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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47화 (47/160)

〈 47화 〉 멀어져가는것

* * *

머리 안을 채워오는 몽롱함에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거나 지금 당■­

바닥에 쓰러진 내 눈에 들어온 건 조민성의 안주머니 사이에 있는 만년필.

혀를 씹으며 조민성에게 기어가 몸을 올라타자. 재밌다는 듯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조민성의 시선에 당장에라도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머리를 채워오는 몽롱함이 급선무였다. 조민성의 안주머니 안에 꽂혀있던 만년필을 꺼내 들자. 조민성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뭘 봐 이 개■■■­

"씨바아아알!!!!"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온몸이 떨려왔다. 손등을 뚫은 조민성의 만년필 덕에 몽롱했던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내 손에서 튄 피가 묻은 얼굴로 조민성은 뱀 같은 눈으로 나를 관찰했다.

"재밌네. 발악하는 게. 그래도 헛수고야."

조민성의 비웃는 말처럼 고통이 점점 둔해지기 시작했다.

손에서 만년필을 뽑자. 다시 고통이 찾아왔다. 조금의 시간을 벌었으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머리를 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백진희의 조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

"야…. 미친놈."

"자선사업은 안 하는데 말이야."

비웃는 조민성의 얼굴에 피 묻은 손으로 도발할 생각으로 뺨을 툭툭 쳤다.

역시 내 행동이 거슬렸는지.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게. 퍽 맘에 들었다.

"거래하자."

"조종당하는 인형이 나와 거래를 할 수 있을까?"

"씨…. 발 충분해."

몽롱해지는 정신에 곧장 내 허벅지에 만년필을 꽂았다. 바지를 뚫고 들어온 만년필의 촉의 고통에 나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다.

허벅지에 박힌 만년필에서 잉크가 터져 피와 섞여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내일…. 슈퍼 플라틴 타워. 1시에서 3시 사이. 정확한 시간을 몰라."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백화점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초월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타워.

플라틴의 위세를 보여주며. 초월이라는 지역 자체의 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

본래 영또플에서 일어났던 사건. 등급시험이 끝나고 자신의 육노예인 소니아의 보지에 딜도를 낀 채 야외노출 조교를 하며. 한서아와 소니아에게 입힐 란제리 속옷을 사러 플라틴 타워에구경을 갔다가.

마인의 테러 계획에 휩싸여 김성현이 소니아와 함께 마인들과 대립하는 사건. 영또플의 큰 분기점이었다.

그 전까지가 단순한 자박꼼 떡타지였다면. 이 테러를 기준으로 마인들과의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구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김성현은 동정. 능력을 각성하지 않았다. 마인들의 테러를 막을 `주인공`은 이 세계에 없다.

김성현과 다른 영웅들이 얻게될 유물과 기연을 독차지하고. 차성의 재력으로 김성현의 빈자리를 새로운 `주인공`으로서 채우려 했던 계획은 백진희의 개입으로 물 건너 갔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조민성.

이 미친 괴물의 목줄을 풀어.

나와 김성현이 힘을 쓰지 못하는 지금.

임시로 `주인공` 자리에 조민성이라는 조커 패를 테이블 위에 올려야 했다.

"...4층인지 5층인지는 몰라. 그곳에서 마인 하나가 나타날 거야. 그 녀석은 마수의 알을 가지고 있어. 그걸로 테러할 예정인 거고."

"마인? 그건 예언인가. 아니면 백진희의 계획인가?"

조민성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깃든다.

"둘 다 아냐. 이 세계를 만든 놈이 세운 계획이지. 어때? 그 계획을 부숴버릴 생각은?"

"...흥미로운 제안이네. 그게 사실이라면 말이야."

붉은 혀를 내밀어 윗입술을 핥는 뱀 같은 녀석을 보며 또다시 허벅지에 박힌 만년필을 뽑아 반대편의 허벅지를 찔렀다.

"씹…. 내 세뇌를 풀어주면. 너에게 짜인 `운명`이라는 계획을 부숴줄게. 어때?"

대답을 듣기 위해 피가 나게 입술을 씹으며. 내 아래에 깔린 조민성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 같았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조민성의 뱀 같은 눈을 노려보자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작게 속삭였다.

