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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48화 (48/160)

〈 48화 〉 몸의 기억

* * *

성현이와의 데이트는 `시간은 상대적이다.`라는 말이 어울렸다.

같이 있을 때는 1시간이 10분 같이 짧게만 느껴졌고, 떨어져 있을 때는 10분이 1시간 같을 정도로 길게 느껴졌으니까.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초기의 커플답게.

1시간이 넘는 통화를 하느라. 휴대폰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한쪽 귀가 빨개질 정도 였다.

왼쪽 손가락에 직접 만든 반지를 끼고 성현이가 사줬던 조금 노출 있는 미시룩을 입고 데이트에 나섰다.

물론, 성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남자들의 시선에 겉옷을 입고 있었지만. 보여주려고 입은 옷이기 때문에 성현이를 만나자 곧장 벗었다.

"오늘 예, 예쁘네."

"너도 오늘 멋있어."

빈말이 아니라. 성현이는 앞머리를 내린 것보다 이마를 깐 게 더 멋있는 것 같다. 눈까지 내려온 반곱슬의 앞머리와 시골 똥강아지 같은 눈은 조금 답답해 보였다.

오늘은 성현이가 데이트코스를 짰다. 슈퍼 플라틴 타워에서 하루 데이트.

나는 그곳에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에 통화를 하다가. 이 얘기가 나와 성현이가 여기로 데이트코스를 짰다.

경쟁사라는 이유 때문에는 아니고. 단지 이런 곳에 올 친구가 없었으니까.

"자. 일단 오늘은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고 그다음에 백화점 구경 좀 하다가. 저녁쯤에 여기 피자 엄청 맛있는 곳 있다는데. 거기서 피자 먹을 계획이야 어때?"

"난 좋아.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같아 있기만 해도 좋고."

"나도 생리만 아니면 바로…."

헛소리를 하기에 옆구리를 꼬집자 장난이었다며 안겨 오길래 못 이기는 척 받아줬다.

성현이에게서 느껴지는 체취와 체온은 언제라도 반가운 것이니까.

은근슬쩍 몸을 더듬기에 모른척하자. 내 반응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엉덩이로 손을 내려 황급히 가슴을 밀어냈다. 아쉬운 표정으로 떨어지는 성현이의 모습에 다가가 팔에 팔짱을 끼자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영화를 보는 동안 옷 안으로 손이 들어오거나 그러진 않았다. 몰래 옷 위로 가슴을 몇 번 만지기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하지말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은 귀엽다는 듯이 입맞춤을 해줘서 나중에는 오히려 가슴을 만져주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이제 성현이는 나에게 성적 호기심보다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엄청난 성욕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나를 아껴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빈도가 늘었다는 것이다.

영화 내용 자체도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한 남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였기에.

나는 영화의 내용에 몰입해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성현이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글썽거리면서.

"뭐 나쁘지 않네."라며 슬픔을 감추며 허세를 부렸지만. 그 모습이 강아지 같아서 귀엽게 보여 엔딩크레딧이 올라가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를 노려 키스했다.

서로의 혀에 집중하던 우리는 청소 직원이 들어올 때까지 키스하다. 직원의 시선에 황급히 영화관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성현이는 미리 알아놓은 식당이 있다며. 내 손을 잡고 식당이 모여 있는 4층으로 이동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본 맛집인. 일본식 돈가스집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커플이 앉은 몇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다들 영웅 복장을 하고 있기에. 조금 식당 안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유독 전투 복장을 한 영웅들이 많았다. 던전 탐험이 끝나고. 길드끼리 단체로 친목이라도 도모하려고 모인 걸까?

"오늘 뭐 하나?"

성현이의 말에 나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닐 텐데.

주문한 돈가스가 나오자. 사진을 찍고 성현이랑 서로 돈가스를 먹여주며 웃으며 대화할 때쯤. 주변의 영웅들이 갑자기 다 같이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갔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겠지?"

조금 불안한 마음에 성현이에게 묻자. 성현이도 궁금했는지 잠깐 나가서 보고 온다며 자리를 비웠다.

얼마 후 자리에 돌아온 성현이는 봐도 모르겠다며 뒷머리를 긁었다.

"뭐 하려고 이리 모인거­"

콰아앙­!!!

성현이의 말을 끊으며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식당 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려와 가게 안에 있던 물건들이 떨어지며 그릇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요란하게 들렸다.

"뭐, 뭐야."

"성, 성현아…."

