덩이에 바늘을 푹 찔렀다.
"아악!"
"뭐야 잘 일어나네."
고통에 몸부림치며 몸을 일으켜 세우는 한서아의 모습에 더욱 화가 났다.
"끝까지…. 날 속이려고 하네."
"아, 아니에요. 정, 정말 바람 같은"
거짓말을 하는 입을 막대기로 때리자. 입술이 터졌는지 피를 흘리며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그 모습이 파리 같아 보여 더 싫게만 느껴졌다.
언제까지 거짓말하려는 걸까.
내가 직접 두 눈으로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봤는데.
그런 적이 없다고 거짓말해서 진희의 방으로 끌고 와 진희와 돌아가면서 진실을 말할 때까지 계속 때렸다.
한 시간 넘게 거짓말하더니 이제는 막대기만 들면 바로 사과한다.
거짓말쟁이.
"이제부터 1분간 침묵~"
진희가 웃으면서 한서아의 엉덩이에 바늘을 다시 꽂았다. 바늘이 아픈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을 틀어막는 모습이 짜증 나게만 느껴졌다.
막대기로 머리를 내려치면 짜증이 풀릴까 고민할 때쯤 김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네 아가씨. 알아보니까 한서아 부모가 공장을 운영 중이더라고요. 저희 계열사에 재하청받는 곳입니다.]
"망하게 할 수 있어? 한서아 부모가 하는 공장."
내 말을 들었는지 입을 틀어막고 있던 한서아가 벌레처럼 기어와. 울부짖으며 내 발을 붙잡았다.
"살, 살려주세요. 동, 동생이 많이 아파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어~? 침묵 1분 실패."
진희가 웃으면서 따라와 엉덩이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한서아가 내 발을 잡고 발광을 해서. 더 기분이 나빠졌다.
[...2일이면 충분 할 것 같습니다.]
"빚더미에 앉게 해. 자살 안 하면 못 버틸 정도로."
전화를 끊고 내 발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는 파리의 정수리 모양이 짜증이나 발로 찼다. 떨어지지 않으려는지 작은 손으로 내 발목을 꼭 붙들어 잡는 모습이 역겹게 느껴졌다.
"붙지 마. 더러우니까."
내 말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는 모습에 더 짜증이 났다. 기회주의자 같은 모습을 제일 싫어하는데 어쩜 이리 싫은 행동만 하는 걸까.
"아카데미는 다니게 해줄게. 본보기로 삼아야 하니까."
"제, 제발…. 잘 못했어요. 용, 용서해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흐윽, 흑."
나는 무릎을 꿇고 피와 콧물, 눈물이 범벅된 못난 한서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동생이 아파?"
아까 아픈 동생이 있다는 말을 내뱉은 게 사실인지 궁금했다.
"네, 네…. 흐윽.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안좋았…. 아윽…. 흐윽. 그래서 병원 치료를…. 아악!"
진희가 계속 엉덩이를 바늘로 쿡쿡 찔러댔기에 한서아는 말을 잘 못 했다. 참을성도 부족한데 왜 성현이는 이런 애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까.
"그것도 거짓말 아니야?"
의심스러웠다. 워낙 거짓말쟁이니까.
"아, 아니에요…. 정, 정말이에요. 차성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양손을 모으고 싹싹 비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동생이라도 살리고 싶으면 잘 참고 다녀야겠네~?"
내가 고민하자 진희가 나 대신 한서아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제, 제발…. 저희 부모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착하신…."
"잘못 키운 자식 때문에 애꿎은 부모가 벌 받는 게 당연하잖아."
진희의 말에 한서아는 오열하며 진희에게 몸을 돌려 다시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빌었다.
"자퇴하라면 할게요. 영웅 하지 말라 하면 안 할게요. 제, 제…. 발! 뭐든지 할게요!"
"어떻게 할래 아린아? 봐줄까? 아니면 본보기로 삼을까."
나를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물어보는 진희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당연히 본보기 삼아야지."
진희의 말대로 여기서 어중간하게 한서아를 용서했다가는 다른 여자들이 성현이에게 또다시 접근할 수 있으니까.
확실하게 밟아놔야 했다.
내 말에 울부짖으며 한서아가 기어오기에 머리를 걷어찼다.
역겨우다니까 왜 자꾸 달라붙는 걸까.
귀찮은 파리 같으니.
***
"성현아! 일어나서 밥 먹어!"
엄마의 깨우는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마 만이지. 살던 집으로 돌아온 게.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공황상태에 빠져 도망치다 갈 곳이 없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린이는 어떻게 됐을까. 괜찮을까?
한서아가 강간 신고라도 했을까?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이래서 죄짓고는 못사나 보다.
씨발 백진희만 아니었으면….
당장에라도 저 방문을 열고 경찰이 들이닥칠 것 같아 불안했다.
"김성현! 밥 안 먹어?"
"아! 알았다고!"
짜증을 내며 방을 나오니 내가 매일 앉던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일어났어. 성현아?"
나를 보고 밝게 웃는 흑요석 같은 맑은 검은 눈을 가진 미녀. 아린이였다.
"아, 아린아…. 여긴 어떻게…."
"기숙사에 안 돌아오길래 걱정돼서 찾아와봤어. 어머니가 아침 같이 먹자고 권해주셔서…."
"얼른 와서 앉아!"
엄마의 재촉에 비어있는 아린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빠의 자리가 비어있는 거 보니. 오늘도 아침 일찍 먼저 출근했나 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아린이와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뭐라고 할까. 부모님에게 내가 때렸다고 말한 거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몸을 떨어대자. 아린이가 부드럽게 내 손을 잡아줬다.
"일단 밥 먹고 따로 얘기하자."