"다음에 만날 땐 파트너라고 불러. 잘 가 신아린."

눈을 뜬 조민성에게서 느껴지는 소름 돋는 시선을 마지막까지 응시하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누군가 내 몸을 만지는듯한 손길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처음 보는 회사원 복장의 여자와 경비복을 입고 있는 남자 2명이 나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무, 무슨…."

"발작을 일으키시다가 정신을 잃으셔서 치료 중이었어요."

몸을 반쯤 일으키자.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조민성이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깼구나?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어. 이분은 치료 영웅분이셔. 급히 호출했지."

조민성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마지막 기억이 흐릿하다. 차를 마시고 잔을 치우던 뒷모습을 보던 것 같은데.

급히 몸을 확인해봤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옷을 벗겼다거나 내 몸에 손을 댄 흔적은 딱히 없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시험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셨나? 스트레스성 발작 같은데. 푹 쉬어야겠어요."

"아…. 감사합니다. 미안해 조민성."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것도 그것 때문일까? 하긴 기한신이다 김성현이다. 요즘 머리를 쓸 일이 많기도 했고 거기에 등급시험도 겹쳤으니.

아무리 포션으로 육체의 상처를 치료한다 해도. 정신의 상처까지는 치료할 수 없는 거니까.

휴대폰을 보니.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조민성이 내게 뭔가를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겠지. 조루가 아니라면.

"오늘은 네 몸 상태가 안 좋으니까.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 급한 부탁도 아니니까."

"...그래."

지금 당장 몸을 눕혀야 할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순순히 조민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금만 더 치료받고 가. 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아카데미에서 보자."

그렇게 말한 조민성이 잘생긴 미소를 지으며 경비원들과 밖으로 나갔다.

여자 영웅분은 노란빛이 나는 손으로 내 정수리에 손을 얹고 기분 좋은 쓰다듬을 해주었다.

"임시로 어지러움과 구토를 억제했어요. 제일 중요한 건 휴식이니까. 집에 가시면 꼭 푹 쉬세요."

나를 걱정해주는 말에 고마움에 고개를 끄덕이고 3분 정도 머리를 쓰다듬당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혹시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나중에 보답이라도 해드릴게요."

"보답은요. 회사에서 하는 게 이런 일인데요. 이름은 최선아예요. 다음에는 좋은 모습으로 봐요."

예쁜 미소를 지으며 최선아라는 영웅은 나를 건물에서 나갈 때까지 배웅해줬다.

곧장 차기사님의 차가 내 앞에 멈춰 섰기에. 뒷좌석의 문을 열고 쓰러지듯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집…. 아니, 성현이가 있는 피시방으로 가주세요."

몸이 아파서 쉰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보다. 기다리고 있을 성현이에게 직접 만나서 말해주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사랑하는 성현이를 위해서는 그 정도­

"우읍…."

올라오는 구역질에 몸을 일으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았다. 몸 상태가 최악이다. 심지어 생리 기간이라 밑이 찝찝하기도 했고.

한참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을 때. 차가 멈추고 시동을 끄는 게 느껴졌다. 도착한 건가?

벌컥­

누군가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성현인가 싶어 무릎 사이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내 옆자리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있었다.

"백진희?"

"진희라고 불러야지. 아린아. 우린 친구인데."

백진희를 보는 순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게. 무언가 불쾌하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내 입에서 평소와 다른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앞에 있는 차기사님을 바라봤지만. 평소와 같이 앞만 보고 계셨다.

"흐응. 조민성이 너를 부른 이유가 뭐야? 솔직하게 말해봐."

백진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뒷목을 바늘로 긁는 듯한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나 몸이 너무 안 좋아. 다음에 얘기…."

숨이 중간에 막힌 듯.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처음 보는 험악한 얼굴로 백진희는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화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를 또 배신하는 거야?"

"아니야. 내가 왜…."

"조민성이랑 뭐 했어."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사실 그대로.

백진희의 손 주변에서 냉기라도 뿜어져 나오는지. 가죽시트에 얼음 결정 같은 것들이 끼기 시작했다.

"나, 나는…. 몰라. 몰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려오면서 뜨거운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흐르다 급속도로 얼어붙어 턱에서 얼음이 되어 떨어져 나갔다.

