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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46화 (46/160)

〈 46화 〉 □■

* * *

금세 고스로리 트윈테일 소녀 모습으로 돌아와 옆자리에 앉아 친하게 떠들어대는 비골과 아린이의 모습을 보며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멍청하게 자기가 인큐버스라고 아린이에게 떠들어댈 것 같아서.

분명 그 말을 들은 아린이는 정색하며 왜 인큐버스랑 계약했냐고 물어볼 게 뻔하니.

걸리면 좆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식은땀이 났다.

"그. 저녁이나 먹을까? 비골, 아니 아레아야. 너도 맛있는 거 먹고 싶지?"

일단은 일보 후퇴해야 한다. 줄 건 줘.

"응? 음기 같은 거 말하는 거야?"

황급히 테이블 밑으로 발을 걷어찼는데. 아무렇지 않게 말을 끝까지 이어가기에 의아해할 때쯤.

비골의 옆에 있던 아린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먹였다.

"성현아…. 나 때린 거야?"

"아니야!"

아니 그 다리가 아니라 옆에 있는 다리를 차려 한 건데….

"가, 가정폭력!"

"아가리­ 아가야. 말조심해. 단어 선택이 조금 그러네?"

일단 이 녀석을 어떻게든 떼어놔야 했다. 옆에 두면 안 돼.

"아린아 잠깐 나 아레아랑 얘기 좀 해도 될까?"

"응. 그럴래? 그럼 나 잠시 화장실 갔다 올게."

화장실을 갈 때마다 손가방을 가져가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린이가 화장실에 가자. 아무것도 안 한 척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밖을 바라보는 비골을 노려봤다.

"너 뭐하다가 이제 왔냐?"

마계의 시간은 이곳의 1시간이 하루일 텐데. 너무 늦게 온 거 아닌가. 며칠이 지났는데.

"엉? 나? 주인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혼자서 서큐버스 3명이랑 계속 떡 쳤지."

"3명이랑…. 했다고?"

그 물음에 추억이라도 회상하듯 미소를 지으며 비골이 천장에 시선을 뒀다.

"응. 나도 3 구멍 동시로 해봤지. 후후. 백작이 부활하기 전까지 아무도 안 오더라고. 갑자기 부활해서 깜짝 놀랐어."

"대가리가 날아갔는데도 부활을 해?"

"엉. 그래도 다행히 깨어나기 전에 먼저 도망쳐서 나 따라오는 놈들은 없더라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주인이 하도 안 부르길래 내가 직접 왔어."

왜 이렇게 꿀밤을 쥐어박고 싶은지 모르겠다. 짱구 엄마의 마음이 이런 걸까.

"얼굴 봤으니까 이제 돌아가지?"

그 말을 들은 비골은 코웃음을 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이거. 주인이 상하관계를 모르시네."

"뭐 임마?"

오래간만에 보는 저 건들거리는 모습에 주먹이 쥐어졌다. 이딴 놈을 혼자 잡혀 있는 거 아닌가 걱정했다니.

"아니이~ 내가 지금 인큐버스인걸 여자 주인님께 말하면은 곤란해지는 건 그쪽 아닌가 싶어서~"

코를 후비며 얄밉게 말하는 비골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야 검은 머리 짐승 아니. 푸른 머리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라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야."

"맞아 주인. 우리 마계에는 이런 말도 있어. 당한 놈이 병신이다!"

"...어쩌라는 거냐? 사기계약 당한 내가 병신이라는 거냐?"

"그냥 주인보고 병신이라고 말하고 싶­"

이 자식 저번부터 반사신경은 빠르다. 티슈를 공처럼 말아 던졌는데 고개만 쏙 피하고 어깨를 건들거리는 모습이 매우 빡이 쳤다.

"자자. 우리끼리 얼굴 붉힐 필요가 있습니까 주인~? 내가 딱 봤을 때 여주인님은 꽤 음란한 몸이야."

"뭐 임마?"