굉음이 일어나자 성현이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보호하듯 품 안에 안아주었다. 그 행동에 감동하여 조금 심장이 빠르게 뛰어왔다.

성현이가 나를 아껴준다는 생각에 기쁜 것도 잠시. 엄청난 굉음들이 계속해서 들려왔기에 우리는 자리를 피하고자 다른 손님들처럼 가게 밖을 나왔다.

"뭐, 뭐야 저건."

성현이의 말에 성현이를 따라 고개를 드니.

팔다리가 비상식적으로 긴 보라색의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벽에 붙어 영웅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플라틴 타워안에 마인의 습격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고 일반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운이 좋은 건지. 이 층에는 영웅들이 많았기에 그들의 신속한 상황정리에 사람들이 질서 있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가자. 아린아."

"으, 응."

성현이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들처럼 빠져나가려는데. 누군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성현이의 등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누구인지 몰랐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민성."

"알이 여러 개라고는 말 안 했잖아. 아린아."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성현이의 등 뒤로 숨어 있는 나에게 고개를 내밀어 말하는 조민성의 태연한 목소리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를 강간하려 했었으면서. 어떻게 저리 태연하게 굴 수 있는 걸까. 성현이를 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뭐야. 데이트 중이었나?"

"그냥 가. 성현아…."

떨리는 목소리로 성현이의 등을 밀었다. 조금이라도 조민성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성현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조민성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조민성에게 나를 보호하듯. 나를 자신의 뒤로 숨기고 먼저 앞장섰다.

***

자신을 본 순간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신아린의 시선을 읽은 조민성은 신아린의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전보다 더 강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벌써 손을 쓴 건가.`

마나를 흘려 주변을 탐색했지만. 백진희에게서 느껴지는 고유의 파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신아린의 말대로 정말 제삼자의 짓일지. 백진희의 계획일지는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신아린이 말한 대로 오늘 마인의 테러는 진짜였다.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이 죽었을 정도였으니까.

플라틴 타워의 보안을 뚫고 들어올 정도로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이 분명하다.

마인이 가지고 있던 마수의 알은 7개가 넘었고 그 상태도 B급이 넘는 것들이 대다수였기에.

만약 제때 막지 않았다면 경비원들과 손님들은 몰살당했을 것이다.

누군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 세운 계획을 망쳤다는 사실이.

뒷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짙은 만족감을 주었다.

미리 여러 길드들에 연락을 해. 음식 대접과 4시간의 고용을 조건으로 4층과 5층에 대비해놨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상황의 변화를 계산하지 않은 허술한 계획이었는지.

멍청한 마인은 미리 방비 마법이 처진 화장실 안에서 마수의 알을 깨웠고.

기다리고 있던 수 십 명의 A급 영웅들이 곧장 알에서 깨어난 마수들을 그대로 으깨버렸다.

"남은 건 저놈 하나인가."

마수의 알을 가져온 마인. 마인화를 한 모습도 사마귀처럼 웃기게 생겼다. 저 긴 팔다리를 자르면 몸뚱이만 뒤뚱거릴 것 같아 재밌을 것 같다.

영웅들의 공격을 받던 마인은 긴 팔다리를 휘두르며 높은 천장에 붙어 근접 공격을 피하고 괴성을 질러 댔다.

근처의 영웅들은 마법을 이용해 마인을 떨군 뒤 공격할 준비를 했다. 초회복 능력도 있는 것인지. 영웅들이 입힌 상처는 새살이 돋아 흔적도 남지 않았다.

"마법사들 저 녀석 천장에서 떨궈!"

누군가의 섣부른 외침이 시발점이라도 된 것처럼 온갖 마법들이 마인에게 날아들었다. 주변의 일반인들은 이미 대부분 대피했고. 플라틴에서 마인을 죽이는 걸 1순위로 삼으라고 미리 말했기에.

부가적인 피해는 계산할 필요 없다는 사실이 마법사들의 억눌러왔던 공격 본능을 깨워. 무차별적인 마법이 쏟아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인은 긴 팔과 다리를 휘둘러 자신에게 오는 마법들을 맞으면서 천장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음 공격을 위해 마법사들이 마법 구조식을 점검하고 있을 때. 푸른 마나가 마인의 긴 팔다리 위로 마치 페인트를 칠한 듯 길게 푸른 선을 남겼다.

그 변화를 지켜본 영웅들의 눈에 들어온 건.