내 뒷목을 잡는 진희의 서늘한 손길이 느껴졌다. 다른 손으로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진희가 강제로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화난 모습은 사라지고 평소의 진희의 다정한 모습이 보였다. 평소처럼 진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지만.

무언가 머릿속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아린아."

누군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살짝 뜨니. 진희의 하얀 머리카락이 내 뺨을 간지럽혔다.

"아린아~ 일어나."

부드러운 진희의 목소리에 머리를 올려놓은 진희의 허벅지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더 해줘…. 기분 좋아."

"그래. 원하는 만큼 해줄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이 기분이 좋았기에. 눈을 감고 얼굴을 돌려 진희의 배에 파고들었다.

"아린아…. 괜찮아 이제?"

"응? 뭐가?"

"...조민성한테 강간당할 뻔 한 거 말이야."

진희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내, 내가 강간 당할 뻔했다고?

"그게 무슨…."

머릿속에 장면들이 떠올랐다. 차에다가 무언가를 집어넣는 조민성의 모습.

나를 덮치려다가 내가 깨어나자 실패해 그대로 도망치던 조민성의 뒷모습.

도망치듯 빠져나와 진희에게 전화를 걸던 것 까지.

얼어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몸이 덜덜 떨려왔다.

조민성이 나를…. 성현이의 의심이 맞았다.

"어, 어떻게 진희야. 신고 해야 할까?"

"신고한다 해도 조민성은 플라틴의 후계자야. 거기에 증거도 없으니까 일이 안 좋게 풀릴 게 뻔해."

"그, 그럼…."

불안했다. 언제 조민성이 나를 또 강간하려 들지 몰랐으니까.

내 불안감을 해결해주려는 듯. 진희는 부드럽게 내 뒷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들어. 다행히 미수로 그쳤으니까. 굳이 이 사실을 성현이나 다른 사람에게 밝힐 필요는 없어. 성현이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힘들어하겠어?"

"응…. 성현이는 많이 힘들어할 거야."

의처증이 폭발해서 조민성에게 달려들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것 같다.

"조민성이 언제 또 강간하려 들지 모르니까. 최대한 조민성을 경계하면서 지내고 있어. 내가 최대한 방법을 마련할게. 나 믿지 아린아?"

"응. 진희랑 성현이 말고는 이 세상에서 내가 믿을 사람 절대 없어."

몸을 일으켜 진희를 바라보며 말하자. 예쁜 미소를 지으며 진희가 나를 꼭 끌어안아 줬다.

"그래 아린아. 우린 평생 친구야. 모든 건 서로를 위해 하는 행동이야. 의심하지 말고 서로 믿자. 알았지?"

"진희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난 절대 의심 안 해!"

정말로. 나 같은 사람을 이토록 좋아해 주고 배려해주는 진희를. 내가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어.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 같은 사람은 아니다.

"성현이가 기다리겠다. 얼른 가봐. 나는 일이 바빠서. 먼저 가볼게."

"응. 항상 고마워 진희야. 내 전화에 바로 달려와 주고…. 진심이야."

예쁜 미소를 지으며 진희는 내 머리를 마지막으로 쓰다듬어주고는 차에서 내렸다.

피시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성현이를 향해 다시 차가 출발했다.

*

멀어지는 검은 리무진 차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조민성과 만난 이후의 기억이 신아린의 머리 안에 없다.

분명 조민성이 무언가 손을 썼겠지. 마법적인 재능은 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설정이니까. 신아린의 이상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골목으로 들어가. 주머니에서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민성의 개입은 계획에 방해가 될까? 잠시 머리 안의 계획을 정리해 봤다.

폐 안 가득 역한 싸구려 담배의 연기가 차올랐다. 몸에 해롭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이 싸구려 담배를 끊을 수 없는 장점.

공중으로 올라가는 담배 연기를 보며. 조민성에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푸른 마나 살인귀.

"변수일 확률 2%"

작은 확률이지만 무시할 수치는 아니다.

하지만 죽일 정도로 높은 수치도 아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살려두자."

그 녀석도 결국엔.

내 마지막 퍼즐의 한 부분이 될 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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