"아잇! 들어봐. 인큐버스의 감각이 말해줘. 이거 잘하면 성 노예 하나 만들 수도? 라는 촉이 온다니­"

이번에는 양손으로 티슈 공을 던졌기에 고갯짓으로 피하려던 비골의 얼굴로 하나가 들어갔다.

"아린이는 안돼."

"힝. 왜! 어차피 이러려고 계약한 거잖아."

"내가 직접 할 거다."

그 대답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비골이 낮게 속삭였다.

"역시 우리 주인. 다 계획이 있구나?"

"아무튼, 시발아~ 돌아가."

데이트를 방해하다니 여간 귀찮네. 살아있는 걸 알았으니 이제 관심 없다.

"못 돌아가!"

"...?"

"당연히 주인이 나 먹여 살릴 줄 알고 집 팔고 창녀촌 가서 돈 다 쓰고 온 건데? 나 먹여 살린다며? 그게 계약 조건이잖아."

귀를 후비적거리며 건들거리는 모습에 뭐라도 집어서 던지고 싶었지만. 아린이가 가까이 왔기에 황급히 비골에게 입을 닫으라는 시늉을 했다.

예쁜 미소를 지으며 아린이가 비골의 옆에 앉아 물었다.

"얘기 다 했어? 자리 피해 줄까?"

"아니야.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고기 먹자 고기."

눈치 없이 끼어드는 비골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입꼬리를 올리고는 아린이의 팔에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

"예쁜 누나. 고기 먹어요 고기!"

"그럴까?"

결국, 비골이 원하는 대로 소갈비 집에 갔다. 비골과 대결하듯 배불리 먹었다. 소고기라 비쌀 텐데도 아린이는 괜찮다며 자기가 계산했다.

아린이가 계산하는 모습을 밖에서 나와 같이 보던 비골이 건방진 소리를 했다.

"나 주인 바꾸고 싶어…. 너무 멋있는 거 아니야?"

"이 자식이 고기 하나로 주인을 바꾸려 드네? 나 아니었으면 못 얻어 먹었어."

코를 쓰윽 닦으며 말하자. 비골이 가자미눈을 뜨며 말했다.

"주인은 꼭 여주인이랑 붙어살아야겠다. 모기처럼 쪽쪽 빨아먹어야 해!"

"그럴 거야 임마."

계산하고 나온 아린이가 예쁜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걸 보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돈 많고. 성격 좋고. 처녀인 여자친구.

절대 못 놓치지.

괜스레 왼손 4번째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졌다.

***

조민성과 약속을 한 시간이 되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나는 플라틴의 본사 건물로 들어갔다.

"안녕."

기다렸는지. 입구에서 조민성이 나를 반겼다. 학교에서만 봐서 항상 교복을 입고 있는 이미지로 남아있었는데. 사복을 입은 모습은 조금 색달랐다.

"응. 안녕 안 늦었지?"

"그럼. 6층에 개인 면담실 있는데 그곳에서 얘기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조민성과 엘리베이터를 탔다.

차성의 본사와 비슷하게 직원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건물도 세련되게 큰 것이. 역시 세계 1위 기업 플라틴 다웠다.

6층으로 가는 버튼을 조민성이 누르고 문이 닫히자. 조민성이 입을 열었다.

"별일은 없었고?"

"응. 딱히?"

그냥 인사말인가? 조민성에게 말할만한 일은 없었기에 그냥 없다고 하자. 나를 관찰하는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왜?"

"아냐. 가서 얘기하자."

내 손에 낀 성현이와 맞춘 커플링에 조민성의 시선이 머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면담실이라고 적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금 작은 방 하나가 있었다. 테이블 하나와 의자. 1인용 소파가 놓여있는 심리 상담에 관한 책들이 놓여 있는 곳이었다.

옆에는 사람 한 명 들어갈 정도의 탕비실 같은 곳도 있었다.

"차 내올게. 잠시만 기다려."