작게 속삭이며 나를 보고 웃는 아린이의 모습에 조금은 불안감이 줄어들었다.
나를 용서해 주려는 걸까?
불안했지만 지금은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갈증이나 국이나 떠마셨다.
"아린 학생이 정말 우리 성현이 여자친구예요?"
"푸흡"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자. 아린이가 걱정하며 내 등을 두드려줬다.
"물 좀 마셔 성현아."
아린이가 건네준 잔을 받아 물을 들이마시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네. 어머니. 학업에 지장 없게 건전한 교제 하고 있어요."
"어머. 이렇게 예쁜 아이를 어떻게 우리 아들이 사귀었을까~엄마한테는 말 한마디 안 하더니~"
"성현이가 워낙 성격이 좋고 잘생겼잖아요."
"우리 아들이? 하이고~ 맨날 게임이니 뭐니…."
또 내 험담을 하려 들기에 급히 막아섰다.
"아이 진짜. 밥 먹자 엄마. 아침부터 왜 그리 자식 앞에서 앞담을 해."
"어머, 이게 앞담이야? 네가 맨날 밤늦게까지 잠도 안 자고 게임을 한 게 한 두 번…."
뭐라 말하면 더 길어질 게 뻔하니 그냥 밥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엄마와 재밌다는 듯이 대화하던 아린이에게 여동생인 성은이가 다가가 허벅지를 툭툭 쳤다.
"응? 왜?"
"언니. 공주님이야?"
성은이의 말에 귀엽다는 듯이 예쁜 미소를 지으며 아린이가 성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비슷해."
하긴. 차성의 후계자면 공주가 뭐야. 여왕이지 여왕.
결혼만 하면 내가 왕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 텐데….
잘못한 게 있으니 괜히 눈치만 보였다.
체하기 직전까지 입에다 밥을 쑤셔놓고 방 안에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아 초조하게 기다리자.
엄마와 대화를 다 나눴는지. 아린이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 아린아."
씨발 무조건 사과하고 매달리자. 황금 동아줄을 이렇게 놓칠 수는 없
"성현아. 난 괜찮아."
"어…?"
아린이는 침대 옆에 앉아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남자니까. 한 번은 용서해줄 수 있어."
"으, 응. 고마워! 내가 진짜 이제 잘할게. 딴 여자랑 눈도 안 마주칠게."
내 말에 아린이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다시 한 번 바람 피면 진짜로 가만 안 놔둘 거야."
"어…? 으, 응 바람…."
뭐지? 바람이라고 착각한 건가? 한서아가 분명 말했을 텐데. 내 생각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갔다.
"그…. 한서아가 뭐라고 안 했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아린이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예쁜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강간하려 했다고 거짓말하길래. 손 좀 봐줬어. 이제 거짓말 안 해."
"...어?"
"한서아 집. 이제 망하게 할거거든."
밝게 웃으며 말하는 아린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 조금 몸을 뒤로 했다.
"그, 그건 좀…."
이런 걸 원한 건 아니다. 그냥 섹스 한 번 해보려고 한 건데. 집안을 망하게 하는 거는…. 너무 심하잖아.
"내가 한서아를 용서하길 원해?"
차가운 목소리로 아린이가 나를 노려봤다.
대답을 잘하라는 듯. 미간을 서서히 좁히는 모습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괜히 네가 신경 쓸까 봐 그런 거지……."
눈앞의 여자가 차성이라는 거대 재벌의 후계자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번에는 한서아로 끝날 수 있지만. 만약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 가족에게도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아. 이거 봐. 너한테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거 찍었거든. 보여주고 싶었어."
아린이의 휴대폰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였다.
휴대폰 화면에 재생되는 영상을 보고 식도의 끝까지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삼켜냈다.
화면 안에는 얼마나 맞은 건지. 온몸이 멍과 피투성이로 변해 있는 한서아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저는 한서아입니다…. 저, 저는 김성현을 유, 유혹 했습…. 니다.]
훈련장을 나오던 한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 몸으로도 매일 같이 열심히 영웅이 되기 위해 훈련을 하던 소녀.
[제 잘못…. 흐윽…. 잘못으로…. 부, 부모님이 대신 벌을…. 받습니다.]
내 성욕 때문에 함정에 빠져 처녀를 뺏길뻔한 가엾은 피해자.
[저는…. 제 잘못을 모, 모두 인정하고…. 앞, 앞으로 죗값을…. 갚도록 하겠습니…. 다…. 흐흑.]
평범했던 하루였을 날이. 나 하나로 망가져 버린 한서아.
입술을 얼마나 깨물었는지. 터져 부어오른 입술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빨 자국이 더욱 죄책감을 들게 했다.
숨이 막혔다. 왜…. 이렇게 까지 한 걸까. 나를 사랑해서? 이건 너무 선을 넘었다.
내가 알던 아린이는 이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예쁘게만 보였던 아린이의 얼굴이 조금 두렵게 느껴졌다.
"성현아."
"으, 응…."
"내가 귀여운 성은이도 이렇게 만들었으면 좋겠어?"
작게 속삭이는 말에 온몸이 떨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떨어져 무릎을 꿇고 아린이에게 빌었다.
"미안해 아린아…. 다시는 안 그럴게."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성현아. 성은이는 죽이기에는 너무 귀엽잖아."
"응. 꼭 그럴게. 미안해…. 아린아."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그 검은 눈이.
이제는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랑해 성현아."
"나, 나도 사랑해 아린아…."
나를 끌어안는 따뜻한 아린이의 체온에도 나는 곧 얼어 죽을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우린 영원히 사랑할 거야."
신아린의 작은 속삭임에 심장이 조이듯 아파져 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