푸른 마나가 만들어낸 푸른색의 선을 기준으로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팔다리째로 공간이 찢겨 나가. 괴성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마인의 추한 모습이었다.

푸른 선이 찢어낸 공간 자체가 그대로 허공에 박제라도 된 것처럼 마인의 긴 팔다리는 그대로 공중에 떠 있었다.

"뭐, 뭐야? 누구 마법이야?"

"마인부터 죽여!!!"

근처의 영웅들이 낙하한 마인의 몸뚱이에 달려들어 팔다리가 잘린 마인의 몸에 검과 창을 쑤셔 넣자. 고통스러워하며 무어라 지껄이던 마인은 머리가 날아가고 나서야. 그 움직임을 멈췄다.

피 칠갑이 된 채 마인의 시체를 내려보던 영웅들의 위로 그제야 마인의 팔다리가 떨어져 내렸다.

기겁하며 떨어지는 긴 팔다리를 피하는 영웅들을 뒤로.

그곳에 있던 마법사들은 몸을 돌려 푸른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사를 경외와 질투가 섞인 시선을 숨기지 못하고 바라봤다.

젊은 나이. 아카데미 생의 신분임에도 A급이라는 잠정적 등급을 얻은 천재 마법사.

플라틴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푸른 마나 살인귀]라는 악명과 비슷한 칭호가 붙은 천재.

그 천재는 설익은 질투와 시샘 어린 시선들을 무시하며, 멀리 서로의 손을 잡고 이 난장판을 빠져나가는 커플의 뒷모습만 흥미롭게 바라봤다.

**

플라틴 타워를 벗어난 우리는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카페는 요즘 너무 자주 갔고 방금 밥을 먹어서 그렇게 끌리지 않았다.

멀티방이라도 갈까 싶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꽉 차 대기시간만 1시간이 넘었기에 갈 곳이 없어졌다.

한참을 어디를 갈까 돌아다니다. 나는 성현이를 집에 초대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 갈래?"

별생각 없이 갈 곳이 없으니 집에라도 갈까 하는 생각으로 말한 건데.

성현이는 격한 반응을 보이며 나를 끌어안으며 음흉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왜~? 집에 아무도 없어?"

"임유모랑 차기사님 있는데?"

"아 맞다."

잊고 있었는지. 음흉한표정을 짓던 성현이가 미간을 좁히며 고민했다.

"어색하지는 않겠지…?"

"임유모 되게 착해."

유모라서 그런 건지. 성격이 좋으신 건지. 항상 나에게 큰 신경을 써주시고 내가 할 잡다할 일도 도와주셨다.

피부관리라던가. 메이크업이라든가. 패션 코디라던가. 그런 것들.

"좋아. 인사드리러 가자."

상견례라도 간다고 생각하는 걸까. 결연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끼는 성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주말이라 푹 쉬고 있을 차기사님을 위해. 성현이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성현이와 집으로 돌아오자. 임유모는 눈을 빛내며 성현이를 관찰했다.

"어머, 아가씨한테 듣기만 했는데. 이렇게 잘생긴 청년인 줄은 몰랐네~"

임유모의 호들갑에 광대가 승천한 성현이는 뒷머리를 긁으며 기쁜 듯 웃었다.

"과일이라도 드릴까요?"

"아냐. 성현이랑 같이 있을 거니까. 나중에 필요하면 부를게."

내 말에 묘한 미소를 짓던 임유모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피임법은 아시죠?"

"그, 그런 거 아냐!!!"

졸업전까지는 절대 섹스할 생각 없으니까. 괜한 임유모의 오지랖에 얼굴이 빨개져 소리치자.

임유모는 웃으면서 내 어깨를 쓰다듬어주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가 그런 거 아니­ 아악!"

능글맞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성현이에게 괜히 화풀이로 정강이를 약하게 발로 찼다.

"따라와. 내 방이야."

정강이를 부여잡고 오버하며 아픈척하던 성현이는 곧장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매일 같이 임유모가 방 청소를 해줬기에 방이 어지러울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성현이는 신기하다는 듯 방안을 둘러보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봤다.

"와 여자방 들어온 건 여동생 빼고는 처음이야."

기억에라도 남기려는지. 고개를 돌려 방안을 보며 성현이가 신이난듯 자기 허벅지를 두드렸다.

나는 성현이가 허벅지를 두드리는 신호에 당연하단 듯이. 성현이의 허벅지 위로 다리를 벌리고 올라탔다.

"엉?"

"어…?"

왜 그랬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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