편안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성현이에게 반지를 낀 사진을 보내줬다.

[나 민성이 만났어. 원하는 대로 반지도 꼈고.]

[역시 아린이 ㅠㅅㅠ♥]

곧장 답장이 오는 게 내가 메시지를 보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내가 언제 조민성과의 대화가 끝날지 모른다니까.

근처 피시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 끝나면 연락하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머리가 맑아지는 차야. 진시황이 즐겨 마셨다고 하더라. 이번에 중국 쪽에서 넘어온 차야."

"고마워."

따뜻한 차를 받아들여 냄새를 맡자. 박하 같이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 한 입 마셔보니. 입안을 가득 채우는 향기가 진짜 고급 차 같았다. 차는 잘 모르지만.

"그래서 부탁이 뭔데?"

성현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조민성의 부탁을 최대한 빠르게 들어주고 싶었다.

"일단 차부터 다 마셔. 비싼 차라 금방 마시지 않으면 아까워."

잘생긴 얼굴로 멋있는 미소를 짓는 모습에 `와 진짜 잘생겼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5분 정도 잡다한 얘기를 하며. 차를 다 마시자. 조민성은 테이블에서 잔을 치우고 돌아와. 나를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원래 겁이 없는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조민성의 말에 시비를 걸려는 건가 생각하자. 조민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시비야?"

"아니. 너무 쉽게 나를 믿는 것 같아서. 내가 차에 뭐라도 탔으면 어쩌려고?"

"..."

"뭐 걱정마. 진짜 좋은 차니까. 이제 부탁 말해도 되지?"

"응. 말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노력해서 들어줄게."

내 말에 조민성이 긴 입꼬리를 그리며 웃었다.

"내 질문에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할 것. 그게 부탁이야."

내 안을 꿰뚫어보는 듯한 조민성의 눈빛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그래…. 뭔데 질문이?"

"백진희야? 김성현이야?"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미간을 좁히고 조민성을 바라보자. 조민성은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물을게. 너를 조종하는 건 백진희야. 김성현이야?"

그 이상한 말에 온몸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몸이 덜덜 떨려왔다. 손바닥에 땀이 차올라 바지에 땀을 닦았다.

"무, 무슨 소리…."

"네 뒤에서 계획을 꾸미는 놈. 아니 년일 수도 있겠네."

조민성이 뱀 같은 눈으로 나를 매섭게 노려보며 입꼬리를 길게 늘렸다.

"깨어나. 신아린."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의식이 사라졌다.

■■■

"아린이는 그럼 몇 살이야?"

"나? 나는 당연히…."

■■살 ■■ ■■■■ ■■ ■자.

한■■.

그게 내 ■■이다.

내 이름은….

한■■.

한■■.

한ㅅ■.

한성■.

한성■.

한성ㅈ.

한성진.

26살 남자 병장 만기제대 모쏠 남자.

한성진.

그게 내 이름이다.

"김성현을 사랑하지?"

"어?"

"성현이 사랑하잖아. 아린아."

맞아. 나는 김성현을 사랑하­

내 ■■■■ 나■­!!!!!

무언가 부서진다. 내 마음속 깊은 곳. 잠들어있던 무의식 속의 파편 속에서 녹아버렸던 기억들이 부상한다.

머릿속을 떠도는 조각들은 기억을 찢어내며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마치 원래의 기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맞지 않은 퍼즐을 끼워 넣은 것처럼 부서지고 찢어지며. 비틀어진다.

내 생각이 내 목소리를 타고 그대로 웅웅 거리며 거대하게 울려 퍼진다.

김성현이 날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 마음을 받아­

■ ■■■■ ■■ ■■­

천둥이라도 치는 걸까. 머리 안에서 거대한 짐승의 새된 울음이 터져 나온다.

바람을 타고 소음이 들려온다. 귀를 막으려 해도. 손이 없다.

아니 육체 자체가 없었다.

이건­

내 머리에서 나가 씨발­

누군가 그런 말을 뇌까렸다.

***

"시이이바바아알!"

몸 안에서 억눌렸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분노, 증오, 고통이 뒤섞인 채 하나의 감정이 되어 욕설을 내뱉었다.

"깨어났나? 신아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보기 싫은 얼굴이 있었다.

"조민성…."

`푸른 마나 살인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미친놈. 김성현의 라이벌이자. 김성현 다음으로 내가 피해야 할 상대.

머릿속이 복잡하다. 여태까지의 기억이 듬성듬성 잘려있다.

"시간이 없다. 네 머리 안에 있는 건 마법이 아니라. 일종의 유물. 아니면 저주거든. 차의 효과로는 5분도 못 버텨."

"너 이씨발…."

"쉿.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어. 너를 조종하는 사람. 김성현이냐?"

김성현이라는 단어에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김성현의 자지를 맛있다는 듯이 빨던 기억과 억지로 키스를 하던 김성현. 죽어가던 김성현의 장면이 빠르게 머리를 채워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을 붙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바닥을 기며 고개를 들어 조민성을 노려봤다. 시야가 어지러워 조민성이 4명으로 보였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꼭 듣고 싶나? 시간이 없을 텐데."

"씨발 대답해. 살인마 새끼야!"

내 욕설을 들은 조민성이 뱀처럼 길게 입꼬리를 찢으며 웃었다.

"알고 있었구나? 그럼 설명이 쉽지. 살인이랑 이유가 같아."

"뭐…?"

조민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영또플에 나오지 않아 모른다. 후반부에 김성현과 결국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까 하는 예상만 있었을 뿐.

조민성이 왜 살인을 저지르는지. 왜 푸른 마나 살인마라는 별명을 얻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나는 누군가의 계획을 망치는 게 좋아. 예를 들어. 누가 열심히 공부를 해 수석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다면? 그 사람의 앞날은 창창하겠지. 좋은 길드에 들어가. 열심히 노력해 좋은 직위를 얻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해. 토끼 같은 자식을 낳겠지."

입술을 매만지며 뱀 같은 눈으로 나를 내려보며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죽인다면? 그 사람이 세워놓았던 계획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거야. 누군가 공들여서 쌓아놓은 도미노를 아무도 안 볼 때 밀치고 싶은 거랑 같은 이치야. 누군가가 노력해놓은 것을 망치고 싶은 장난꾸러기 같은 심보. 그게 내 삶의 원동력이거든."

낄낄거리며 소리 내 웃는 조민성의 모습에 역시 미친 새끼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무료하게 지내고 있는데. 내 앞에 네가 나타나더군. 너를 처음 봤을 때 느꼈어. 아. 이 녀석 머리에 무언가 있구나. 이래 봬도 내가 마법적인 재능은 좀 뛰어나잖아?"

알고 있다. 설정상 세계관 내 최강 마법사의 잠재력을 가졌으니까. 그 강력함은 영또플에서도 몇 번이나 강조해서 언급할 정도였으니까.

"누가 너를 조종하기에 재미 삼아 풀어주려 했더니.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계속 관찰했어. 닦아냈지만 숨길 수 없는 약한 피 냄새. 처음 보는 마법 구조. 내 접근을 막는 결계까지. 누군가 너를 아주 공들여서 작업하고 있더군."

말을 하던 조민성이 왼손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소거법으로 줄이고 줄이다 보니. 백진희 김성현이 남더군. 처음엔 네 아빠가 한 짓인 줄 알았어. 워낙 미친 사람이니까."

"아빠…?"

신아린의 아빠는 뭐지. 소설에 언급되지 않았는데. 후반부 인물인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누구야? 백진희? 김성현? 네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누구야. 다르게 얘기해줄까? 네 주인의 이름이 뭐야?"

조민성의 조롱하는듯한 물음에 나는 내 가슴속에 한계까지 차올랐던 분노를 내뱉듯 소리쳐 외쳤다.

"백진희!!!"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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